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비에르 기념성당, 아리타 도자기 마을, 나가사키 답사 -
일본 규슈에 다녀왔다. 정해진 일정에 맞춰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행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의외로 시키는 대로 하는 수동적인 여행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아리타 도자기 마을,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 그라바엔,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등으로 이어진 일정은 일본이 16세기 처음으로 세계경제에 링크되는 순간부터 메이지 유신이후 산업화에 성공하는 과정, 그리고 ‘제국’ 일본이 몰락하는 순간까지 영욕의 일본 근세・근대사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들만을 모아놓은 듯해서 많은 영감을 주는 여행이기도 했다.
신도들이 돈이 없어 비대칭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하비에르 기념성당(1931)은 일본에 카톨릭을 처음으로 전파했다고 알려진 예수회 신부 프란체스코 하비에르를 기념하여 지어졌다. 155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와 전파하기 시작했으니 일본의 카톨릭 전파사도 꽤 유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옛날 하비에르 신부는 왜, 굳이, 하필이면 미지의 땅 일본으로 건너왔을까.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발견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의 동방진출이 본격화되는데, 이는 바스코 다 가마의 모험으로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향하는 항로가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의 고아 점령을 시작으로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점령을 거쳐 중국 광동성 마카오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1553년. 포르투갈인들은 이렇게 개척된 상행로를 따라 아시아와의 무역행위를 본격화하게 되었고, 이후 말라카와 마카오로부터 일본을 잇는 상행위로 그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포르투갈 무역상들이 전해주는 총포뿐 아니라 중국의 생사, 도자기 등을 통해 서구와 중국의 문물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방에 진출한 포르투갈인들의 무역선에 함께 타고 있었던 이들이 바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포르투갈인들의 신앙활동을 주재하고 점령한 지역의 포교활동을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예수회라는 조직은 카톨릭계 성직자들이 유럽에서의 신교・구교 다툼의 반동으로 좀 더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포교활동을 통해 신교의 확장을 저지하겠다는 목적으로 파리에 조직한 단체다. 초대 회장은 유명한 로욜라 신부. 로욜라 신부는 1542년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신부를 포르투갈의 무역선에 태워 보내면서 동방에서의 예수회 활동을 명하게 된다. 그는 포르투갈인들의 상행로를 따라 인도 고아에서 3년, 말라카 등 동남아에서 3년을 체류하면서 포교에 힘쓰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한다. 상심해 있던 하비에르는 말라카에서 만난 안지로라는 일본인을 전도하고 제자로 삼는데, 이를 계기로 미지의 땅 일본을 포교하라는 히든미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규슈로 이동하게 된다. 총 2년 3개월 동안 일본에 체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카톨릭을 전파하였고, 이후 불온한 종교집단으로 핍박받아 온 일본 카톨릭계의 시조로 추앙받게 되는 것이다.
하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돈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원해주어야 할 예수회나 포르투갈 왕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여 선교사들은 스스로 자금을 모을 궁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일본에서의 포교활동을 통해 다진 나름의 기반을 이용하여 장사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연계하여 일본인들에게 중국무역을 알선하거나 중개함으로서 발생한 이익을 통해 교단의 활동자금을 충당하였다. 이 시기 일본은 다름아닌 전쟁이 날마다 벌어진다는 전국시대. 글자 그대로 적자생존의 시기에 부국강병이 절실했던 일본 규슈의 다이묘들 역시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이 이익이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던 중국의 문물을 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철포에 필요한 연과 초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580년이 되면 카톨릭으로 개종한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진(寄進)하기에 이른다. 성직자와 무역중개인이라는 이중직업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이 결국 나가사키를 하나님의 품에 안겨드리게 된 것이다. 다만 이는 포교를 위한 안정적인 거점이 필요했던 예수회와 외부의 선진적 물품이 정기적으로 수입될 수 있도록 포르투갈의 내항이 절실했던 다이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바로 막부초기 일본의 유일개항지였던 나가사키의 시작이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하면서, 버젓이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포르투갈인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지게 된다. 결국 1612년 도쿠가와 막부는 모든 카톨릭 교단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선교사들을 비롯한 신도들을 적발하여 때로는 감금 및 고문하고, 때로는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일본 그리스도교 세력에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수백년이 흘러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되고 난 뒤에도 암묵적으로 존재했다고 한다. 하비에르 기념성당은 일본 주류사회의 눈칫밥을 수백년간 먹어가며 성경책도 없이 구전으로 신앙을 이어가면서도 그 뿌리는 잊지 않겠다는 일본 카톨릭 교인들의 집념이 느껴지는 유적이었다. 자금이 부족해 비대칭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성당 건물이 허투루 보이지 않을 만큼.
포르투갈인들로부터 나가사키를 줬다 뺏은 도쿠가와 막부에게 접근하여 나가사키에서의 상행위를 요청한 외부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중국인들이었다. 1639년 막부의 쇼군은 쇄국을 단행하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쇄국은 아니었고, 선택적 쇄국 혹은 선택적 개항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이후 나가사키에 네덜린드인, 중국인, 조선인들이 거주하도록 허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인들의 경우 나가사키 앞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데지마섬내에서만 상관을 짓고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복건인들을 중심으로 나가사키로 들어온 중국인들의 경우 일정한 구역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도록 강제하였다. 명청(明淸)교체기, 스스로를 명인(明人)도 아니고 청인(淸人)도 아닌 당나라 사람, 즉 당인(唐人)이라고 지칭한 중국대륙의 유민들은 많으면 한 번에 만 명씩 이주해오는 통에 막부의 관료들이 경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조선인들의 경우 나가사키뿐 아니라 규슈지방 곳곳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인 도공(陶工)들이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이전,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포르투갈로부터 수입한 총포를 앞세워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조선인 도공들을 납치하여 끌고 간 것 역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16,17세기 도자기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유럽에까지 수출되던 ‘세계상품’이었고, 그 굽는 기술은 누구나 탐내는 ‘첨단기술’이었다. 세계의 경기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한 것과 맞물려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잘 만들어진 백자와 청자는 유럽의 귀족들 및 부르주아들에게는 그들의 부를 과시할 수 있는 명품이었고, 자본가들에게는 자본축적의 주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일본의 다이묘들 역시 마찬가지. 전쟁과 납치라는 험악한 방법을 통해 조선인 도공들을 데려온 것과는 달리 일본의 다이묘들은 이들 최첨단 기술자들을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칼 한 번 휘둘러본 적 없는 기술자들을 사무라이 대접한 것은 물론 도자기 생산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생활 도기가 아닌 명품으로서의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유약을 바른 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낼 수 있어야 했는데, 일본인들에게는 이 기술이 없었다. 또한 그 재료가 되는 흙을 구할 수 있는 토양을 구별해내는 기술 역시 없었다고 한다. 조선의 도공들은 규슈지역 각지를 다니면서 적절한 토양을 찾아다녔고, 그 중의 한 사람인 이삼평 도공의 경우 아리타 지방에서 적절한 토양을 발견, 자기생산에 성공하게 된다. 향후 유럽을 휩쓰는 아리타 자기의 시작이다.
사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는 기술과 더불어 자기생산의 핵심은 그 특유의 푸른 빛 도는 염료로 백자의 표면에 그리는 회화의 아름다움이다. 코발트염료로 불리는 이 염료는 지금의 서아시아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중국 대륙의 자기 역시 서아시아로부터 코발트 염료를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 서아시아산 코발트 염료를 공급해 준 것이 바로 나가사키에 머물고 있던 중국인, 즉 당인들이었다. 그리고 당인들은 코발트 염료를 공급해 준 것에 그치지 않고 백자 표면에 유려한 회화작품을 그리는 기술 역시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즉, 아리타 자기는 조선 도공들의 기술에 일본의 토양 및 지원, 중국의 염료 및 회화 기술이 초국적으로 결합하여 탄생한 동아시아 첨단 기술의 결정체였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17세기초 아리타에서 일본산 자기가 제조되기 시작했다. 일본산 자기가 세계시장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는 나가사키에 거주중이었던 네덜란드인들에 의해서였다. 1659년경 네덜란드인들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일본의 자기를 유럽에 본격적으로 상품화하여 공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 1660년부터 일본자기는 수출분야에 있어서 중국자기를 추월하여 유럽시장을 제패하게 된다. 다만 일본자기 열풍은 다른 한편으로는 빈집털이의 성격이 강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시기 중국의 자기수출은 (소수의 밀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명청교체기의 혼란기였던 데다가 청조의 성립이후에도 청 조정은 중국 동남연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반청(反淸)운동으로 연해지방이라면 학을 떼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에는 해상에서의 어떠한 활동도 금지하는 해금(海禁)정책을 수십년간 펼치기에 이른다. 이는 중국 도자기 수출의 정체로 이어졌는데, 그 지위를 일본자기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무려 18세기까지 유지된다. 수출량은 1720년을 전후로 최고를 기록하였으나, 1740년대부터 청조가 해금을 풀고 세계시장에 재등장하면서 일본 자기의 수출량은 감소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 자기가 다시한번 세계시장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는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다.
일본은 포르투갈의 선교사들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에 의해 16,17세기에 일찍부터 세계시장에 링크되었다. 비록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인듯 개항같은 쇄국정책으로 그 링크는 매우 약해지지만, 그 끈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던지라 메이지 유신과 ‘제국’ 일본의 탄생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민음사 2014)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혹시 규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지참해 가는 것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