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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y 06. 2021

내 시체를 보는 연습을 해야지

아직 기운이 있으니까




시체는 다만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보고 있었다. 본다는 것, 아무런 의식도 없이 평소 하고 있는 대로 본다는 것이 이토록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참신한 체험이었다.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일도 없고 소리치며 뛰어다니지도 않는 소년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을 확인하는 방법을 배웠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중에서




*


삭발을 하고 싶다!

빗자루 파마를 해놓은 게 아까워 머리 끝 하나도 자르지 않은 채로 출국했더니 이제는 모가지가 휘청할 정도로 뒤통수가 무겁다. 말총머리를 할 때는 더 심하다. 높게 모아 묶어도 날개뼈 근처까지 치렁치렁한 내 머리털. 심지어 숱도 푸지게 많아서 길면 길수록 지저분한, 검고 성가신 내 털.


원체 미용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이라 젤 네일이나 패디큐어는 물론이고 미용실도 잘 가지 않는다. 피부과, 마사지, 보톡스 같은 것들도 먼 나라 이야기다. 내버려 두면 죽죽 길어대는 것이 털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나는 까만 긴 머리를 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빗질 안 한 소처럼 도저히 못 봐줄 때가 되면 한 번씩 아무 미용실이나 들어가 숭덩 중단발을 해버리거나 상한 머리 끝만 쳐내는 것이다. 스무 살 초반에 미용일을 하는 손님의 헤어모델을 해준 적이 있었다. 새하얀 은발로 염색을 했었는데, 정말 두피가 녹아버리는 줄 알았다. 헨리가 갖은 애를 써서 만들어준 고운 머리 색깔이 일주일도 되지 않아 모조리 빠지고 끔찍한 노란색이 되었을 때, 나는 정말 못 봐줄 꼴이었다. 결국 셀프 염색약을 사다가 검게 밀었다. 탈색을 하도 해서 몇 번을 처발라도 불그레한 갈색이 고작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도전이었고, 인생에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을 일이다. 매번 자라는 머리 뿌리를 염색하는 것도 번거로워 죽겠다. 사계절 멋을 부리는 사람들은 날 때부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태어난 건지. 타고난 대로 검은 털로 사는 게 마음 편하다. 얼굴에 검은색이 잘 받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미용실을 이삼 년에 한 번 가는 것이 자랑이었는데. 돈도 아끼고, 수고도 덜고. 여차하면 싹둑 자르고, 다시 못 견딜 때까지 방치하고. 그런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삭발이 하고 싶다.


인생에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일 아닌가. 매일 아침마다 포니테일을 할지, 땋아 내릴지, 만두머리를 할지 이리저리 묶었다 풀었다 할 필요도 없고, 지금도 겨우 10분 남짓인 샤워시간이 5분으로 줄어들 것이다. 어깨에 맨 가방끈에 머리털이 끼지도, 고개를 돌렸다가 동료에게 머리카락 채찍을 날릴 일도 없다. 잡티처럼 졸아들은 털들이 밤송이 모양으로 자라는 과정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극성스런 성격에 털이 몸을 세우는 그 새를 못 참고 평생 까까머리로 살게 될까 봐 좀 걱정이긴 하지만. 해보고 싶다. 삭발!


사람이 제 몸에서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에 막연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죽어버린 자기 자신이 연상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기억도 안나는 어느 책에서 나온 내용이지만 퍽 인상적인 말이다. 머리카락을 자르기만을 위해 미용실을 가는 나는 매번 벼린 가위질에 허리가 끊기고 흰 타일에 떨어지는 털들을 본다. 거기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기묘한 느낌이다. 나였던 것, 내 일부였던 것이 순식간에 타는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이었던 머리카락과 언젠가 가루가 되겠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

이름 모를 책 속에 말마따나, 나는 내 시체를 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내 미래를 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매일 같이 묶어주고 빗어주고 박박 빨아도 주던 내 털들이다. 가위질 몇 번에 공포영화의 소품처럼 힘없이 온 바닥에 널브러지는 저 것들이 한 때는 내 두피에 악착같이 붙어있었다니. 한 움큼 뭉친 채로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한층 섬뜩하다. 사지를 아무렇게나 팽개친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같다. 나에게는 이 순간이 그렇게 유쾌하지 않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나. 밟히고 버려질 나. 누구에게 보이기라도 할 새라 부리나케 쓸어버리고 검은 봉투에 담겨질 나. 생각해보면 손톱 발톱도 깎아내기 무섭도록 쓰레기통을 찾았다. 꼭꼭 모아서 한 번에 버렸다. 당장 눈 앞에서 치워야 한다는 듯이. 그렇게 인생 동안 평생 깎여나가 찾을 수도 없을 불쌍하고 더러운 나의 일부. 미용실에서 나는 죽어서 누워있는 내 시체를 본다.


<금각사>에서는 일본의 장례 문화대로 죽은 친구의 시체에 조의를 표하는 화자가 나온다. 하얗게 염이 된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주인공 미조구치는 ‘보고 있다’는 행위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느낀다. 눈을 감은 친구와 그것을 ‘보고 있는’ 미조구치. 늘 하던 것처럼, 숨을 쉬고 걷고 무언가를 보고 손가락을 까딱거리지만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된 친구. 친구였던 시체. 그걸 보고 미조구치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는 이것을 ‘참신한 체험’이라고 말했다.

내가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사로잡혔던 어떤 쓸쓸함은 미조구치와 같은 것이었을까. 저기에 죽어있는 나와, 아직 ‘보고 있어서’ 삶을 느끼는 나. 떨어진 머리카락과미용실 의자에 앉아있는 나.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죽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보는 거라고 말했던 책에서는 이후에 이런 문장이 이어졌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죽음을 눈 앞에서 치워버리려고 한다.’

초라하게 죽어버린 내 시체를 보고 싶지 않아 곧장 쓸어버리고, 변기물을 내린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죽음을 내쫓으며 보내는 시간이라지만 이렇게까지 구현화된 나의 시체는 아무래도 보기 편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내 몸의 쓰레기를 셀 수도 없이 덜어낸다. 그리고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나의 목숨도 삶도 그렇게 될 것이다. 지구가 늘 일정량씩 덜어내는 유기체 중에 하나로 사라질 것이다.


내가 삭발을 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털이 나오겠지. 싱가포르는 미용실도 비싸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을 갈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긴 지금에서 더 길어진 채로 산발이거나 내 얼굴만 한 머리카락 만두를 정수리에 얹은 꼴로 비행기에 타게 될 것이다. 미용실의 하얀 타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덮을지도 모른다. 내가 앉은 의자를 나였던 쓰레기가 동그랗게 둘러싼 채로 이루어지는 삭발.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애매하게 검은 부분을 남겨두느니 쌈박하게 다 밀어버리라는 꿈을 꾸고 있는 나의 삭발. 이 몸뚱어리의 간판이었던 두부를 여상히 감싸주었던 털들에게 배신만 안겨줄 나의 삭발.


그리고 내가 보게 될 한 올 한 올 흩어진 나의 미래.


곧 버려지고 태워질 죽어버린 나. 부질없는 나.




여기까지 쓰고 보니 치기라는 생각이 든다. 삭발한 여자 바텐더를 고용해 줄 직장이 있을까도 좀 걱정이 된다. 아무리도 머리통에 검은 부분은 좀 남겨두고 잘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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