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영화, 드라마의 범람 시대를 살고 있다. 공중파 방송이니 종편이니 희한한 카테고리를 지칭하는 신생언어가 부유하더니 급기야 OTT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OTT(Over-the-top)란 영화, TV 방영 프로그램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일컫는다고 한다.
이젠 이 카테고리들의 분류도 중첩되는 듯 헷갈려, 카테고리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알맹이 존칭 곧 영화, 드라마로 통칭해서만 말하고 싶어진다.
사실 나는 TV를 잘 안 본다. 저명한 사람들이 강연에서,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 스토리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어렸을 땐 좀 없어 보였다. 독서의 빈약함을 드러내는 듯하다 자고 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허나, 이젠 어렸을 때 동네 아주머니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각종 연속극 드라마가 내 삶에도 가끔은 스며 들어오곤 한다.
요즘 장안의 화제라며 입소문이 거센 드라마가 있다. 아이유와 박보검 주연의 <폭삭 속았수다> 이다. 이 드라마가 나의 자존심에 디스를 냈다. <별에서 온 그대>가 유행할 때도 나는 일절 안 봤고 경제신문에 나왔을 때가 되서야 곧 5년이 지나 몰아서 봤다. 불멸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도 언니들이 TV를 켜놔서 흘깃 봤지만 끝까지 보지 않는 과감한 소신을 피력하였다.
바쁜데 드라마에 에너지가 분산된다며, 스스로를 내려친 핀잔은 꼬꾸라지듯 고개를 숙였다. 대사가 주옥 같은 에세이 문장 같았다. 본글은 드라마를 리뷰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드라마 얘기는 여기까지 하나 궁금하시면 찾아보시면 될 듯하다.
그래 오늘은 <폭싹 속았수다>와 그윽히 오버랩되는 해당 글을 하단에 인용해 본다.
30년 된 단독주택, 거실 격자무늬 창으로 그윽한 햇살이 따뜻하다. 포근한 이 빛이 이리 저리도록 불안한 건 왜일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더 많이 본다는 건 단어가 모자라단 의미일 게다.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세월, 남들이 입어보지 못한 추억, 남들이 찢어보지 못한 심장 저 밑바닥의 뭉켜있는 감정들 말이다.
어려서, 시간은 여름철 장마처럼 느리고 오래된 거적때기 같았다. 빨리 이 시절이 종례시간을 맞으면 이내 찬연한 자유와 풍요로운 언덕 위 정찬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 실낱 같은 묘령의 희망을 행복 삼아 견디고 또 견디며 살아냈다. 그 설레는 등불을 비추고 마음에 허다한 언어를 고이 담고 머리에 이어, 기어이 70고개를 넘어 이젠 80고개를 남기고 있다.
손주 규동이네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걸어서 20분은 족히 넘는 거리에 살고 있다. 문득 며칠 전 주말이라며 오랜만에 들른 딸과 사위 그리고 규동이가 남기고 간 소란이, 월요일 오전 애처로운 그리움을 더욱 부추긴다.
좀 더 있다 가라 할걸, 그 짧은 만남을 디딤 삼아 마음은 고향 버스를 타고 8살 고향집에 닿아버렸다. 그립고 그립단 말만이 목구멍 가득 채워지는가 싶다가는, 극심한 외로움에 사무치는 통증이 살결 위로 돋는 듯하다. 내 투정 다 받아주던 어머니, 굵은 힘줄 보이며 무등 태워준 아버지, 오빠, 언니들 생각에 불현듯 회한이 사무친다.
영원할 것처럼 무심히 보내버린 소소한 시간들이 아쉽고 미안하다. 삶이 극악스럽게 모진 것은 그 모든 것을 '일상'이란 이름으로 폄훼하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천륜의 관계도, 정량적 시간의 촘촘한 하루도, 생명의 유한함도, 소멸의 절대성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사소하게 만들고 만다. 일상이 삼켜버린 자리엔 더 주지 못한 사랑, 효도, 우정, 인정 등 숱한 회한만 남겼다.
'인생이 이리도 속절없이 유한한 것을, 한번 가면 한 뼘 육신으로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을..'
점순할머니는 점멸하는 마음의 전등을 느끼듯 몸서리치듯 자주 슬픔에 침잠되곤 한다.
요즘 부쩍 헛헛한 마음에 감기 몸살을 달고 사는 듯 무기력하고 자주 침울하게 가라앉곤 한다. 집을 지척에 두고도 근 2주 만에 보게 된 딸아이 선주, 그 애를 임신했던 그해 작렬했던 여름처럼 지난 주말도 후덥지근했다.
딸은, 건강 어떠시냐고 묻고는 이내 부엌 싱크대에 서서 가지고 온 반찬거리를 풀었다. 아마도 재래시장 반찬가게에서 사 온 듯하다.
규동이는 엄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유튜브인지 만화인지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점순할머니는 규동이 어깨너머에서 지긋이 말을 걸었다.
"규동아 요즘 공부는 어때?"
"응, 할머니. 힘들어. 학원 4개나 다녀. 할머니가 엄마한테 학원 좀 줄여달라고 해줘. 알겠지?"
규동이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사위는 머쓱한 얼굴로 몇 마디 건네나 이내 거실의 TV를 함께 보았다. 선주는 깔끔한 성격이라, 부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일회용 용기와 페트병을 치우며 짜증이 올라오는 게 역력했다. 그 순간 규동이가 들고 있던 딸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선주는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거실로 건너와, 물기 젖은 손을 급한 대로 청바지에 닦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은경아. 어, 거기 알지. 나도 요즘 야근에 주말근무에 정신이 없다, 오래간만에 하루 다 비웠어. 응. 은진이도 온다지? 그래. 엄마네 잠깐 들러서 부엌일 봐주고 바로 종로로 갈게.
남편도 골프동호회 모임이 서울에 있어서, 나 데려다준다 했으니 자차로 한 40분이면 될 거야. 이럴 때는 경기도에 사는 게 참 그렇다. 알겠어. 이따 봐."
선주는 핸드폰을 규동이에게 다시 주곤, 팔목 뒤로 돌아간 손목시계의 시침을 끌어와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매사에 정확한 아이였다, 키우는 내내 손이 많이 갔지만, 이내 이루려던 일을 이뤄낸 야무진 딸이었다.
말수가 적은 사위는 딸이 깎아온 사과를 먹으라며 내쪽으로 접시를 살포시 밀었다. 쟁반이나 소반에 바쳐올 여유도 없이 작은 거실바닥에 편하게 내온 우윳빛 유리 접시 위의 사과, 선주 아기 때 자주 만지고 입을 맞췄던 그 고사리 손이 깎아낸 작품인 것이다. 순간 점순할머니 눈가엔 옅은 눈물이 주름 따라 그렁거렸다. 무심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소매깃으로 사소하게 눈물 줄기를 막아섰다.
2주 만에 집에 온 지 2시간도 안돼, 조용한 듯 소란스럽게 예를 다해 나름 자식의 의무를 다하고 간 딸네 가족.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이리도 삶이 헛헛할 수가 없다. 시간마다 쩌릿쩌릿 통증이 올라오는 다리 관절염과 계단 오르내리기도 무서운 불안한 몸뚱이를 보며 생각한다.
'벌써 시골서 함께 자란 소꿉친구들 절반이상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살아온 세월이 쌓이면, 인생이 보험처럼 안심될 줄 알았던, 그 순진한 기대가 산산조각 난 것은 이미 오래다. 이 인생이란 가혹한 무게를 견뎌야 하는 하루가 불안하다. 내어준 사랑일랑 다 받을 마음은 아니었다만, 먹고살기 바쁜 딸내미의 인생이 안쓰러우면서도 서운하다.
스스로, 내 재벌 엄마도 아니니 그 서운함도 '안 와도 게안타. 너희 잘 사는 거 보면 그걸로 족하다' 며 마음에 없는 말만 되뇌었으나 실은 하루하루 지독히 외롭다. 뭣하러 그리 열심히 자식을 키웠는고, 뭣하려 그리 서방님 서방님 남편 뒷수발 했는가. 아니 뭣하러 70 넘어서까지 살아, 이젠 이 몸뚱이마저 나를 배신하고 날마다 말을 안 듣는 꼴을 보는가 말이다.
딸아이가 시집가기 전엔, 인생이 버거워도 남편도 있고 촉망받는 아이와 더불어 호사스러운 미래에 마음이 탱글탱글 했었건만, 헛된 기대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찬란했던 추억이 도리어 더 가슴 시리게 아프다. 정 주지 말고 곁을 내주지 않았으면, 자주 오지 않는 발걸음 탓하거나 외롭게 궁상떨지도 않으련만, 이 말짱한 추억의 기억들마저 원망스럽다. 과거 없이 덩그러니 이 현실을 마주하는 편이 나을까. 그냥 산소탱크에 의지해 숨만 쉬는 기계 같은 삶이 차라리 나을까.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나마 남은 생의 에너지마저 착취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웽웽웽.
점순할머니 주위를 날아다니는 요정들은, 할머니의 헛헛한 감정들 중에 무엇이 좋은 감정이고 나쁜 감정인지 분리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그리움은 좋은 감정일까, 나쁜 감정일까.
평소 수다가 낙인 요정들 이건만 잠시나마 웽웽거리는 날갯짓 소리만 가득했고 엄숙하게 고요했다. 설명충 요정들은 이내 너나없이 성토하듯 말을 토해냈다.
"(요정) 이천일. 점순할머니 얼마잖아 또 허무산에 오시겠어"
"그러게 말이야. 저번에 왔을 때도 자기 생명 1년을 비용으로 지불하고 1년 치 기억을 삭제하고 갔잖아"
"내 말이. 그것도 딸아이와 가장 행복했던 신혼시절 기억을. 심지어 최근에 손주 규동이가 상 받았던 날 기억도 지웠잖아."
"그야, 그날 딸이 할머니가 자꾸 깜박거리고,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해만 세 번째 태워먹으니 언성 높이고 짜증을 크게 내서 그랬지."
"아니, 인간들은 왜 그런 거야? 나이 들어 지들은 노화가 안 올까 봐 그래. 왜 직장 상사에게 혼난 걸 혼자 사는 어머니한테 화풀이를 하냐고"
"그러게. 또 할머니가 좀 착해? 속상해도 대꾸도 못 하고, 그날도 밤새 끙끙 앓다 몸살까지 왔잖아"
"진짜 생각 같아선 불효녀, 불효자들은 다들 불 프라이팬에 올려 몇 바퀴씩 돌리고 싶다니깐"
"(요정)오억 일. 쉿! 그건 요정 답지 못한 단어 선택이야. 불 프라이팬은 투덜 나라에서도 악질적인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인데, 악담도 참."
"할머니가 기억 삭제를 많이 요청해 이젠 치매가 꽤 심해지고 있지. 딸네 가족도 치매 간병하며 마음 고생하다 보면 그간 자신이 소홀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교정되지 않을까?"
"그래, 그걸 기대하는 거지. 인간이란 고통 없이는 자신이 경솔하게 하는 말과 행동, 부족한 감정을 돌아보기 힘들 테니깐. 할머니가 좋은 기억까지 포기하며 기억을 과도하게 삭제
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
"노년에 이런 대접받으려고 그리 고생했다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한탄스럽겠어.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도 안 됐는데, 아무리 바빠도 자주 대화 나눠주고 그러면 좀 좋아"
"에고, 30~40년 후엔 자식인 그들도 동일한 길을 걸을 텐데. 자주 보는 인간들의 삶의 궤적이건만 매번 마음이 슬프고 어렵다. 빨리 작업 끝내고 돌아갑시다. 힘내요!"
요정들과 난쟁이들은 작업을 마치고 늘 그렇듯 벽면에 손을 대고 1000 광년의 속도로 에코나라로 건너갔다. 빛의 속도와는 비교 불가인 빠른 공간이동인 것이다. 얼핏 보기엔 마치 벽면을 사이에 두고 차원이 다른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2차원의 면이 있는 곳은 요정과 난쟁이들에겐 모두 입구이며, 출구인 것이다. 모두 떠나고 요정 일천구만이 바닥에 떨어뜨린 물건을 치우고 있었다.
동일한 시공간에, 전혀 다른 생명체와 전혀 다른 인생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에코나라 백성들에겐 늘 애잔한 신비를 남겨 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