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진 Sep 13. 2024

이민자의 삶

<Hometown> 원래 있던 곳도, 떠나서 다다른 곳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어디에 살든지 나는 평생 ‘나’와 ‘바깥의 세계’ 사이를 잇고자 노력하는 이민자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빠와 엄마가 결혼한 후 아빠의 박사 과정을 위해 뉴질랜드로 이주를 왔고 거기서 내가 태어났다. 우리가 살던 곳은 남섬의 ‘더니든’이라는 도시였다. 오클랜드 같은 대도시면 모를까, 자연과 야생동물로 가득한 더니든은 동양인이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섬나라 사람들은 폐쇄적인 면이 있어 외부인들을 반기지 않는다. 남반구의 외딴섬나라인 뉴질랜드, 거기서도 인구가 훨씬 적은 남쪽의 도시 더니든에서 한국인이란 외계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우리 가족은 매일매일 인종차별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불 같은 성격의 아빠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절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은 아빠가 나, 엄마, 한국에서 유학 온 사촌언니를 태우고 운전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신호에 걸려 정지했는데 갑자기 옆의 차에서 창문을 내리더니 우리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곧바로 신호가 바뀌고 그 차는 낄낄대며 출발했지만, 화가 난 아빠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뛰어서 그 차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차의 백미러에 비친 광경을 상상해 보아라. 뛰어서 자동차를 쫓아오는 동양인이라니.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아마 그 사이 그 뉴질랜드인은 생각 없이 저지른 지난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얼마 못 가 그 차는 또다시 신호에 걸려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아빠는 창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이 외에도 우리 가족이 당한 차별은 다양했다. 하지만 이런 수난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뉴질랜드에 아예 눌러앉고 싶어 했다. 타지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엄마는 나를 데리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고, 몇 년 후 하는 수 없이 아빠도 따라 들어왔다.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6살이었던 나는 동네의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한국어 발음이 어눌하단 이유로 놀림을 당했다. 처음 다녔던 유치원엔 짓궂은 아이들이 많았다. 매일 울면서 집에 돌아와 유치원을 한 번 옮기기까지 했다. 난 외모는 한국인이지만 내면은 뉴질랜드인인 상태로 한동안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살았다. 그 이후로는 한국어가 점점 늘어 겉도 속도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그 이후의 삶이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안정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민자의 삶은 고달프다. 외모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언어로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꼭 말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같은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상대방이 정말로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많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모나 배우자와도 마찬가지이다. 한 지붕 아래 산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다. 부모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의 생각을, 나의 꿈을, 나의 세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서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외국어로 말한 것도 아닌데 가끔 부모님은 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다. 어디에 살든지 나는 평생 ‘나’와 ‘바깥의 세계’ 사이를 잇고자 노력하는 이민자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어릴 때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 무의식의 영향인지 난 아직도 서양인을 보면 괜스레 무서우면서도 미운 마음이 든다. 돈이 있다 해도 서양권 나라에는 굳이 여행을 가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뉴질랜드에 남고 싶어 했던 아빠를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아빠에게는 한국이 뉴질랜드보다 아빠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국인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었을지 모른다. 연고도 없는 지구 반대쪽의 먼 나라가 오히려 아빠에게는 자유의 땅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도 엄마나 아빠에게 뉴질랜드에서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못한다. 해서는 안 될 얘기를 꺼낸 것처럼 불편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언젠가 다 터놓고 말할 수 있다면 아빠에게 있어 뉴질랜드는 어떤 곳이었는지 꼭 묻고 싶다. 그리고 지금, 아빠의 고향인 이곳에서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비밀의 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