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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27. 2021

그래서 그렇게 아파하는구나

조지 오웰 <1984>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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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1984>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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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신의 신경조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제1부 본문 91 페이지 중



자기 전 눈을 감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밤이 있다. 보통 그럴 때는 떠올리기 즐거운 일 보다도 불유쾌하거나 후회가 막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모로 누운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린다. 이쯤이면 잊을 때도 됐는데. 내가 부족했던 것, 미욱했던 것 전부 받아들였으니 이런 밤의 귀퉁이에서 나갈 때도 됐는데 찾아오는 기억들은 어김이 없다. 통제를 듣지 않는 옛날의 내 모습에 화가 난다. 뇌의 말을 들어 먹지도 않고 죽어라 무의식에 붙어살고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늘 내 안에 있구나. 세상 어떤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봐도 나는 나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또 없다. 아닌 척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한 밤중에 공격하는 신경조직. 숙주의 정신 상태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난 일들을 상기시키는 신경조직. 역시 무서운 것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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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다음에 100이란 숫자가 오듯, 공포 다음에는 예정된 죽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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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본문 198 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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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숫자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상상한다. 지구 위의 모든 것들을 줄자 위에 올려놓고 수치로 값을 매기는 거다. 키, 내장 길이, 수명, 가치, 잠재력. 태고적부터 존재해온 식물의 옆에서, 긴긴 역사를 가진 건축물 옆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유성우 옆에서 인간의 수치는 얼마나 될까. 1 다음엔 2 가오고 99 다음엔 100이 온다. 인간의 마침표는 죽음이다. 참 조그맣고 읽히기 쉬운 생물이다.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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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행위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중을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게 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을 박살 내거나 하늘로 날려버리거나 바닷속 깊이 빠뜨리는 것이 전쟁이다.​​​


제2부 본문 268 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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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목마른 계절> 중 이런 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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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과 파괴가 따르지 않는 전쟁이 어디 있으랴. 전쟁의 명분을 얼굴로 치면, 살육과 파괴는 내장이다. 내장은 누구나 갖고 있으면서 그 노출에 혐오를 느끼는 게 누구나의 생리다. 아름다운 얼굴에 아름다운 내장이 따를 리도 없다. 결국 문제는 내장이 아니라 초면에, 얼굴도 내밀기 전에 내장부터 내보이는 그 무신경과 잔혹성이다.​​​


6월의 전쟁을 묘사한 부분이다. ‘전쟁’이라는 단어 안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가 함축된 나머지 조금만 언급해도 멀미가 나고 입이 쓰다. 인간이 아니면 일으킬 일 없는 전쟁, 인간이 희생되고 인간이 이득을 얻는 전쟁, 역사를 굽이쳐서 되풀이되는 전쟁.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나 싶다. 이제는 내장을 먼저 까 보이지 않아도 버튼 하나면 해결되는 그런 세상일까.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왜 아등바등 목숨을 부여잡고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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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사고’란 말을 사용할 때도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 이 말을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다시 ‘이중사고’를 하면 바로 인정한 것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무한한 거짓말이 진실보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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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본문 298 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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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머리 좋은 사람들의 특권이다. 능청스럽고 스케일이 클수록 교묘하고 완벽한 거짓 세계가 만들어진다. 우리의 일상은 커다란 우주의 누군가가 꾸는 꿈이라는 말이 있다. 한 국가만 한 거짓말을 꾸려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잘 다듬어 거짓에 거짓을 덮은 진실을 만들면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도 헷갈리지 않을까. 살아있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스스로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들 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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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사고’를 창출해 낸 사람들이 ‘이중사고’를 가장 교묘하게 행하고, ‘이중사고’가 엄청난 정신적 기만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임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른다.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착각을 많이 하고,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이 덜 건전하다.​​​


제2부 본문 299 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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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정신은 통계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그는 말속에 심오한 진리라도 숨어 있는 듯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잠들었다.​​​


제2부 본문 302 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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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역시 숫자다. 뉴스와 신문에서 쉼 없이 보이는 퍼센티지와 그래프들 앞에서 살아있는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그 화면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뭉개져 있는가. 대중매체는 위험하다. 사람이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고 집단이나 색깔로 뭉뚱그린다. 그 안에 생명력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숫자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아나운서나 리포터 조차도 온도가 없다. 어떤 기사를 담고 있던 종이 쓰레기처럼 구겨져 버려진다. 숫자의 가치란 그런 것이다. 휴대되고 소비되는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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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고통 앞에서는 영웅도 없다. 절대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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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본문 334 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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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잘 참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잘 참는 거다. 속된 말로 깡이 좀 있는 편이다. 어릴 때 가정에서 체벌이 심했는데 그때 되려 버릇이 나쁘게 들었다. 폭력에는 절대로 굽히고 들어가지 않는다. 적법한 일에는 폭력이 끼어들 틈이 없고,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에게 육체적 고통은 불필요하다. 납득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주입시키려 할 때에야 완력이 나온다. 세상 모든 주먹다짐은 크고 작은 고문인 것이다. 쌍방이든 일방이든 무식하고 우매한 자가 주장하는 자기표현, 폭력. 조금만 아파도 엉엉 울며 구석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맞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때리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의 반성하는 척을 했더라면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폭력 앞에 선 사람을 고민하게 하는 것은 비굴에 대한 타협이다. 그만큼 참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해서 나는 계속 참았다. 보아하니 윈스턴은 맞아 본 일이 없는 모양이다. 여동생의 과자를 뺏어 들고뛰는 윈스턴, 자길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윈스턴은 있어도 누구에게 구타를 당하는 윈스턴의 모습은 없다.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아무에게도 맞아 본 일이 없구나. 그래서 그렇게 아파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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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인간은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미칠 지경에 이를 정도로 고통을 가하고 나중에는 틀림없이 사형장으로 보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둘은 어떤 의미에서 친구보다 더 깊은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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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본문 352 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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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이해가 같은 집에 살면 꽃밭일 것이다. 이해가 한 방만 차지해도 원만한 관계가 된다. 나의 전 애인은 나에 대한 사랑이 온 방을 넘쳐 마당까지 넘실대는 사람이었다. 그 사랑에 감격해 결혼도 생각하고 아이도 생각할 만큼 무시무시한 애정이었다. 한데 3년을 만나도 곧 생길 거라 믿었던 공감과 이해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요만큼의 이해도 없이 어떻게 나를 사랑했나 의아할 정도로. 그런 사람과의 6개월은 지극히 행복했고, 1년이 지나갈 때 즈음엔 슬금슬금 의구심이 들었고, 2년째 되어서야 이 사람과는 이루어질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단 한 조각도 숨김없이 다 얘기했다. 당신이 좋고,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우리는 절대 결혼할 수 없으며 언젠가 끝이 보이는 연애를 하고 있노라고. 돌려서 말한 이별 통보였다. 유예가 있는 연애라니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이렇게 벽을 세운 나를 두고 1년을 더 따라다녔다. 지극 정성으로,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모두 나를 두고 돌았다. 애정 결핍인가, 분리 불안이 있나 싶을 정도의 헌신. 그런 사람과도 헤어진다. ‘이해’란 그런 종류의 것인가 보다. 동성이냐, 이성이냐. 연상이냐, 연하냐. 집안과 사정을 가릴 것도 없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너를 납득할 수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끊임없이 나와 결혼식을 이야기하고 아이 셋 낳기를 바랐던 그 사람, 언젠가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그의 인생에 나타났으면 좋겠다. 뒤집어서 털어봐도 나는 아니었던 피앙세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그의 앞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만큼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다 있었어도 딱하나 ‘이해’가 없었던, 돈도 있고 직업도 있고 꿈도 있고 로맨스도 있었던 7살 연상의 그 사람. 사랑과 이해가 한 지붕에 살면 결혼의 다른 이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 정정한다. ‘성공한 결혼’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도 이해도 없이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을 결혼생활을 유지한 우리 엄마 아빠와 같은 사람들도 있으니. 결혼이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 반면 ‘사랑’과 ‘이해’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친구보다 더 깊은 나의 적, 연인이었지만 단 하나도 서로를 이해해 본 적 없는 나의 아벨. 나는 지금 행복하고 당신에게 못 받은 이해를 모든 사람에게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해란 그런 것이다. 종종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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