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May 09. 2021

퀴어 여기 있어요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며.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

‘특권’ 중


“그게 뭐하는 짓이니? 그걸 줘서 어쩌자는 거야? 왜 그걸 그 애한테 주려고 한 거냐고?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니?”

모욕이자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로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로즈에게 사랑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키스와 결혼을 연상시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충격받고 까발려진 그녀의 감정은, 비록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시들면서 가장자리부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플로는 모든 것을 말려버리는 열풍이었다.

“맞구나,” 플로가 말했다. “토할 것 같다.”

플로가 얘기한 것은 미래의 동성애가 아니었다. 그에 대해 알았거나 생각해봤다면, 보통의 연애질보다 더욱더 농담 같은 일, 더욱더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역겨워한 것은 사랑이었다. 예속과 자기 비하와 자기기만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그 위험을 보았고 허점을 읽었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 희망, 열의, 바람.


​​


*

​​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쓰는 글.





'관심 없어'라는 말은 한순간에 누군가를 밑바닥까지 처박는다. 내가 결혼 생각이 없고 엄마가 될 생각이 없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아이들과 임산부에게, 육아를 하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어떠한 편에서 편의를 봐주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그런 것이다.


'관심 없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은 '내 주변에는 없어'다. 나는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이 태어나고 온갖 개성을 뽐내는 이 세상에, 눈인사라도 한번 하며 지나왔던 수많은 사람들. 그 사이에 단 하나의 퀴어도 없었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극히 드물 것이다. 당신의 주변에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알지 못했던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어딜 가도 말한다. 나는 퀴어이며, 양성애자이고 이것을 숨겨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는 나로 인해 인생에 퀴어 한 명을 만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심스럽다. 이만큼이나 민감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관계 사이에 생기는 사사로운 감정싸움이나 의견들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니까. 성소수자는 타인보다 자기 자신과 먼저 싸운다. 내가 알던 세계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에, 당연만 알고 있는 가족과 주변인들에 대한 걱정에, 모든 것을 인정하면 어디까지 타락하게 될지를 일찍이 가늠한다. 그 과정을 거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 이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그다음에는 사회에 나와서 부딪혀야 할 차례다. 친구들 사이에서, 회식자리에서, 방송에서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성소수자를 향한 유머와 혐오들에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 속 화자는 이야기한다. 어머니인 플로가 동성애에 대해 알았거나 생각해 봤다면, 더욱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리라 생각했을 것을.


정상만 있는 세상이란 얼마나 고루한가. 사랑에 빠졌을 때 상대방의 성별에 당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성격이, 웃음이 신경 쓰이는 인생은. 누군가가 언제부터 여자를 좋아한다고 느꼈어요?라는 질문에 그러는 당신은 왜 지금까지 남성만 사랑해 봤나요?라고 되묻지 않는 인생은. 일상적으로 무례한 말들에 따귀를 맞는다. 아무것도 모를 이성애자들의 인생이 평탄해 보인다. 적어도 성소수자가 자신에 대해 고민하느라 발목을 잡혔던 시간에 그들은 다른 주제를,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의심보다는 건설적인 것들을 고민하고 있었을 테니까.



이성애자들에게도 하늘의 별과 같은 사연과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째서 나만 제일 불행한 것 같은 글을 써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겠다.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에 혼란을 겪다가 충동적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이 원인이었던 나의 첫 장례식. 성 정체성으로 인한 군대 내 따돌림에 상처 난 손목을 고래 문신으로 가린 Y. 왜 세상은 바람을 피우고, 학교폭력을 하고, 성폭행을 한 특정 인물에게는 기이하게 관대하게 굴면서 어딘가의 성소수자에게는 이렇게나 야박할까. 내 친구들은 왜 이렇게 살다가 가야만 하는 거지. 우리는 어째서 이런 세상에서 소수자로 살아남으려고 애써야 하는 걸까. 이렇게 태어난 거라서? 그냥 원래부터 이래서? 남들과는 다른 게 잘못이라서?




'관심 없다'​


아무도 관심 없지 않다. 씹고 맛보는 데는 익숙하면서 눈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는 토악질을 할 뿐이다. 살아서 지구에 숨 쉬고 있는데 안면부지의 남에게 내 정체성에 대해 관심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또 뭔가. 내가 속해있는 집단이 인터넷을 달구고 댓글로 싸우고 있는 세상에 변화를 요하지 못할 이유는 뭔가. 진정한 무관심은 '관심 없다'는 말도 자제해주는 관용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관심 없음을 이렇게 먼 곳에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나는 대체 무슨 봉변이냔 말이다. 누군가 관심이 없는 대상. 그게 나다. 퀴어고, 바이섹슈얼이자,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근래 있던 변희수 하사의 비보에 대한 글을 한 번쯤 써야겠다 하고 다짐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서럽고 비통하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성애자인 부모님 사이에서 양성애자로 나온 내가, 저도 모르게 퀴어의 부모라는 당사자가 되어버린 나의 엄마 아빠가 생각나 비 오는 밤 다시 우울해진다.



내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면 누군가는 흔해 빠진 퀴어 문학이라고 분류하는 건 아닐까. 내가 기력이 다 하도록 온 마음을 바쳤던 소녀에 대해서 묘사와 작품성이 부족하다고, 현실에 없는 이야기 같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혹은 누군가에게 납득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을 비정상성의 전시인 걸까. 이런 고민을 이성애자도 할까. 내가 말하는 진실한 이야기보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으로만 보이게 될 걱정을. 소수자이기 때문에 내가 지워지고, 나이기 때문에 지워지는 소수자성을.




퀴어는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사상에도 관심에도 상관없이, 퀴어는 여기에 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내 시체를 보는 연습을 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