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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리 Aug 17. 2021

졸업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NGO 입사부터 퇴사까지 2년

 20살이 되기 전까지 교가마다 관악산이 등장했습니다. 서울대 근처에 살아서인지 막연하게 서울에 있는 학교를 얕잡아봤나 봐요. 무려 11개의 대학에 모조리 떨어지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얼마나 소중하고 절박한 지 배웠습니다. 예상에 없던  고4가 되어 물을 잔뜩 머금은 솜 같은 마음으로 1년을 보냈습니다. 이 시절에는 어디든 붙여만 준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1년 동안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꿈은 없었습니다. 재수 때 전문대까지 합쳐서 4년제 사회복지학과와 전문대 시각디자인학과가 합격했습니다. 얼마나 생각 없이 폭넓게 입시지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엄마, 나 사회복지학과랑 시각디자인 학과 중에서 어디 가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4년제가 취업이 잘 되지 않겠어? 사회복지학과는 취업도 잘된다 하던데.”


 합격 자체만 감격스럽고 별 꿈도 없던 시절 사회복지학과를 택한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한 사람의 구실(…)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별생각 없이 갔던 학과에서는 취업에 보탬이 되는 보육교사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말에 저녁 9시까지 수업을 듣기도 했고요. 다양한 복지론을 배웠습니다. 아동복지론, 청소년복지론, 여성 복지론, 장애인복지론, 노인복지론 등 참 폭넓은 이론을 배웠지만 기억나는 건 프로이트 박사님 뿐이지만요.

아담한 캠퍼스를 자랑하던 우리 학교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취업도 재수, 삼수를 했습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여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요. 일단,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하고 해외봉사를 다녀올 생각이었습니다. 졸업 후 해외로 갈 생각에 가득 부풀었던 마음은 1급 불합격과 동시에 바람이 꺼졌습니다. 첫걸음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데로 바로 해외로 나가려니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고요.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고 당신의 뜻대로 무언가 일을 한다는 걸 부모님께 어필하고 싶어 어린이집 누리 보조교사를 시작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영어공부를 할 생각이었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휴게시간 없이 7시간씩 일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어요. 그 당시 110만 원을 받았는데 액수보다는 돈을 번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얼마를 벌든 무슨 일을 하든 내 생활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때는 그게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고시도 재수를 하고 합격했습니다. 될 때까지 하면 된다는 나름 긍정의 마음도 생겼어요. 문제는 합격 후에도 취업이 바로 되지가 않았다는 거죠. 이렇다 할 스펙이 없어서인지 자기소개서를 못써서인지 헷갈렸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에야 둘 다였다는 생각이 들며 웃음이 나지만 그 당시에는 왜 더 열심히 살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기 바빴어요. 그 와중에 아르바이트는 이어졌지요. 일하는 시간과 겹쳐 면접을 놓친 곳도 있었고, 시간이 맞아 면접을 본 적도 있었습니다. 양복을 사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서울시일자리지원센터에서 양복을 빌려 입었던 기억이 나요. 서울시에 있는 아주 훌륭한 제도입니다. (*서울시일자리지원센터에는 이 외에도 청년을 위한 여러 제도가 있어요. 증명사진도 여기서 무료로 찍었답니다.)


 우여곡절 끝에 보게 된 면접에서도 고배를 마셨습니다. 준비되지 않았던 적도 있고, 성질을 죽이지 못했던 적도 있었어요. G 단체는 위치도 좋고 하고 싶었던 일과 부합했습니다. 다만 제가 이력서에 약국 아르바이트 기간을 잘못 적는 실수를 했을 뿐이죠. 무척 아찔했습니다. 당황한 저에게 면접관은 “김나봄씨가 약국에서 계산은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어요. 그래. 나라도 내가 일 못한다고 생각해서 안 붙이겠다 싶었지만…. 안 붙이면 그만이지 왜 저런 말을 하지? 생각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심박수가 요동을 쳤고 이후 질문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가진 장단점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했던 다른 면접자가 합격하는 게 옳았지요. 면접 탈락 문자가 왔습니다. 당연했지만 아쉽고도 시원한 그런 복잡한 마음이었어요. 한 달 뒤 구직사이트에는 G단체 재공고가 떴어요. 아마 붙은 그 사람이 그만둔 거겠지만,  또 지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단체에서는 1: 1 면접을 봤습니다. 대표는 내 이력서에 있는 가족관계를 보더니 오빠는 무슨 일을 하냐고 했어요.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오빠가 아무 일을 안 하고 있는데 엄마랑 동생이 먹여 살리는 거냐며 오빠가 너무하다고도 했습니다. 그 순간 왜 마음에 불길이 훅 일었습니다. 뭔데 이 인간이 내 가족을 무시하지? 그게 업무랑 무슨 상관이냐고.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뗐습니다.  저희 오빠는 열심히 준비하고 있고 우리 가족은 모두 괜찮아요. 저도 모르게 짐짓 강한 억양으로 말했고 침묵이 흘렀습니다. 분위기는 이후로도 별로였어요. 그제야 대표 방을 오기 전 지나쳤던 직원들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합격해도 여긴 안 온다고 생각하며 쿵쾅거리며 계단을 뛰어내려왔습니다. 능력도 없지만 참을성은 더 없었지요.


과제를 하고 있는 뽀시래기시절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고 돈도 당장 벌고 싶은데 불합격이 이어졌습니다. 내 상황을 지켜보던 지인은 이력서를 자기가 다니는 회사 인사팀에 왜 자꾸 탈락하는지 물어봐 주겠다고 했어요. 고맙지만 부끄러웠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이력서를 메일로 보냈고 빠르게 답이 왔습니다. 성실하고 일을 열심히 할 것 같으니 자소서에는 큰 문제가 없고 가능성이 보인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동시에 뼈아픈 충고가 이어졌습니다. 학력이 부족하니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서 영어공부를 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다른 곳에 취업을 해서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충고가 굵은 글씨로 보이지 뭐예요. 이 당시 저희 집은 15년 가까이 운영하던 당구장을 정리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어요. 불어나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다가 파산신청을 한 직후였지요. 평소에  가족이 화목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때는 그 누구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어요.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오래된 빌라로 이사를 가고 아빠는 새벽마다 일을 구하기 위해 나섰어요. 이제는 과일을 먹을 수 없고 라면만 먹어야 한다는 상황이 실감이 나질 않았어요. 이 상황에 보탬이 되지는 못해도 손을 벌릴 수는 없었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회복지사협회와 복지넷을 매일 들락날락거렸습니다.



 구직사이트에서 벌건 눈으로 스크롤을 반복하던 중 어느 날 전화를 한 통 받게 되었습니다. 나름 규모가 있는 여성 사회복지단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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