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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an Aug 02. 2017

# 쓰다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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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때였나?

당시에는 생소했던 카페를 갔을 때 친구녀석이 '아메리카노'라는 것을 마셨다.

거무죽죽한 색깔에 내가 어렸을 때 정말 싫어했던 한약의 색깔이 났다.

다만 향은 좋았다. 달큼쌉쌀한 커피의 향이 잔의 진한 연기와 함께 천천히 올라왔다.

친구는 그 괴상한 액체를 홀짝 홀짝 마셨다. 홀짝 거렸다.

녀석의 표정은 마치 소주 한잔을 홀짝 거리는 것 마냥 잠깐씩 일그러졌다. 속으로 생각했다.


'맛있는 건 아니구나,허세쟁이'




얼마 뒤에 혼자 벽돌만치 무거운 노트북을 이고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카페에 달려갔다. 방에서 하면 되지.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다고 손가락질 하고 싶지만

'방에 있으면 잘 거야, 놀 거야' 별별 핑계를 다 대던 때였다.


냉큼 자리를 잡아 놓고 장대한 메뉴판앞에 섰다. 이리 저리 눈을 굴렸다가 그날 친구의 '아메리카노'가 생각났다. 내 자리는 멋드러진 조명 아래 창가가 보이는 자리. 그날의 나는 나름 옷도 차려입었었고 몸에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도 났다. 친구가 그랬다.


"남자는 아메리카노야."


나도 남자. 그래 아메리카노. 우아하게 받아가 자리에 앉아서 한 모금.


'환불은 안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무슨 얼어죽을. 쓰다. 썼다.




시간이 지나서 어느샌가 나는 천천히 '아메리카노'라는 녀석에게 적응했다.

이제는 나도 그 친구처럼 달달한 음료 앞에 당당히 아메리카노를 외쳤다.


"이정도는 마셔야 도시남자지."


허세는 덤이다. 프라페? 카라멜? 스무디? 남자는 아메리카노.

쓴 맛은 허세에 녹아서, 시간에 녹아서 어느새 연해지고 닳아졌다.

이것이 쓴 것인지 잊혀 갔다.




너무도 당연하게 아메리카노를 시켜 카페에 앉았다.

옆 테이블에 커플이 앉아 조잘 조잘.

그들이 가져온 커피의 투명한 잔 안에 나와 같은 아메리카노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차가움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아직 한모금도 안한 녀석이었다.


"으, 써."


녀석을 한모금 마신 커플 A가 인상을 썼다. 나는 싱글 웃으면서 나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어라, 쓰진 않다. 나도 A의 날에는 썼을 텐데. 나도 그날에는 써서 못먹었는데

나도 그날엔 환불하고 싶었는데. 그날에는 나도.




가끔은 살면서 나도 모르게 쓴걸 쓰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가끔은 살면서 나도 모르게 아픈걸 아프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가끔은 살면서 나도 모르게 괴로운 걸 괴롭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내가 쓰다고 하면,

내가 아프다고 하면,

내가 괴롭다고 하면,

누군가는 나를 비웃겠지? 누군가는 나를 비난할꺼야, 누군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꺼야.


그 사이 나는 쓴 것에 적응했다.

그 사이 나는 아픈 것에 적응했다.

그 사이 나는 괴로운 것에 적응했다.

그 사이 참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런 것들에 적응해 버렸다.




"쓰긴 뭐가 써. 그냥 마시는 거지."


라고 말했던 내가 이제는


"써, 그래서 마셔. 쓰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쓴것을 쓰다고 쓴다. 감추지 않고 쓰다고 쓴다.

쓴 맛을 이해한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해서 어른이 되고 싶지도 않기에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이제는 당당히 말하고 쓴다.

그런것을 이해한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해서 어른이 되고 싶지도 않기에


오늘도 아메리카노는 쓰다.

그래도 나는 그 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바깥을 바라보곤 한다.

나는 아마 평생 아메리카노가 쓸 것이다. 또 쓰다고 말할 것이다.

그날의 바보같던 나는 이제 없으니 말이다.


feat. 김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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