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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l 31. 2021

너나 그렇게 사시던가

저는 뭐 알아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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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자연에 대한 본질화 된 시각에서 비롯된 서사들은 힘, 자율성, 생산성, 자립 등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더 취약한 신체들에 대한 억압을 가속화한 가부장적 가치들과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그랬는데"라는 향수와 "자연적인 것"에 대한 찬양은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에 비해 얼마나 혹독한 삶을 살아왔는지 간과한다.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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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혼에 무자녀 주의다. 애인도 없고 이성 및 동성과의 섹스에 미련도 없다. 지금 내 삶은 타인과의 거추장스러운 교감 없이도 분주하게 돌아간다. 내 한 몸 꾸리는 것도 바쁜 인생이다.

바로 전에 읽은 노예제가 있던 시절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는 아이를 마치 생무처럼 낳아대는 흑인 여성들이 있었다. 말이 곱지 못하지만 텍스트 그대로 '네 명의 아이를 낳고 다시 임신 중이었다' 같은 문장을 읽으면 여성의 몸이 마치 인간을 생산하는 기계와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나는 임신도 아이도 원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번 피를 내는 장기를 어떻게든 이겨먹기 위해 조만간 팔뚝에 바늘을 심을 예정이다. 삼십만 원을 내면 일 년에서 삼 년간은 불쾌감 외에는 얻을게 없는 생리를 멈출 수 있다. 한통에 만 오천 원을 호가하는 경구 피임약을 생각하면 남고도 한참 남는 장사다. 마지막 섹스를 한지 이년이 넘었지만 생리를 미루는 약은 끊임없이 먹는다. 이렇게 먹다 보면 언젠가 영원히 내 인생에서 떨어져 주기를 바라면서. 쓸모없는 능력이 도태되기를 원한다.

아이 계획이 있거나 출산을 한 분들을 보면 드는 마음은 부러움 뿐이다. 사람 하나를 못해도 20년은 달고 살 금전적 심리적 여유가 있는 환경이라는 말인데 부러움이 들지 않을 수 있을 리가. 나는 그럴 형편이 못된다. 내 몸뚱이 하나 챙기는 것도 버거워 미니어처 같은 작은 인간을 만들고 키우는 건 상상이 안된다. 내가 받는 월급으로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이번 생애 내 명의로 된 집을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전세라도 빚 없이 들어가면 다행인 수준인데 당연히 그럴 일이 있을 리 없다. 나의 인생은 일회용이다. 한 달 벌어서 한 달 살아남고, 다음 달을 벌어서 그다음 달을 살아남는다. 꼬박꼬박 공중에 흩날리는 월세를 지불하면서 근근하게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이 내가 보는 미래다. 지금이야 그나마 젊지만 더 나이가 들면 오래 사용한 만큼 낡아빠진 몸이 문제를 일으킬 테고, 나이 먹고서도 엄마 아빠에게 징징대지 않으려면 입원비를 낼수 있을 정도만 적금을 들어야 한다. 장례식 비용은 꼭 따로 빼둔다. 이 정도가 내가 이번 생에 바라는 것이다. 이 계획 어디에도 결혼과 출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나 말고 다른 인간에게 나한테 만큼의 관심을 줄 기운도 없다. 다른 인간은 다른 인간들끼리 알아서 잘 만나고 살고 있을 테니 나는 내 앞에 놓인 것만 신경 쓰면 된다. 이 얼마나 속 편하고 거리낌 없는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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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이런 딸을 둬서 많이 변했다. 여자는 혼자서 살 수만 있으면 결혼하지 않는 게 제일 좋다 말하고 딸이 여자 친구를 데려와도 별 대꾸가 없다. 아빠가 죽으면 상주는 내가 되고 아마도 꽤 높은 확률로 족보에 더 올릴 이름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뭔가 태어나게 되면 나의 성을 붙여서 올릴 것이다. 나와 동생이 성인이 되고 말대꾸가 늘면서 아빠는 많이 변했다.

엄마는 아직 옛날에 산다. 존경해야 하는 남자를 만나야 하고, 동성애인을 데리고 오면 두 번 다시 안 볼 거라고 말하고, 집은 남자가 혼수는 여자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간 피해자는 몸가짐이 조신하지 못했던 것이며 남성은 원래 성욕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나는 엄마와 여러 번 연이 끊겼다 붙었다. 엄마가 나를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엄마의 태를 받은 큰 딸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살아온 모든 방식에 토를 달고 거부하는, '지나치게 특이'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직접 만들어놓은 자식이라서. 호적에서 파지도 절연하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 왔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했다. 나는 이미 성인이고, 법적으로 엄마에게 귀속될 이유가 없다. 그게 엄마를 많이 불안하게 하는 모양이다. 정말 나의 결혼식에 엄마가 초대되지 못할까 봐. 내가 여자랑 결혼한다면 엄마는 어련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남성과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엄마가 말하는 "여자는 원래"같은 것은 없다. "옛날에는 그랬는데"라는 말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과거에 이름 있던 예술가들이 자신의 아내와 여성 모델에게 했던 쓰레기 같은 짓들을 보고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그랬지'라고. 나는 그 사람들을 통틀어 그옛날 사랑했던 개새끼들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랑한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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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그랬던" 것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같잖은 경우가 왕왕 있다. 성별론이 앞에 붙으면 더욱 그렇다. 어쩌면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인류가 절멸의 꼴을 밟는지도 모르겠다. 전쟁통에도 애를 낳고 문맹의 부모들이 아들자식 대학 보내 호강할 생각을 하는 것이 더 이상 희망사항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들 따지는 출산율 그래프가 개차반이 났다면 나 같은 인간도 애 낳고 싶은 기분이 펑펑 솟아나게 궁리라도 해보던가. '가임기 여성' 따위로 뉴스를 내놓으면 살아있는 가임기 여성은 팔뚝에 반영구 피임 바늘을 심어버리고 싶잖아. ​​


이 주제가 다소 부차적으로 등장했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에 대한 몇 마디 적으려다 보니 또 이렇게 길어졌다. 나는 갓 태어난 인간에 대해, 자라나고 어른이 되는 과정에 대해 두려움과 불확실성은 있을지언정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그것은 분명 여성의 몸을 타고나서 경험해보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아쉬운 부분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 없이도 충만하고 행복하고 싶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몸이 늘어났다 찢어지고 수각이 하나 더 생긴 만큼의 번거로움을 감내할 만큼의 타 생물에 대한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한참 어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섣부르지만 나의 가변성을 전제로 두고도 지금 하는 생각을 기록해둬야겠다. 변화하고 역동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하루마다 경험과 사고를 축적하는 나의 뇌가 결정할 일이다. 나는 누구의 첨언도 충고도 받지 않는다. 내가 내린 판단의 책임은 내가 지게 될 것이며, 나의 결정으로 구체적인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스스로의 말 외에는 듣지 않으면서, 내가 납득할만한 조언만 받아들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무수히 많은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에는 그랬는데"라는 말은 대부분 나에게 "너나 그렇게 사시던가"라는 대답을 불렀다. 타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과거는 궁금하지 않다. 나도 나의 과거가 있고, 그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스스로 꽤 마음에 드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든다.

앞으로도 나에게 그럭저럭 멋져 보일 모양새로 살아갈 예정이다. 아주 행복하고 충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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