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의 시간은 그렇게 어느 순간 내 앞에 와 있었다. 이제껏 준비한 시간들을 마음껏 펼칠 준비가 된 것이다. 마치 수능 시험을 치르는 마음으로 메이크업 숍으로 간다. 거의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눈의 부기를 빼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는다. 유명한 숍들은 시즌이 되면 예약 전쟁이다.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내려놓은 상태라 동선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에서 메이크업을 받았다. 베테랑 선생님들이 공장처럼 메이크업과 헤어를 손질해주신다. ‘아나운서’라는 단어가 갖는 이미지를 내 얼굴에 표현해주시는데 그게 나와 잘 어울렸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얼굴로 시험장에 도착한다.
같이 스터디를 하며 구슬땀을 흘린 친구들도 보이고 에이스로 소문난 지원자들도 보인다. 그리고 이미 스포츠 또는 지방 방송국에서 현역으로 아나운서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쪽 일이 그렇다. 정규직이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전한다. 나처럼 애송이 지원자가 단번에 합격을 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기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의 배경과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결국 판단은 같은 카메라로 비추는 잠깐의 시간일 거라 믿었다.
미리 겁부터 먹으면 그건 반드시 카메라로 보인다. 카메라 테스트가 이뤄지는 시간은 정말로 짧다. 순식간에 지나간다. 늘 하던 대로 정해진 원고를 읽는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다. 시험장을 나오면 맥이 빠진다. 분명 심사위원과 마주한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는데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하고 있다가 풀려서 그런지 마치 태양 아래 녹아버린 눈사람과도 같은 기분이 된다. 여기까지 잘 왔다는 안도감보다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집으로 돌아온다. 시험이 끝났지만 나의 준비는 끝이 난 것이 아니기에 일상은 달라질 게 없었다. 다만 K를 대비한 스터디들은 대부분 마무리가 되었다.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지역 방송사나 케이블 방송사의 공고를 대비하여 계속해서 준비를 이어갔다. 숨 쉴 틈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다.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뜬소문이 돈다. 이번에는 몇 명을 뽑는다더라부터 몇 년 생 이상으로는 가차 없이 탈락이라더라. 누구누구도 시험을 보러 왔더라, 발표는 언제 날 거라는 등의 말들로 개인이 가지는 불안감을 지우려 하지만 뚜껑이 열릴 때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질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점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이 기회가 나에게 끝은 아니겠지만 끝이라 생각하고 준비했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말이야.
멀리에서는 언덕처럼 보였던 산이 막상 오르기 시작했더니 버거웠다. 그래도 쉴 새 없이 오르면 분명 언젠가 정상에서 멋진 뷰를 바라볼 거라 생각했다. 계속해서 걸음을 내딛는 건 맞는데 이게 과연 올라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같은 곳을 계속해서 뺑뺑 돌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아직도 산 어귀에서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봉우리는 점점 더 높아 보이고 이렇게 걸어서 닿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아니야. 오르지 말란 법은 없고 지난날의 나의 시간들을 되돌이켜 보면 분명히 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 잡아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때, K에서 공채 결과 발표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