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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킹 배드〉, 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_1

절망과 자기 욕망이 야기한 윤리적 균열

by 김굳이

!주의!
본 글은 《브레이킹 배드》뿐 아니라 본 시리즈와 스핀오프 시리즈가 구성하는 "앨버커키 유니버스" 세계관 모두를 다룹니다. 따라서《브레이킹 배드》,《베터 콜 사울》및 《엘 카미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삶에는 일정량의 고통이 배정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대부분은 그것을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큰소리로 말하진 않는다. 살아가야 하니까.


월터 화이트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실패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자기 고통을 체념과 의무로 봉합하며 살아가던 인물이다. 그렇게 고통은 조용히 쌓인다. 그 침묵의 지층은 어느 날 급작스럽게 무너진다.

Image: Breaking Bad. © AMC / Sony Pictures Television.

〈브레이킹 배드〉의 시작은 그런 무너짐의 순간에서 출발한다. 교사 월터 화이트는 폐암 진단을 받고,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는 ‘고통을 나누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약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지막 본능 사이에서 그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선택이 첫 번째 윤리적 균열이 된다. 고통은 혼자 견딜 수 있지만, 진실을 숨기는 순간부터 삶은 고립된 해석 속에서만 작동하게 된다. 월터는 타인과 함께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해석을 정당화해야만 하는 구조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Image: Breaking Bad. © AMC / Sony Pictures Television.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 실패한 남성성의 고백 없는 침전


월터는 뛰어난 화학자였고, 그레이 매터라는 연구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회사를 떠났고, 지금은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경력의 낙차는 그 자체로 드라마적인 장치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낙차를 ‘말하지 못한 채’ 삼키는 월터의 태도다.


그는 아무에게도 ‘나는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스카일러에게도, 월터 주니어에게도, 심지어 제시에게조차. 그는 계속해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사람’으로 보이려 애쓴다. 이때부터 월터는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기 시작하고, 동시에 타인의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형으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진단을 받고도 병원비 걱정을 혼자 감당한다. 병원에서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눈앞에서 치료 옵션이 사라지자, 그는 “무력함”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진하게 맞이한다. 그 장면에서의 월터는, 그간 자신이 감정이라는 것을 꾹 눌러왔다는 사실을 시청자에게 드러낸다. 그는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단지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이제는 바깥으로 나가야겠다’는 판단을 할 뿐이다.




“나는 존재하고 싶다” — 코나투스와 자기 보존의 본능


스피노자는 말했다.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을 갖는다.” 이를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단지 생물학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유지하면서 존재하고자 하는 본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월터는 이 존엄의 붕괴를 직감한다. 그는 암으로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날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것이 법과 윤리를 어기더라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악은 종종 생존의 문제와 뒤섞여 태어난다는 점이다. 명백한 악의 충동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판단이 첫 번째 탈선을 가능하게 만든다.



Image: Breaking Bad. © AMC / Sony Pictures Television.

규범 바깥의 첫 발 — 제시 핑크맨과의 재회

월터는 우연히 마약 단속 현장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옛 제자였던 제시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를 찾아간다. 그 유명한 대사:

“You know the business. I know the chemistry.”


그는 이 문장 하나로 동업을 제안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파트너십 선언이 아니다. 이것은 ‘나는 내 질서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선언이다.


월터는 이제 공적 규칙도, 교육자로서의 윤리도 내려놓는다. 단지 자신이 가진 능력을 ‘현금화’하기 위해 움직인다. 사회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자기 가치에 대해, 월터는 ‘자기만의 해답’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는 아직 악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그저 합법적 체계가 보장해주지 못한 자기 존엄을 비합법적 방식으로 복구하려는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의 윤리적 구심점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Image: Breaking Bad. © AMC / Sony Pictures Television.

“그는 아직 악하지 않다” — 선과 악의 기울기


이 단계의 월터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시스템의 바깥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은 “그 다음은 더 쉽게 내디딜 수 있다”는 착시를 만들어낸다.


악은 커다란 분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냉정한 판단, 때로는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가장 도덕적인 동기에서 출발한다. 월터의 첫 발은 누구도 해치지 않으며, 심지어 공감 가능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이 지점에서 칸트의 말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도덕은 동기가 아니라 행위의 형식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즉, ‘선한 마음’으로 한 행동도, 그것이 보편화되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월터는 선한 동기로 금기를 깼고, 그 행위의 형식은 이후 그를 계속해서 같은 선택으로 유도한다.


Image: Breaking Bad. © AMC / Sony Pictures Television.

“모든 것은 정당하다”는 함정 — 가족이라는 명분


그는 스카일러에게 진실을 숨기고, 제시에게는 일방적으로 제안하며, 아들에겐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항상 말한다.

“이건 다 가족을 위해서야.”


가족이라는 명분은 강력하다. 그것은 모든 위반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된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가족 구성원들의 의견, 감정, 판단은 빠져 있다. 가족은 월터가 보호하고 책임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이야기의 끝’으로 기능한다.


이 단계에서 월터는 이미 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상태로 진입한다. 그는 아직 악하지 않지만, 윤리적으로 단절된 시야를 가지고 있는 상태다.


시청자의 공감이 월터를 미끄러뜨린다


〈브레이킹 배드〉의 진짜 묘미는 여기에 있다. 시청자는 월터의 선택을 처음엔 공감하고, 그다음엔 응원하고, 결국엔 묵인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암 말기인데 뭐라도 해야지.” “가족을 위해서잖아.”

하지만 이 공감은 곧 도덕적 민감도의 이완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월터를 이해하면서, 월터의 규칙 위반을 우리도 함께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선택이 더 나빠졌을 때, 우리는 이미 그를 놓아줄 수 없게 된다.


그건 단순한 몰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악의 탄생이 단지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서사를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의 감각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라는 뜻이다. 작가가 이 드라마를 통해 의도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Image: Breaking Bad. © AMC / Sony Pictures Television.

윤리는 선택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에서 무너진다


월터의 첫 범죄는 폭력도, 살인도 아니다. 그는 단지 ‘화학 반응’을 일으켜 돈을 벌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방향이 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구성하려는 욕망이 담겨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덕이란 습관이다.” 악도 마찬가지다. 악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디딘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월터는 아직 악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윤리의 중력을 벗어나기 시작한 상태다. 이 상태는 도덕이 말하지 않는 영역, **‘왜 안 되냐고 묻기 시작하는 단계’**다. 그리고 이 단계는 언제나 다음을 낳는다.


마치며: 첫 번째 금을 넘는 순간

월터 화이트의 1단계는 “왜?”라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왜 그는 병을 숨겼을까. 왜 그는 합법적 방법을 포기했을까. 왜 그는 제시를 찾았을까. 왜 그는 한 번도 ‘이게 잘못된 게 아닐까’라고 자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로 돌릴 수 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규칙 바깥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악은 때로 극단적인 증오나 폭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은 극도로 현실적이고 절박한 이유에서 시작되곤 한다. 그 시작에는 분명 ‘이해할 수 있는 사정’이 있다. 그러나 그 사정을 넘어서 행동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 선택은 누구의 존재를 침묵시키는가?” “그 결정은 어떤 윤리적 기반을 무너뜨리는가?”


월터는 자기 보존을 위해 침묵했고, 그 침묵 위에 해석을 올렸으며, 그 해석 끝에 ‘탈선’이라는 새 길을 선택했다. 이 모든 과정은 충분히 공감 가능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우리는 그를 이해함으로써, 그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악은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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