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UX 디자이너가 비지빌리티를 배운 시간
작년 나에게 제일 임팩트 있던 사건은 승진이었다.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과정을 되돌아보며, 이 기록은 ‘승진했다’는 이야기라기보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프로덕트 UX 디자이너다. 작년 기준 6년 차, 웹 디자인 경력까지 포함하면 9년 차였다. 약간의 직무 전환으로 출발선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열심히 일해왔다고 믿었지만, 타이틀은 여전히 주니어였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이 길을 올바르게 걷고 있다는 확신을 객관적으로 얻기 위해서라도 승진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싶었다. 아니, 통과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의 일터에선 '연차를 쌓고' '열심히 일만 하면' 승진이 보장되는 곳은 아니었다. 마치 아이돌 연습생이 한정된 멤버의 데뷔를 위해 몇 년을 연습하고, 끊임없는 피드백을 받고, 오디션을 보고, 불확실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제한된 티오, 상대 평가, 불투명한 기준. 마치 서바이벌에 가까운 구조였다.
살아오면서 '성적표'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고, 내 삶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배움의 즐거움과 노력의 결과에 익숙한 편이었다. 수, 우로 채운 성적표와 상장으로 파일을 두툼하게 채웠었다. 내 기억 속의 나는 숙제를 하면 보여달라고 부탁받는, 시험칠 땐 뒷자리 친구가 컨닝을 부탁하는 학생이었다. 성적표, 수능, 토익, 학점 어느 것 하나 내 기준에선 허투루한게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떠벌리진 않았지만 이게 내 삶의 자존감의 토대였다. '열심히 하면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일 또한 마찬가지로 임했다. 매사에 주어진 일은 열심히, 누가 되지 않게,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의지로 해내는 쪽이었다. 그런데 현 직장의 첫 평가에서 개인적으로 전례 없는 성적을 받았다. 말 그대로 F학점이었다. 아직도 그 장면이 선명하다.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동안 어디 가서 말도 못 했다. 웃고 있는 동료들 사이에서 나 또한 웃고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자존감의 토대에 금이 가는 느낌을 오랫동안 지우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 나는 어느 때보다 일에 몰입해 있었다(지금도 변치 않는 판단이다). 환경적인 문제도 분명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회사가 바라는 성과 '전달' 구조를 몰랐고, 그래서 평가 언어로 남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후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미션은 ‘비지빌리티(일명 나대기)’였다. UX 디자이너로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넘어, 내 생각과 판단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 묵묵히 일하는 성향의 나에겐 성향을 뛰어넘어야 하는 불편한 과제였다.
'간판 없는 맛집 같다'는 피드백을 여러 번 들었다. 맛은 있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뜻.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 또한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한때는 이런 성향의 내가 싫었고, 미팅에서 말을 잘하고 자신 있게 드러내는 동료들이 부러웠다. 여러 고민들이 있었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다고 판단했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에서 만큼은 나의 성과를 표현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가 만든 음식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4년이 지나 승진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성과, 그리고 부족한 비지빌리티. 이유를 알면서도 마음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모든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리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매일매일이, 매일의 미팅 하나하나가, 평가받는다고 생각하니 압박감이 엄청났다. 어떤 날은 잘해보자고 다짐하다가도 어떤 날은 압박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못하겠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 시기에는 모든 게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이 지옥이라 지옥의 필터를 씌우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방식이 있고, 승진을 원한다면 그 룰에 맞추면 된다.
원하는 게 있다면 괴로운 법이다. 그때의 나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나의 수고는 나만 알면 된다'는 진의 말을 좋아했는데, 적어도 이 시기엔 그 말이 유효할 수 없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내가 집중했던 영역은 비지빌리티, 그중에서도 ‘영어로’ 의견을 말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성과 결과는 공들인 정도에 상관없이 잘 될 수도, 잘 안될 수도 있는 운의 영역이 섞여 있지만, 비지빌리티는 불편하고 어려워도 나의 힘으로 개선해 볼 순 있는 영역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챌린지는 '영어로'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미팅에서 청자는 외국인이다. 청자에 맞는 비지빌리티를 올려야 한다. 아무리 토익 850을 맞아도 말로 안 나오면 '어필'이 안 되고, 이 사람이 어떤 관점으로 프로덕트를 바라보는지 모른다.
문법이 틀리더라도 무조건 1-2 문장은 내 의견을 강하게 말한다. 내가 강하게 말한다는 인상을 주려면 남들보다 3배는 강하게 말해야 한다.
끝까지 완벽한 논리의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 이 시기에 필요했던 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현하는 것' 이거였을 뿐이다. 나는 완벽한 논리가 있을 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나를 더욱 주춤하게만 만들었다.
회의는 빠르게 흘러간다. 그동안의 영어 미팅들을 되돌아보며, 나의 눈높이에 맞는 맞춤형 전략이 필요했다.
1) 한 토막씩 저장하고 내뱉기
이상: 챗지피티와 완벽한 프레젠테이션 스크립트를 써간다. 나의 차례가 되면 외운 스크립트를 말한다. 모두가 시간을 들여 귀 기울여 준다.
현실: I think that problem is ~, rootcause is~, so my solutio... 문제는 이거고, 루트커스는 이거고, 그래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 (청자는 이미 시각적 자료를 보고 빠르게 파악한 후 질문을 던진다.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 "(돌발질문)이 케이스에선 어떻게 할 건가요?" → 머릿속 하얘짐. 나의 스크립트엔 없던 건데... 결국 또다시 입꾹닫 결말.
개선: 돌발질문에 대응하기 위해선, 당연한 말이지만 내 작업물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걸 영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표현하는 게 관건이었다. 평소에 영어 노출을 해놓고 그 상황이 되면 떠오르게끔 한다. 문장이 아니라, 어구 한 토막 정도로 머릿속에 입력해 둔다. 문장으로 외우려고 하면 부담감 때문에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출근길 팟캐스트, 영어 수업과 스터디에서 짧은 어구들 'on top of that, I thought that, that indicates, what you said...' 이런 표현을 유심히 보거나 듣고 머릿속에 조각조각 저장만 해둔다.
회의에서 질문이 들어오면, 한마디 운을 띄우고, 그다음 한마디를 할 땐 저장 창고에 있는 어떤 표현들을 꺼내서 다음 말로 이어지게 하려고 했다.
2)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상: 화자의 모든 문장을 머릿속에서 번역하고 완벽하고 안전한 문장만 말하기
현실: 모든 걸 이해하려 하면 나 같은 사람은 타이밍을 못 잡고 한마디도 못하고 나온다.
(각색한 예시 대화이다. 논리에 맞지 않을 수 있다)
A: We need to improve the purchase conversion rate. Why do we have to go through the confirmation process? Let them experience it without worrying about it from beginning to end and make the final decision before the last purchase. 우리는 구매전환율을 개선해야 한다. 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나? 사람들에게 생각하지 않게 해라.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하지 않게 경험하게 하고, 마지막 구매 전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의 머릿속: 동시 번역으로 바쁨. (우리는 사용자를 생각하지 않게 해야 한다.. 구매 전에 최종 결정... 잠깐, 구매 전에 최종 결정은 최선의 선택인가?)
B: Why do we need to let you know right before we buy? You should be able to browse and show it at the front. If not, you'll be offended. 우리가 왜 구매 직전에 알려줘야 하나? 브라우징을 통해서 충분히 앞단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불쾌감을 느낄 거다.
나의 머릿속: 타이밍을 놓치고 입이 떨어지지 않음 (앞단에서 보여줘야 한다... 맞는 말이지. 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
A: It's also a connected point of how to drive more business. We need to consider this... 이건 비즈니스적으로 어떻게 더 드라이브할 수 있는가도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다. 우린 이걸 고려해야 한다...
나의 머릿속: 길어질수록 번역을 놓치고 약간의 후회를 하기 시작 (내가 말하지 않아도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구나.. 언제 말하지?)
개선: 완벽한 듣기, 번역보다는 맥락과 키워드를 흡수하고, 안건에 대한 나의 관점을 문법이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 1-2 문장만 얘기한다. 나만의 이 룰을 꼭 지키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룰을 만드니 말을 완벽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조금 벗어나 심적으로 가벼워져서, 한마디 한 마디씩 뱉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덕분에 회의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문법이 맞는지를 최우선으로 신경 쓰진 않았다. '여기에 내 생각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기세와 태도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A: 우리는 구매전환율을 개선해야 한다. 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나? 사람들에게 생각하지 않게 해라.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하지 않게 경험하게 하고, 마지막 구매 전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의 머릿속: 구매전환율, 확인절차, 생각하지 않게, 구매 전에 최종 결정. (키워드만 파악. 지금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객들이 미리 알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불쾌감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또 하나 바꾼 것은 관계였다.
의사결정자에게 적어도 나의 승진 의지를 보여주는 게 필요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만 하는 사람보다 의지를 내비치면서 일하는 사람에게 '고려 대상'에라도,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며, 저 사람의 성과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볼 여지가 생길 것이다.
나는 수년간 전자에 해당했기에, 그 누구도 나의 승진 의지를 몰랐다. 미국식 문화라고 한다면 더욱 당연한 것이다. 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조용하더라도 일만 잘하면 언젠가 누군가는 나의 성과를 알아보고 승진을 고려해 주겠지'
이런 소극적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승진 의지가 있어요. 내가 그동안 해왔던 성과들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누군가에겐 당연하고 쉬운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보진 않았다. 원하는 게 있다면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한 정치는 마냥 친목을 쌓는 게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간 이에게 나도 그 길을 가려한다고 알리고, 좌표나 이정표 도움을 구하고 신뢰를 쌓는 것'에 가까웠다.
정말 고맙게도, 내가 문을 두드렸을 때 열어주고 길을 밝혀준 상사 분들이 있었다. 길고 불확실했던 여정을 지켜봐 주고 서포트해 준 분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한다.
승진 소식은 여행 중에 들었다. 오래 기다려왔던 순간인 만큼 기뻤지만, 마냥 홀가분하지만은 않았다. 누군가의 기다림 위에 서 있는 건 아닐지, 이로 인해 생길 파장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됐다.
나의 고생을 알아주고 공감해 준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나누고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다. 한동안은 공허하고 여전히 괴로운 마음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때까지의 나는 외부의 평가나 칭찬에 의해 나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이 과정을 지나며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 타인의 평가와 성적에 내 가치를 맡기면, 결과와 상관없이 마음이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승진은 나의 모든 것을 증명해주지 않았다. 대신,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한 번은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상사의 칭찬에 '나는 당신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기쁘다'라고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칭찬으로 너 자신을 평가하지 말라, 너 자신 스스로 믿어라‘
괴로움에 눈물을 흘릴 때 한 상사의 조용한 위로의 한마디도 생각난다.
’넌 약하지 않다‘ 승진 준비로 하루하루 흔들릴 때마다 마음속 한구석에서 되뇌었던 문장이다.
단순히 ’승진했다‘로 끝나지 않고, 이 길고 어려웠던 시기를 지나온 나에게 그저 무의미하기만 했던 시기는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나의 방어기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험한 일이 와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이 글을 승진 준비할 때부터 꽤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세상에 보이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단지 승진 성공담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슷한 시간을 견디고 있거나 이미 견뎌왔던 누군가에게, ‘너는 약하지 않다’는 말을 건네는 기록도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