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어도 울지 않을래요.
길지만 짧은 인생길 마치면서.
첫 눈 오는 날 장인의 장례식을 무사히 마쳤다. 향년 90세의 긴 여정...
3일의 장례절차로 마무리하는 게 결례라는 생각에 몇 자 기억을 뒤집어본다.
12월 11일 저녁 11시에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통상 밤중에 오는 전화는 안 좋은 소식이라 멈칫거렸다.
전화 받는 순간 장모님께서“아버님이 위독하시니 빨리 병원에 오라”는 다급한 목소리다.
그동안 아버님은 요양병원에 계셨었다. 이전에는 면회가 되어 뵐 수 있었지만 코로나 19 이후에는 영상통화로 제한되어 버렸다.
자고 있건 아내를 깨우고 부리나케 쏜살같이 수원 요양병원에 달려갔다. 가는 도중 아내가 병원에 연락한 바에 따르면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임종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에 가슴이 더욱 뛰었다. 11시 40분경에 도착했지만, 아버님은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다. 아내는“아버지, 아버지 혼자 두게 해서 미안해“ 라는 흐느낌과 오열이 뒤범벅이다. 남겨진 따뜻한 체온의 아버지를 주무르면서 애통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왜 이런 슬픔의 죽음을 주는 걸까?
이별이 있기에 부활이 있고, 재회의 기쁨이 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 무력감과 한 없이 작아집니다. 특히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를 보내는 유가족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30분 정도 지난 시간에 다른 가족들이 모두 병원에 도착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가족이 큰 위로가 된다. 장례식장 선정에 관한 의견이 오갈 때 어머님이 아주대병원을 결정해 주셨다. 두고두고 잘 된 결정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1,000명을 육박했다는 속보에 부의를 알리기조차 송구한 고민의 시간.. 다행이도 조문객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위로의 전화, 근조화환, 부의금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만남의 운명이 다가오다
아내를 만난 것도 딸아이를 시집보낸 것도 아버님의 20년 전 상도동에서 수원으로 이사 온 덕분이다. 아버님은 오랫동안 군인으로 근무하시다가, 은퇴 후 유규 땅을 매입하고 나무를 심으셨다. 교통편이 서울에서 가기보다는 수원에서 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수원으로 이사 온 것이다.
상도동에 살았던 단독주택은 연립주택으로 변해버렸기에 돈 문제만 생각하면 큰 손해를 본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미소는 집안 전체에 다가왔다. 마침 수원 광교인근에 20여전 전에 아버님 동생분이(나에게는 삼촌) 교회를 개척했다.
그 교회를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신 것이다. 인연은 우연히 다가오기에 소중하다. 개척한 교회에 다니시던 신실한 y 집사님이 지금의 사돈이 되었다. 어느 날 안 사돈이 어머니가 입원한 아주대 병원에 문병을 왔었다. 그 때 마침 간호하던 아내를 우연히 만나, 서로 인상이 너무 좋아 보여, 자식 이야기를 나누는 중 동갑이었다. 아들, 딸을 서로 만나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무르익어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그런 축복으로 손자가 2명이다. 아버님이 수원에 이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천생연분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 땅과 이별하다
12월 12일 오전 10시, 장인이 다녔던 담임목사님 주관으로 입관예배를 드렸다. 본문 말씀이 요한복음 14장 1~6절 으로“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없느니라.”
우리의 능력으로는 세상의 염려, 근심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다. 비싼 구속의 역사사 있어야 한다. 재물, 명예를 채우려는 노력 대신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순종이 요구된다.
다시는 사망이나 아픔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실 아버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기억난다. 남은 가족들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더욱 사랑하고 감싸주는 것이 아버님께 평소 해드리지 못한 효도가 아닐까?
직장생활 하던 80년도에는 토요일도 근무했었다. 신혼 초에는 매주 번갈아가면서 본가와 처가에 갔었다. 본가에는 이미 6형제가 되어, 형제들이 자주 부모님을 뵈러 왔기에 나는 1/6이었다. 하지만 처가는 유일한 사위로 무척 반갑게 맞아주셨다.
첫째 아이를 낳고 갈 때에는 장인이 지방에 멀리 가셨다가도 취소하고 달려오실 정도였다. 여름휴가 때도 종종 같이 다녔고 ‘사위 사랑은 장모다“라는 말이 실감된다.
적선지가 필유유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주역, 문언전)
이 말은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는 말이다. 이번 장례식 때 새삼 실감했다. 바로 장모님의 숨은 공로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버님은 고향이 논산이고 형제분 10남매 중 남자 2번째이다. 서울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큰형을 제외한 모든 형제들이 아버님 집에서 상당기간 지냈다고 한다. 적게는 4달, 길게는 4년 이상 아버님 집에서 유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님의 그 때를 회상하면서“아버님 형제를 돌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1인 가구 수가 600만을 넘고, 가족이란 공동체가 붕괴된 오늘날과 이와 같은 일은 천지가 진동할 일이 아닌가?
오늘날 행복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이유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어머님 형제분들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어떠한 대가나 공로도 생각하지 않은 장모님의 마음씨가 있었기에 자손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이 든다.
셋째 날, 6시 30분 발인예배와 수원 연화장의 하관예배를 끝으로 장례절차가 마쳤다. 마cla 아버님은 월남참적과 유공자로 인해 동작동 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다.
벌써 3일이 숨 가쁘게 지나갔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아버님 벌서 그립습니다.
부디 편안한 잠을 주무세요. 먼 훗날 죽음이란 육신의 잠에서 깨어 반갑게 만나요.
소풍 같은 인생길, 부모 자식 된 인연에 감사드려요.
+ 천국 가는 환송 길
인생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누구라도 가야하는 그 길, 운명이 아닌 선택이 아닙니까?
인생은 학기와 달리 졸업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나 하늘로 돌아가 주님을 뵙습니다.
슬픔도 아픔도 없는 그 길에 손에 손을 잡아 주세요?
인생은 차가운 절벽이 아닙니다.
정신이 맑아지고 영혼이 따뜻한 그곳 그곳의 안식처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시겠죠?
아버님, 그렇게 사랑해주셨는데 미안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용서하시고, 주님만 인정하시는 그 길을 향해 사뿐히 걷겠습니다.
아버님 천국에서 만나요.... (김진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