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방탄을, 나는 엑소를

나이로 팬을 나누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by 킴나

연말이 무척 바빴다. 약속이 많아 바빴던 건 아니고, 연말 가요 시상식들을 챙겨보고 그 무대들을 돌려보느라 바빴다. 나는 n년 만에 엑소의 재입덕부정기를 겪으며 '이건 그냥 고등학교 시절, 한 때의 추억을 되살려보는 것 뿐이야'라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고, 엄마는 올 해 처음으로 방탄의 연말 무대를 지켜보기 위해 가요대전을 시작부터 틀고 있었다. 때아닌 아이돌 열풍으로 아빠와 동생은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이 사람들이?


엄마가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빌보드에서 상을 받고, 미국에서 인기가 많다는 소식에 호기심으로 무대를 한 두 차례 찾아봤을 때였다고 한다. 엄마는 외국 문화에 빠삭해서 골든글로브를 생방송으로 챙겨봐야하는 사람이다. 20대의 엄마는 이걸 위해 연차도 쓴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방탄의 해외 인기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엄마는 평소에 낮시간대 라디오도 많이 듣고, 신곡이 나오면 대부분 들어보는 편이라서 원체 취향이 젊고 세련된 편이었다. 아빠와 함께 80년대 가요에 대해 논할 수 있으면서도 나와 함께 엑소의 신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빠가 고릿적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 엄마는 애써 모른척 하다가 아빠가 옆구리를 찌르면 슬쩍 흥얼거리며 따라하는 식이었다. "이걸 아는 내가 싫다"고 덧붙이면서.


나는 애써 노력해야 알 수 있는 옛날 노래들에 대한 지식이 술술 쏟아져나오면서도 틴탑의 노래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엄마였다. 나는 엄마의 그 광범위한 지식과 취향이 늘 부러웠다. 내가 엄마보다 안목이 별로라는 생각에 엄마가 틴탑의 노래를 칭찬했을 때에는 발끈하면서 소리 내 다툰 적도 있었다. ABBA를 좋아하면서, 틴탑의 '긴 생머리 그녀'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 그만큼 엄마는 취향이 넓었다. 그러니 엄마가 새로운 가수에 빠진 것도, 즉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앉아, 핸드폰 뒷면 고리를 손에 걸고 조용히 이어폰을 꽂은 채 화면만 바라봤다. 내가 슬쩍 셀카봉을 쥐어준 이후부터는 셀카봉을 쥐고 더 편하게 영상을 봤다. 그게 방탄소년단의 직캠임을 알게된 것은 오래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는 모든 수록곡을 들어보았고 지민과 뷔를 중심으로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 아미야'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인스타그램으로 팬이 찍어올린 조악한 콘서트 영상을 찾아보며 '달려라 방탄'을 '달방'이라고 자연스럽게 줄여말하는 엄마는 이미 아미였다.


처음엔 좀 이상했다. 엄마가 갑자기 방탄소년단을? 'I NEED YOU'와 '쩔어' 시절 나도 잠시 방탄의 매력에 허우적거렸던 시기가 있었기에 방탄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덕 계기를 알기 전에는 좀 의아했다. 4050 여성, 그러니까 우리 엄마 또래의 사람들이 요즘 방탄에 입덕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뉴스로도 본 것 같지만 그게 엄마일거라고는 왠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낯선 모습에 처음에는 '또 방탄 봐?'하면서 슬쩍슬쩍 놀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진짜 아미'라고 느낀 건, 그러니까 엄마가 입덕 부정기를 지나 완전히 아미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게 되었구나 생각하게 된 건 엄마가 지민의 부상 소식을 전할 때였다.

"지민이는 콘서트 못 선대.. 아휴 그러니까 얘가 진짜 춤을 격하게 추긴 해. 너 영상 본 적 있어?"

엄마는 정말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가 가는 콘서트도 아니면서.

"본 적은 없는데 기사 봤어. 뭐, 목에 담 결렸다며? 무슨 담이 걸려서 무대를 못 서냐."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야! 하. 니가 담 결려 봤어? 그거 진짜 아파!"


엄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살짝 목소리 톤을 높여서, 웃음을 섞어 얘기했다. 지민이가 목에 담이 결린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느냐는 말을, 이렇게 힘 주어 이야기하는 것이 스스로도 좀 웃겼던 것 같다. 우리는 같이 웃으면서 '담 심각하지.. 목에 담 결리면 아프지.. 내가 안 겪어봐서 몰랐네..'하고 넘어갔다. 아아- 우리 엄마는 머나먼 지민의 목에 담 결린 걸 진심으로 걱정하는 아미였다.


201152635_1280.jpg 엄마의 지민


다시 지난 연말.

지난 연말 가요시상식 무대는 총체적 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방송 3사의 것, 그 중에서도 MBC 가요대제전은 무척 심했다. 엑소를 엔딩으로 세울지 방탄소년단을 엔딩으로 세울지 고민하던 대부분의 시상식과 연말가요 프로그램들은 방탄소년단에게 긴 시간을 잘라주는 대신 엑소에게는 보다 짧은 시간의 엔딩 무대를 할애했다. 나는 이것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두 그룹의 앨범 판매량과 음원 성적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어서 이들이 현재 탑 아이돌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면, 연차는 엑소가 높지만 올해 가장 큰 화제를 일으켰던 건 방탄소년단이었으니까.


대부분의 무대는 내 기준, 합리적이었지만 (물론 아미 기준은 아닐 수 있다) MBC는 심했다. 최종 엔딩이 '빛'인 걸 보고, 내가 지금 SMTOWN 콘서트를 보고 있는 건지 연말 시상식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백현이 빛 첫 소절을 부른 건 황홀했다.) 게다가 들어보니 방탄은 1, 2부에 나눠서 중간에만 나오는 바람에 계속 대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엄마는 이 분기탱천할 소식을, 일주일만에 본가에 돌아간 '에리(엑소엘)' 딸에게 쏟아냈다. 화를 낸 건 아니고, 공감을 요하며 약간의 흥분을 섞어 말했다.
"안그래도 팬 애들이 난리야 홍보 영상은 방탄으로 다 찍고, 엔딩은 하나도 안줬다고."

엄마는 어떤 유명한 평론가가 방탄을 도구로 이용해버린 방송사들을 비판하는 글을 이야기하며, 내게 그 글을 읽었는지 물어봤다. 나는 읽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기사는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했다. 엄마는 이제 팬들 사이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근데 너도 그랬잖아, 마지막에 '빛'을 부른 건 좀 심하다고. 진짜 그랬던 것 같아."

"...엄마 근데 그 큐시트 내가 짠 거 아닌데? 왜 엑소팬한테 그러냐! 가서 트위터에서 걔네랑 얘기 해!"

나는 장난섞어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의 손날은 내 머리 10cm 위에서 멈췄다. 아찔했다.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엑소에 거하게 재입덕했고, 이들의 소식을 팔로우하기 위해 트위터에서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다. 계정을 만들며 엄마에게도 하나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카카오톡을 날렸다.


"엄마, 트위터 해?"

"왜?"

"아니, 덕질은 트위터에서 하는 거거든. 엄마도 하나 만들어줄게."

"엄마 아무것도 쓰지는 않아."

...? 응..?

"있기는 있어?"

"있기야 있지ㅋ"

엄마는 아직도 ㅋ을 하나만 쓸 때가 있다. 이것이 비웃는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나도 어려워서 아직 헤메는 트위터를, 엄마도 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미 트위터 계정이 있었다고?"

"그거 뭐 어렵다고. 늙었다고 무시하남ㅋㅋ"


와. 나는 괜히 충격에 빠졌다. 엄마가 트위터를 한다니. 아마도, 몇몇 홈마들을 팔로우하고 방탄의 공식 계정들을 팔로우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아미상받았네 에 마음을 몇 개 찍었는지도 모른다.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나는 이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 집에 가면 나랑 인터뷰 좀 하자. 4050의 방탄소년단 사랑에 대해서 인터뷰하면 재밌을 것 같아"

나는 재밌는 콘텐츠 하나를 건졌단 생각에 신나서 자판을 두들겼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었다.

"근데 나이로 제한해서 덕질하는 거 규정하는 건 좀 그런데 ㅋ 그 나이에 왜 좋아하냐 묻고 싶은 거야? 덕질은 에이지리스 아닌가 싶은데 ㅎㅎ"

ageless. 엄마는 자주 영어단어를 소리나는 대로 쳐서 보낸다.


나는 엄마의 기분이 상했을까 급히 수습했다. 나이로 제한한다기 보다는 어떤 포인트가 좋았는지, 엄마야 남다른 걸 내가 알지만 다른 4050들은 엄마만큼 가요를 많이 듣는 것도 아닐텐데 어떻게 방탄소년단에 빠지게 된 건지 등을 묻고 싶다고 둘러댔다. 기분나빠하지 말라며 히읗과 온점 몇 개를 덧붙이기도 했다. 엄마는 기분나쁜 건 없다며, 다음에 집에 와서 얘기하자고 했다.


백현.jpg 백현

엄마와의 짧지만 굵은 카카오톡이 끝나고 나는 잠깐 숨을 돌리며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무례하고 멍청한 질문을 했던 건지 말이다. 내가 백현의 수많은 순간들을 아끼듯, 엄마도 지민의 수많은 순간들을 아끼는 것 뿐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나이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순수하게(만약 덕질이 순수와 비순수로 나뉠 수 있다면) 그들을 좋아하는 건 엄마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엄마는 지민이 여자친구가 있다고 꽁하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꽁할까? 이것도 물어봐야겠다.)


엄마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방탄의 초기 CD들을 사줘야할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쎄해서 엄마가 최근에 가장 재밌게 봤다고 했던 스타 이즈 본 OST 앨범을 선물했다. (다시 말하지만, 엄마는 브래들리 쿠퍼와 레이디가가부터 방탄소년단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이미 예스24에서 방탄의 옛 앨범들을 모두 주문한 후였다.


역시 내가 너무 엄마를 얕봤던 것 같다. 나도 휴덕 때문에 밀린 엑소 앨범들을 빨리 주문해야겠다. 오늘도 이렇게 엄마에게 배운다. 덕질은 에이지리스고, 나는 엄마의 덕질을 응원한다.
"엄마, 우리 올해 각자 하나씩 하자. 나는 엑소 콘서트를 가고 엄마는 방탄 콘서트를 가자. 한 번 씩은 가보자."

엄마는 별다른 대꾸 없이 웃어 넘겼지만 나는 알고 있다. 티켓팅 날이 오면 우리는 둘 다 피씨방 모니터를 바라보며 손을 떨고 있을 것이다.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서버시간을 바라 보면서.

작가의 이전글창작뮤지컬 [재생불량소년] 리뷰 - 개연성의 중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