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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y 01. 2021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문장 단상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붉은 돌담 앞에서’ 중

나는 이 돼지가 작고 연약해 보여서 내 자신이 무슨 저승사자라도 된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선이라도 베풀듯 팔을 한 번 휘두르면 간편하고 즉각적인 죽음을 선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생명은 그렇게 간단하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빼앗지 않으면 죽일 수 없다. 절반쯤 생의 경계를 넘어선 자그마한 새끼 돼지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

오늘 아침 <고기로 태어나서>를 완독하고 김원영 작가의 <실격당한 자들의 변론>을 시작했다. 한참 읽어내려가던 와중에 이질감이 들었다. 우에마쓰 사토시의 장애인 살상사건 단락이었다. 복지시설의 직원이었던 20대 청년이 야밤에 경비를 뚫고 잠입해 열 아홉명의 중증 장애인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 사람이 사람을 열 아홉명을 죽였다. 하룻밤만에.​


아침에는 새끼돼지의 죽음 조차도 질기고 간절한 것이었는데 저녁 나절에 동물도 아닌 사람이 우수수 맞은 떼죽음의 기록을 보았다. 이런 나의 표현은 적절한 것일까. 동물앞에서 사람은, 사람앞에서 사람은 무엇일까.

인간의 몸은 곧 잘 상처입으면서도 쉬이 죽지 않는다. 어쩔때는 맥없이 죽어버리면서 외상은 없다. 호흡 한번과 함께 노화하는 육체. 공룡처럼 무지막지하게 크지도 않고 개미처럼 하염없이 작지도 않은 애매한 사이즈의 몸뚱이는 그만큼이나 복잡하다. 추울땐 옷이 없어서, 더울 땐 옷을 다 벗고 사선을 넘나들고 10개월이나 복중에 있는데도 태어나면 몸을 가누지 못해 보호할 성체가 필요하다. 날카로운 발톱도 몸을 지킬 독 한방울 내지 못하는 인간.  피부는 보드랍기 그지없어 작은 가시에도 찢어지고 피가 나는 인간. 우리는 개와 돼지와 닭보다 어디가 더 나은 구석의 짐승인걸까. 한밤 중에 본인의 신념으로 정화된 일본을 만들겠다며 거동이 힘든 중증 장애인들만 골라 목뼈에 날이 가 닿을 정도로 깊은 칼질을 할 수 있는 짐승, 인간이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연암 박지원이 200년 전에 썼던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저희들끼리 가장 많이 잡아먹는 짐승, 인간으로 태어나서.



*


범이 아직도 표범을 잡아먹지 않는 까닭은 차마 제 겨레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범이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먹는 것 만큼 많지는 못할 것이고, 범이 말이나 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말이나 소 먹는 것 만큼 많지는 못할 것이며, 범이 사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저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 만큼 많지는 못할 것이다.

박지원 <호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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