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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28. 2021

벌레가 되는 상상을 했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감상




책을 읽다 말고 동생에게 물었다.



야. 벌레가 되는 거, 어떨 거 같아?



동생이 대답한다.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썩 나빠 보이지 않는데.



상상을 한다. 내일 아침에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벌레가 된다. 상자에 꼭 담기는 함지박만 한 벌레가 될 것이다. 누가 봐도 비범한 크기에 번쩍번쩍한 등딱지를 빛내며 벽을 기어 다니는 벌레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그레고리는 출근을 걱정하고, 가족에게 면구스러워하고, 혼자만의 낭만을 찾는다. 상상 속에서 벌레가 된 내 마음은 자유롭다. 무겁던 모든 것을 팽개쳐도 자책이 없다.

나는 벌레가 되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속알머리가 그대로라면 다른 껍데기에 들어가도 나는 인간이라 불릴 수 있나. 정신이란 참 기묘하다. 누군가 하루에 세 번씩 나를 유진이라고 부르면 언젠가 나는 김유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바구니에 담겨있다가 벌레의 바구니로 옮겨간 그레고리 역시 벌레가 된다. 고고하고 명민한 벌레가 된다.



읽는 중에 짜릿했던 대목은 그레고리가 벽과 천장을 타는 취미를 즐기는 묘사였다. 사람인 나는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글을 쓰지만 벌레인 그레고리는 음식보다 찌꺼기를 먹음직하게 느끼고 중력과 상관없는 재주를 부린다. 그레고리가 불행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레고리를 가엾게 여기며 동정하는 것은 그레타와 그레고리의 부모님,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다.



감상을 쓰는 김에 곤충의 뇌에 대해 찾아보았다. 인간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한 흉측스러운 건 들어있지 않고, 몸의 마디를 지나가는 신경절이 머리께에 모여 뇌의 기능을 해준다고 한다. 깔끔하고 단순한 구조다. 커다랗게 세 덩이로 나뉜 신경이 홑겹 눈과 더듬이, 윗입술을 맡아서 움직이는 벌레의 머릿속. 그레고리의 작은 머릿속에는 뇌가 사라지고 신경절이 남았다. 거기에 남은 인간의 부스러기가 벽을 타는 게 신나지려는 마음에 제동을 건다. 위생적이지 못한 방구석에 트집을 잡는다. 화를 내고 슬픔도 느낀다. 여동생을 안쓰럽게도 바라보았다. 음악을 감상한다. 상처를 받는다. 목숨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동생이 자신을 보고 놀랄까 봐 소파에 가림막을 두르고 숨어 들어가는 그레고리. 벌레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을까, 아니면 필사적으로 인간을 붙잡고 있었던 걸까.

인간이란 뭘까. 벽을 타면 그레고리는 행복해질 텐데.



동생이 벌레가 되는 상상을 했다.

처음에는 말을 걸어본다. 저 함지박 만한 딱정벌레 속에 내가 아는 동생이 들어있다. 녀석도 생각이 많을 테니 어떻게든 소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통이 없으면 유효기간이 생긴다. 저기 있는 저것이 내 동생이 맞을 거라는 확신에 대한 유효기간. 예전의 동생과는 다르게 생겼고, 끽끽거리는 소리가 징그럽고, 말도 통하지 않는다. 내 동생은 저런 미물보다 훨씬 똑똑하고 특별한 녀석이다. 어쩌면 저건 그 애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 끔찍한 생물에 시간을 허비할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실종신고를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비슷한 껍데기에서 오는 안도감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비슷한 신체와 내장을 가진, 지구적으로 정해진 약속 안에서 살아가는 동류겠구나, 하는 인식. 그 정도의 사사로움. 그레고리는 인간과 벌레의 삶을 동시에 느끼며 고귀하게 죽었다. 어떤 인간은 벌레의 갈퀴 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그레고리는 못 되지만 그레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고귀한 죽음을 날름 집어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내 갈 길을 찾아 떠날 이기적인 인간.



예나 지금이나 참 좋은 책이다. 멀쩡한 인간도 벌레가 되고 싶게 만들 정도로 좋은 책이다. 하지만 아직 인간이니 인간으로 산다. 부족하고 흠 많은 인간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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