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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ug 22. 2021

아빠가 보고 싶다

마음의 준비 같은 건 세상에 없으니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알베르 카뮈, <이방인> 중




*


참 흉한 문구다. 괜히 부모님 생각 한번 더 나게 하는 그런 문장.


싱가포르에서 귀국한 지 얼추 세 달째, 나는 아직도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동생은 친할머니의 삶을 책으로 내겠다며 매주마다 시골집을 드나들고 있는데, 자가격리가 풀리고 곧장 출근해버린 나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두 달이다. 싱가포르에서 못 본 것도 합치면 얼추 반년이 넘는다. 아무리 가뭄에 콩 나듯이 얼굴을 봤던 아빠라지만, 이 정도쯤 되니 정말 보고 싶다. 아주 많이 보고 싶다.


자가격리가 끝나고 일주일 정도의 말미가 있었는데, 일단 이틀 정도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배에 기름칠을 하며 푹 쉬었다. 나흘째엔 친구를 한 명 만났던가. 일하게 될 가게를 찾아가서 대표님과 인사도 나눴다. 일주일, 서울 바닥만 돌아다녔는데도 할 일이 많았다.



아래는 얼마 전 동생과 아빠의 짧은 통화를 적은 내용이다.


"아빠. 저 이번 주에도 할머니 인터뷰하러 내려가요."


"너 말고, 큰 걸로 보내."


"언니요?"


"어."


"언니는 안 가요. 주말에 못 쉬어요."


"그럼 내가 갈 테니까 기다려."


"언니 보러요?"


"걔는 배달이 안된다잖아."




배달 안 되는 큰딸 보러 올라오시겠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벌써 이 주째. 허리가 아프시단다. 세상에 돈 좀 벌자고 이런 불효가 또 어디 있나 싶다. 서비스직 종사자는 눈물이 죽죽 난다. 주말에만 쉬는 아빠와 평일에만 쉬는 딸은 산간지역 추가 비용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비통함이 있다. 그래서 아빠, 언제 오신다고요?


고작 오 개월이라도 해외에 있다 온 게 마음이 쓰였는지, 요즘 엄마는 나를 보았다 하면 고기부터 먹이려 든다.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자꾸 어려진다. 나보다 더 소녀 같고, 나보다 더 웃음이 많다. 눈꼬리에 매달린 사랑스러움. 아빠랑 반대로 엄마는 나한테 배달이 되는 사람이다. 엄마, 보고 싶어. 하면 어느 순간 주방에 서서 건더기가 듬뿍 담긴 된장찌개를 끓여주고 있다. 한번 왔다 가면 햇반이며 탄산수며 선반이 그득이다. 이럴 때마다 내가 응석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럭저럭 예쁜 엄마와 아빠를 가지고 있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 칠월에 사랑해 마지않던 친할아버지를 보내고 인생 첫 장례를 치렀다. 그것은 너무 버겁고 거북스러운 일이었다. 장례라는 절차가, 의식이, 그와 관련된 그 모든 것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할아버지는 어느샌가 찾아뵐 때마다 끌려오는 마른 어깨가 불안해 보일 만큼 약해져 있었다. 내가 너무 사랑했던 분이라서 세월에도 신선처럼 늙으시는구나 생각만 했다. 할아버지가 언제든 그 방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그 이불 위엔 햇살만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로 외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곡을 하고 장손이 밤새 식장을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하얀 머리핀도, 육개장도 필요 없으니 할아버지가 내 옆에 있기를 바랐다. 거동도 못하고 어린아이의 마음일지라도 육 개월에 한 번씩  간신히 찾아갔던 못난 큰손녀가 안아드릴 수 있는 곳에 마치 부적처럼, 생신처럼 살아계시기를 바랐다. 어릴 때 목마를 태워주던 혈색 좋은 뺨과 하염없는 다정함이 아니어도 좋았다. 하다못해 몸의 작은 부분이라도 이 세상에 남겨 둔다면 내가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갑작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멍청함에 배신감이 들었다. 필멸이란, 인간의 수명이란, 죽음이란 책에서 읽거나 주변의 이야기를 건너 듣는 것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비극이었다. 시공간이 휘청 흔들리고 내장도 뒤틀리는 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비극.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사건이 해결되기를 바랄 수도 없이 주저앉아 무너지는 하늘을 어깨로 받아내야 하는 고통. 삼일 밤이 샐 때마다 아빠의 눈가는 빨개지고 뒷모습은 쪼그라들었다. 보이지 않은 장례식장의 무언가에게 생기를 빨아 먹히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사랑하던 할아버지가 지구 위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갑자기 사방 천지가 진창으로 변해버리다니. 입관을 할 때까지도 기적처럼 손마디를 움직여주시기를,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려주시기를 입술을 깨물면서 기도했다. 장례식이 없는 세상, 할아버지가 영원히 살아있는 세상. 나만 안온하고 평탄할 세상. 내가 보기 싫은 고통을 남들이 보아줄 세상. 그때 나는 그런 세상을 간절히 원했다. 내 앞에 미래가 꼴 보기 싫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내가 깨닫고 만 것은 남은 시간 내가 울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아빠는 죽으면 안 된다. 엄마도 죽어선 안된다. 동생도 죽어버려선 절대로 안된다. 큰일이 난 거다. 남은 인생 나는 이 사람들 때문에 울다가 죽을 수도 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죽을 수 있다면!


그렇다. 나는 지금도 내가 보기 싫은 고통을 남들이 보아줄 세상을 원하고 있다. 아빠의 영정을 들고 관 짝 행렬의 맨 앞에 서느니 부랴부랴 맨땅에 고꾸라져 아빠와 내 자리를 바꾸고 싶다. 나는 아빠의 죽음 앞에 서는 것보다 내 죽음에 아빠를 세우고 싶은 못난 딸이다. 결단코 죽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나. 모두 언젠가 죽는 인간이고 죽어야만 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죽음보다는 차라리 내 차례가 한 발짝 앞이었으면 좋겠다.


장마가 하늘을 덮은 까맣고 긴 긴 밤에, 무심코 넘어가다 본 카뮈의 문장에서 나는 불효를 쓴다.

엄마는 죽어선 안된다. 그 어떤 날에도 죽어서는 안 되고, 언젠가 나는 죽을 만큼 울게 될 것이다. 작가가 쓴 건조함과 담백함 따위는 한 톨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무너지는 하늘에 속절없이 눌린 채로 땅 속 깊은 곳까지 꺼져버리고 말 것이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로 인해 내가 슬프지 않고, 당신들 없는 곳에 혼자 남자 않았으면 좋겠다. 찬장에 햇반과 소다수가 80년 동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서툰 메신저 답장과 영상통화가 근력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걸려오면 좋겠다. 누가 죽이고 간 것도 아닌데 괜히 아끼던걸 빼앗긴 것 같은 기분, 스스로가 굉장히 무력하게 느껴지고 유쾌하지 않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 아마 남은 80년 정도 보고 싶을 테고, 그중에 얼마 정도는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을 만큼 신화적으로 슬퍼하느라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카뮈의 어머니는 정말 어제 죽었을까.


아니면 오늘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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