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두는 조직개편

by 오서리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 어떠세요?



찌이이~~잉, 찌이이~~~잉~

12월이 오긴 왔나 보다. 뜬금없는 시간에 울리는 카톡을 보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을 알려 댔다.


며칠 전 신문, 뉴스에 대기업 사장단과 임원들 발표가 났으니, 다음 주면 팀장, 그룹장 등을 시작으로 조직개편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조직을 떠난 지 3년이 넘었건만, 이맘때쯤 되면 조직 내에서 ‘언니, 동생’의 호형호제까지는 아니었어도 나름 인간적으로 친분 있게 지내던 후배들의 SOS 문자들이 도착한다.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 어떠세요?”

“큰일 났습니다. 다음 주면 조직개편인데 이번에 그룹장이 000이 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쩌면 좋죠?”

등등.


글의 내용과 어투는 조금씩 달라도 결론은 나에게 조언을 듣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대기업을 떠난 지 오래되어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대표이사도 두 번이나 바뀌고 부서원들이 한차례도 아니고 세네 차례나 바뀌어 이제는 아는 얼굴도 별로 없는데, 나에게서 어떤 고견을 듣고 싶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분명 그들은 박스 안에 머물러 있는 자신들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밖에 있는 나에게 과거와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예견과 행동지침을 듣고 싶었으리라.


당시에는 ‘조언을 가장한 명령’이라며 부서원들은 부서장과의 면담을 가급적 회피했다. 그러나 지금은 처신 방법을 알려 달라며 다시금 명령을 요청한다.




조직을 재개편할 때, 조직의 수장들이나 인사팀에서는 많은 고민 끝에 개편 계획을 세운다.

직원들을 자르고, 올리고, 내리고, 바꾸고, 뒤집고, 섞어서 인력들을 이리저리 만두 빚듯 재배치하여 자를 사람들은 금요일 오후에 통보해서 바로 짐을 싸게 하고, 주말 동안 버퍼(충격 완화) 기간을 가진 후, 올릴 사람은 월요일 아침에 호외 뉴스처럼 발표한다.


조직 개편은 기업 인사(人事) 팀의 다년간 경험, 개개인의 평가점수, 인성 점수, 조직의 기여도, 동료들과의 인터뷰, 수많은 데이터베이스를 근거로 결정하지만 그들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는 말이 있다.

심사숙고가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조직개편을 할 때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악수가 악수인 줄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 차라리 그 악수를 두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쪽인지를 생각해보면 좀 더 지혜롭게 조직개편의 숨은 뜻을 알아내고 대처할 수 있다. 문제는 악수가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최악은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맹점이다.


세계경제포럼의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적응하거나 죽거나(Die or adapt)”라며 ‘적응력이 생존력’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적응하며 살아내기 위해 이빨이 부서져라 이를 앙다문 상태로 버티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지금 있는 조직에서 Die 했다고(죽었다고) 영원한 루저(패배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조직에서 다시 살아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회는 분명 존재한다.




회사 후배들의 문자와 만남이 있고 난 뒤, 그리곤 또 잠잠하다가 12월 말이나 다음 해 1월이 되면 어김없이 또 다른 카톡들이 도착한다. 메시지에는 힘과 활력이 넘치고 자신만만함과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리더 느낌의 단어들이 가득하다. 바로 12월 조직개편으로 새로 임명된, 후배 그룹장들이다. 반대편에 서 있는 후배들이 이미 나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하면 좋겠냐는 조언을 구한 지 딱 보름 후면 반대 진영의 후배들이 나에게 문자를 보낸다.


“올해 가기 전에 꼭 밥 먹어요. 제가 맛있는 거 대접하겠습니다.”

“예전에 그룹장님이 하셨던 말씀이 요즘 많이 생각나서 연락드렸습니다. 잘 지내시죠?”

와 같은 문자이다.


청군과 백군의 서로 다른 진영에 있는 후배들이 시간 차이를 두고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희로애락과 길흉화복은 언제나 돌고 돈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또 5~6개월이 지나 2분기 때쯤 되면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신입 그룹장들에게서

“사람 관계가 너무 힘들어요. 저랑 면담 한번 해주세요. 커피 한잔 어떠세요?”

와 같은 문자가 올 것이다.


사람 사는 인생사, 영원한 영원함은 없다.

지금이 최고의 정점이라 생각하지만, 곧 모래성 같은 허물어짐을 알 수 있다. 지금이 인생 밑바닥이라 생각하지만, 진짜 최악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클라우스 슈밥 회장의 말처럼 적응하며 버티거나 아니면 다른 수렁을 찾아 떠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