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렁주렁 달리기
<그것> 시리즈의 앤디 무스키에티 감독이 DC 유니버스에 합류했습니다. 에즈라 밀러, 사샤 카예, 마이클 키튼, 벤 애플렉, 마이클 섀넌 등이 뭉친 <플래시>죠. 정식 개봉 오래 전부터 톰 크루즈부터 헨리 카빌은 물론 영화계 유수 인사들의 마르지 않는 칭찬이 이어졌고, 스포일러를 막겠다고 엔딩 장면이 편집된 버전의 시사회를 여는 등 꽤 소란스러운 준비 과정을 거쳐 오는 14일 개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빛보다 빠른 스피드, 물체 투과, 전기 방출, 회복, 천재적인 두뇌를 자랑하면서도 저스티스 리그에서 궂은 일 담당인 플래시, 배리 앨런. 오느 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 시간을 거스를 수 있음을 알게 된 그는 브루스 웨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을 역행합니다. 한 번의 실수가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그 세계에서 배리는 현재를 고치려 달리기 시작합니다.
<저스티스 리그: 스나이더 컷>에서 선보였던 배리의 시간 역행 능력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엄마를 잃고 아빠는 철창 신세가 된 소년의 성장기가 아름답기는 쉽지 않겠죠. 그런 상처를 안고 자란 사람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제아무리 현명하고 신중하더라도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멀쩡하게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희망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시간은 결코 다루기 쉬운 소재가 아닙니다. 특히 단순히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저지르는 행동의 여파를 그리는 것은 그 어려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과 같죠. 그러나 DC 유니버스의 <플래시>에게는 그럴 명분이 있었습니다. '끔찍한 상처로 얼룩진 과거'는 비단 배리의 현재뿐만 아니라 방향성 없이 방랑하던 DC 유니버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으니까요.
할리우드에서 스크린 바깥에서의 행적이 영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것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미 해머부터 조나단 메이저스에 이르기까지 그 선을 넘겼다는 다수의 판단에 단숨에 사그라든 배우들도 많았죠. 에즈라 밀러 또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듯 했으나, 어째 조니 뎁에게도 가차없었던 워너브라더스는 그를 놓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된 영화가 바로 이번 <플래시>였죠. 에즈라 밀러가 주인공이자 1인 다역을 소화한 탓에 어떤 방법으로도 영화에서 그를 배제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영화를 통째로 묻어버리기엔 이 영화가 DC 유니버스의 미래에서 너무나도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조금씩 들려오는 업계인들의 극찬도 그 기대를 증명하는 듯했구요.
그렇게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그리고 <수어사이드 스쿼드>도)를 거쳐 첫 주연작으로 돌아온 <플래시>는 매번 팀업 영화에서 한두 장면 정도 하이라이트로 써먹었던 배리의 능력을 마음껏 뽐내며 포문을 엽니다. <엑스맨> 시리즈의 퀵실버와는 비슷한 듯 또 다른 초고속 능력에 배리 앨런이라는 캐릭터의 개성을 더해 영화의 분위기와 방향성을 예고하죠.
그 분위기와 방향성이란 의외로 가볍고 원색으로 가득합니다. 앞선 등장 작품들이 잭 스나이더의 영화들이었다는 것도 큰 몫을 하겠지만, <플래시>는 영화보다는 코믹스에 가까운 톤을 유지하려고 하죠. 빨강과 노랑으로 가득한 코스튬과 초능력, 두 배리의 끝없이 실없는 대사, 초고속으로 움직이며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사건과 장면 연출 등 많은 순간에 상당한 오락성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배리의 능력만으로도 영화 볼거리의 절반은 채우는 와중에 배트맨과 카라를 더합니다. 특히 배트맨은 초반부 벤 애플렉의 배트맨과 중후반부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이 모두 등장하는데, 배트맨이 주인공인 비디오게임 시리즈에서 따 온 듯한 화려한 액션으로 지금까지의 배트맨과는 또 다른 맛의 볼거리를 선사하죠. 칼엘의 역할을 대신하는 카라 또한 잭 스나이더 스타일의 격투를 고스란히 재현하구요.
이것만으로도 앤디 무스키에티 감독의 신중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DC 유니버스의 장점으로 평가받는 것들을 계승하면서 단일 영화뿐만 아니라 세계관 전체가 나아갈 방향성을 고민한 것으로 보이죠. 시간 여행이 가능한 캐릭터를 내세워 그것을 이룩하면서도 그의 개인사와 성장, 내면,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물 개인의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꽤 훌륭한 의의를 가져갑니다.
그러나 마냥 찬사만 보내기엔 언급한 장점들을 제외한 부분에서 나오는 단점들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충격적인 CG죠. 근래 <블랙 팬서 2>, <앤트맨 3>,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등에서도 같은 회사의 십수 년 전 작품들에 비해서도 CG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플래시>는 그 모든 영화들을 뛰어넘고도 남습니다.
CG 완성도가 처참하다못해 몰입을 방해할 지경입니다. 특히 사람 얼굴에서 두드러지는데, 초반부 아기 구출 장면에서도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더니 최후반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진지한 장면들에서도 찰흙으로 빚은 것보다도 괴상한 면면들이 등장하며 해당 장면의 담대한 연출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 실패하죠. 에즈라 밀러의 1인 2역 연기에서도 합성한 대역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도 너무나 흔하구요.
배리 개인에게 집중하며 천천히 흘러가던 초중반부에 비하면 배트맨과 카라가 합류한 중후반부는 꽤 급작스럽습니다. 한 명일 땐 천천히 가던 영화가 머릿수가 늘어난 뒤 속도를 올리면 상대적인 다급함은 더 커지겠지요.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배우로 보나 캐릭터로 보나 결코 뒷전으로 할 수 없기에, 가장 큰 피해자는 후반부 사건의 중심이 되면서도 필살 무기쯤으로나 취급되는 카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맨 오브 스틸>을 직전 작품쯤으로 여긴 탓도 있습니다. 정확히 10년 전 작품인데다 플래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영화의 사건들은 시간 여행 탓에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물론, 크립톤인의 특징과 능력을 상식으로 깔고 들어가며 <플래시>의 진입 장벽을 높이죠. 플래시를 소개하는 데에는 그토록 친절하던 영화가 세계관을 통째로 갖고 와서 들이미니 갑자기 팬 헌정 영화가 되어 버립니다.
물론 팬 헌정 영화, 팬 무비는 경우에 따라 엄청난 강점이 되기도 합니다. 곧 개봉할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너무나 훌륭한 예시가 되겠죠. 그러나 그것이 강점이 되려면 '모르고 봐도 재미있고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조건이어야만 하는데, <플래시>는 알고 보면 재미있는 데에 반해 모르고 보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파악조차 어렵다는 데에서 조건 충족에 실패합니다.
현재의 배리와 과거의 배리를 단순한 정반대 캐릭터로 설정해 계속해서 충돌시키는 탓에 갈등과 유머 코드는 변주 없이 단조롭고,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초능력은 비현실적이어서 초능력이라는 듯 한두 번 써먹고 말아야 할 만화적 허용을 남발합니다. 그렇게 이리저리 흩어진 집중과 감정들을 신파 한 방으로 한데 묶으려는 시도는 웅대했던 직전까지와는 또 다른 불협화음을 내죠.
그럼에도 최근 DC 영화들 가운데, 어쩌면 최근 수퍼히어로 영화들 가운데 가장 오락적입니다. 팬이라면 환호할 순간들도 많고, 되돌아보면 다시 보고 싶은 명장면 하나 갖추지 못했던 작품들의 홍수에서 단연 돋보이죠. 그러나 이제 단어 자체가 진입 장벽이 되어 버린 멀티버스에서 시간을 되돌리며 오색찬란하게 뛰어노는 광경은 우리들의 것에서 그들만의 것으로 건너가기 직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