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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y 14. 2021

네가 태어나면 사랑받을까

나 같은 사람에게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들어가며_잘못된 삶과 좋은 만남 - 돌림노래’ 중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 현대 사회에서는 유전공학 기술의 발달로 일정 수준의 유전적 기획이 가능해졌다 해도 자녀는 수정란에서 태아 단계를 거쳐 세상에 나와 점차 하나의 고유한 인격을 형성하며 부모 앞에 ‘나타난다’. 출산과 동시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한 사람의 개인으로 성장하고, 확장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축적하고 체화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부모 또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성숙일 수도 퇴보일 수도 있지만, 부모 역시 서서히 자녀와 ‘만나가는’ 것임은 틀림없다.



*



언젠가 아이를 원하는 애인이 있었을 때, 나는 반발했다. 생물학적으로 비장애인의 출산은 확률적인 문제이며 행여 검사 결과 장애아가 나왔을 때 중절이나 출산을 감행해야 하는 것은 나의 몸이라고. 나는 보장되지 않은 것에 모험을 할 수 없다고. 태어난 아이가 보기에 멀쩡하더라도 후에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은 성격장애를 가지게 되면 어떡하냐고. 인간이 만들어질 때 생기는 모든 변수를 극복하고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성숙하냐고.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내 몸을 나눠 쓰고 내 배를 찢어야 하는 거면 나는 아이의 성격부터 외모까지 100프로 ‘온전한’ 인간을 원한다고. 그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 보장조차 믿을 수 없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겠냐고.


​‘온전한 인간’이 뭘까?



내가 한 말은 당연한 것을 원하는 것 같다가도 당연하지 않게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는 말이다. 이미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의 고된 양육을 받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실격자로 만드는 경솔한 발언이다. 좋은 양육자가 되기 위해 그저 사랑할 각오로 태어날 아이의 생명과 미래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 맞는 말이며 동시에 두려운 말이기도 하다.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낳지 않을 생각을 하는 나는 평생 부족한 인간일 것이다. 마음이 콱 막힌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어떤 아이가 나오든 사랑할 거야’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삼 년 전에 애인에게 했던 말처럼, 인간을 키우는 것은 '아이를 낳고 싶어’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몸이고, 당신과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았으니 군인권에 대한 이야기에 함구한다. 남성으로 살아보지 않았으니 남성 인권에 대한 주제에도 붙일 말이 없다. 장애인의 부모가 되어본 적도, 장애를 가져본 적도 없으니 이 일도 마땅히 함구해야 한다.(적어도 약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적어도 누군가를 상처 줄 일이 없도록 침묵하는 게 차라리 낫다. 섣부른 언행으로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다. 이전까지 내가 주장했던 변론으로 얼마나 많은 귀중한 삶들을 폄하해온건지. 이제 나는 더이상 이 글의 처음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내 몸에 따라오는 변화가 싫어서, 그의 아이를 낳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비혼에 무자녀인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더이상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상처받을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세상 모든 생명의 부모 된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이미 영웅이며 전사이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



아직 임신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생기지도 않은 세포에게 겁을 먹는다. 네가 태어나면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이렇게나 이기적인 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까. 그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나는 끝끝내 부족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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