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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l 30. 2021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옥타비아 버틀러, <킨> 감상


​​


“채찍질을 얼마나 많이 하지?”
“나는 한 번 봤어. 한 번만으로도 욕 나오게 많아!”
“그래, 한 번도 너무 많지. 하지만 내가 상상한 모습은 아니야. 감독관도 없고,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을 시키지도 않고….”
나는 케빈의 말을 잘랐다. “제대로 된 숙소도 없고, 흙바닥에서 자야 하고, 음식은 부족해서 쉴 시간에 텃밭을 가꾸고 세라가 눈감아줄 때 부엌채에서 뭐라도 훔치지 않으면 모조리 몸져누울 지경이지. 권리는 하나도 없고 언제든, 아무 이유도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팔려나갈 수 있어. 케빈, 사람들을 때려야만 잔인한 건 아니야.”
“잠깐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잘못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야. 난 그저…….”
“아니, 그러고 있어. 그럴 의도는 없겠지만 그러고 있다고.”


​​


*


체력이 어느 정도 붙어서 퇴근 후 한적한 강변을 달리고 지루한 출퇴근길에 책도 읽고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SF소설 <킨>은 이런 상황 속에서 책을 펼친지 이틀 만에 500여 페이지를 전부 읽어버린 놀라운 작품이다.

주제만 들어도 흥미가 안 생길 수가 없다. 1970년대를 살아가던 주인공이 18세기의 미국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내용이라니.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한창 노예제가 성행하던 시절의 미국 남부, 주인공 '다나'는 흑인 여성의 몸으로 그곳에 떨어지게 된다.



작년에 역병의 기세를 뚫고 뜨겁게 일어났던 운동이 있었다.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라는 문구를 전 세계에 알리며 미국 내 만연하는 인종차별에 항의한 대대적인 시위. 그들의 분노를 동양인의 시점으로 보고 있는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많이 해 온 이야기지만 나는 서양인이 싫다. 이것은 내가 남성이 불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개개인의 인격체로 볼 때 미워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각기 나름의 장점과 매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지만 '백인'이나 '남성'으로 치환되는 순간 어딘가 거북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정복당하기보다 개척하는 입장이었다. 차별당하기보다 차별을 묵인하는 입장이었다. 외관 및 기타 조건에서 타고나길 유리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자들의 삶을 모른다. 아무리 구구절절 이야기해도 피상적인 위안과 안쓰러움을 보낼 뿐 근본적으로 알지 못한다. 외계인을 두고 말을 거는 기분이다.

타인의 삶을 모르기 때문에 분석하고 글을 쓰는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상할 주제다. 인종차별과 가부장제, 장애인 인권과 동물권 등.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떤 것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걸까? 인간이라서 이만큼밖에 못 되는 것에 왜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소설은 올곧지만 피식 계급인 흑인 여성과 유해하면서도 인간적인 백인 남성들이 주를 이룬다. 그 시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에서 명치를 걷어 차인 듯한 답답함이 든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일관적인 주인공의 강단에 책장을 덮을 때엔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잘 만든 책이다. 지구에 일어나는 모든 이상하고 잔혹한 일들에 따라붙었던 '어째서?'라는 의문을 (내가 그렇게나 꺼려하던) SF소설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마주하게 될 줄이야.​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었을까.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긴 했을까.

억울한 세상에 대한 반항과 분노는 도려진 걸까.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래도 살아있고 싶었을까.

권력을 쥔 쪽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말 몰랐던 걸까. 그럴 수가 있나.

이런 건방지고 안일한 질문들에 소설 속의 묘사들이 아찔할 만큼 도움이 됐다. 그 시대를 견딘 것도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이 소설을 쓴 것도 이 소설을 읽는 것도 다 같은 인간이다. 죄 없는 이는 없겠지만 나는 동양인이라 백인의 죄가 밉다. 백인이 떵떵거리는 것을 보는게 고깝다.


작가가 바라보는 날카로운 세상에 허를 찔린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내일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다. 가치 있고 자기반성적인 시간이었다.


입안이 씁쓸해지지만 포기할 수 없는 작품, 흑인 여성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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