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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l 28. 2021

날개도 발톱도 이빨도 없으면서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하지만 모즈에게 삶이 힘겨운 것이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나는 모즈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다. 나무에 올라가려고 하는 모즈의 본능적 욕구는 영영 충족될 수 없었을까? 모즈는 항상 괴로워하고 지쳐 있었을까? 눈 덮인 바닥을 느리게 이동할 때 두려웠을까? 어째서 자신은 동료들과 다르게 태어났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했을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들이 나 자신의 삶과 장애에 관에 끊임없이, 지칠 정도로 질문해온 물음들과 얼마나 유사한지 깨닫게 되니 말이다.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중




*


모즈는 일본에서 야생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된 원숭이다. 손발이 기형으로 태어난 모즈는 나무를 넘나들며 이동하는 동료들의 뒤를 차가운 눈밭 위에 기고 미끄러지는 방법으로 따라간다. 유아기를 넘어서까지 살아남지 못하리라던 연구자들의 예측과는 다르게, 모즈는 30년 가까이 살았고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모즈는 당당한 무리의 일원이었다.

인간은 왜 모즈를 가여워하는 연출의 다큐멘터리를 찍었을까.


무언가를 경원시해도 된다는 생각은 모든 것을 차별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인의 몸으로 태어나 본인의 생각이 가장 가까운 채로 살아가는 것은 어찌할 방도가 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모순이 머릿속을 간지럽히는데도 모르는 척을 한다면 그건 정말로 씁쓸한 일일 것이다.  역시  아닌 다른 것들에 발휘되는 무심함과 배려 없음에 놀란. '자연스러운 ' 언제부터 자연스러웠는지. 길에 넘치는 계단과 턱은, 승강기 없는 빌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희귀병들과 정신질병들은. 나는  모든 것에 편견 없이 쳐다볼  있을까.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을 모르는 이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장애인이며 비장애적 상황의 전제에 너무나 익숙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장애인의 삶을   없다. 물론 동물의 삶은 더더욱   없다. 역사에는 인간이 '짐승에게도 하지 못할 ' 동족에게 저지른 수많은 만행의 기록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짐승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을 당하며 살고 있는가? 인간이기 때문에 치를 떠는 사례에 동물을 배제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살고있는가?  인간은 이만큼이나 오만할까. ,  .


인간은 자신같이 생기지 않은, 어딘가 도드라지는, 익숙하지 않은 다른 인간을 보면 그 사람이 처한 불행을 먼저 생각하는가 보다. 타인이 살아있는데 써온 모든 에너지보다 눈앞에 보이는 약간의 다름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이다. 타인의 인생을 어찌 알지. 이종 생물의 사고를 어떻게 알지. 인간의 기준은 어째서 당연하게 인간인 건지. 확언할 수 없다면 'Unknown'의 상태로 내버려 두고 섣불리 개입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머리를 굴리는 것 외에는 영 재주가 없는 종족이 멋대로 자연과 세포들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 우습다. 판단하면 안 되는 것들에 옳은 척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 원숭이 한 마리의 삶 조차도 추론하지 못하는 주제에.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무시하고 또 무시해서 그들이 스스로가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면, 그것은 인간이 그간 동물에게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반성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인간은 날개도 발톱도 이빨도 비늘도 없는 주제에 다른 생물들의 죽음에 기생해 오늘까지 살았다. 참 많이도 죽였다. 많이도 착취했다. 인간이 망가뜨린 것들이 어쩌면 이렇게 많은지.


동물에 대해 생각하면 괜히 죄책감이 들고, 혼나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 육식을 하는 생물로 살면서, 계란과 우유가 기호식품인 인간이라서. 나는 많은 목숨을 먹어치우면서 이만큼 자랐다. 뱃속에 다른 동물들의 고통을 담았다가 싸지르는 것을 반복했다. 원래 무언가를 깨닫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가부장제의 부당함에, 육식과 일회용품이 불러오는 오염들에, 축산 동물이 겪는 고문들에 더 이상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변한다. 뒤늦게 지구와 지구 위 다른 생명체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게 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버릇없이 오냐오냐 종을 번식해온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무를 잘라 만든 종잇장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배운다. 다른 존재를 이해한다는 오만을 한 줌씩이라도 내려놓는다. 내가 해온 것은 다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노라고, 내 마음의 위안을 위한 것들이었노라고. 대상의 심중은 눈곱만치도 알지 못한 채로 자기만족에 저지른 일이었다고.


모즈를 바라보는 나의 눈도 편협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눈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내 경험과 가치로 측정된 추측일 뿐이다. 모즈가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나무 위의 동료들을 보며 박탈감을 느꼈는지, 아기 원숭이를 업고 눈밭을 달리는 것에 서러웠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모즈는 머리 좋은 인간들의 모든 예상을 깨고 살아남아 새끼를 키우고 조금 뒤떨어질지라도 동료들과 함께 먹이를 찾아가는 이동을 했다는 것. 불편해 보여도 그저 숨 쉬고 움직이는 채로 오랫동안 살아서 눈밭을 미끄러졌다는 것.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쵤영인원이 귀찮게 따라붙지만 않았다면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보란 듯이 더 잘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정말

인간이 망가뜨린 것들이 어쩌면 이렇게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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