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Red Velvet) - Power Up 뜯어보기
작년 여름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 송은 레드벨벳의 '빨간 맛'이었다. '빠빠빨간 맛, 궁금해 허니-'하는 중독성있는 후렴구도 그랬고 레드벨벳 멤버들이 각각 다른 과일로 치환되어 이것이 썬키스트 광고인지 레드벨벳 뮤직비디오인지 헷갈렸던 뮤직비디오도 그랬다.
'빨간 맛' 이후 레드벨벳은 많이 바빴다. 작년 한 해에만 '루키', SM 스테이션 'Would U', '빨간 맛', '피카부'를 발매했으며 올해 2월 'Bad Boy'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다행히 모든 곡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멤버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당시의 라이브를 들어보면 많이 불안하다.
그렇게 다시 일년이 지나고 사상 최악의 여름이 왔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장기마지 맛이 가게 하는 더위와 함께. 1년 내내 심지어 한겨울에도 차트에서 나가지 않던 빨간맛은 여름을 맞아 50위 내, 안정권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Bad Boy' 이후 잠시 음원 발표를 멈춘 레드벨벳은 올해 8월 또 다시 여름을 겨냥한 레드 컨셉의 미니 앨범으로 돌아왔다. 레드벨벳의 여름은 작년과 어떻게 변했을까. 스토리, 음악, 스타일링 세 분야로 뜯어보았다.
빨간 맛에서 멤버들은 각자 다른 과일로 상징된다. 아이린은 수박, 예리는 포도, 조이는 키위, 슬기는 파인애플, 웬디는 오렌지(안은 파랑색)다. 이는 각 멤버에게 주어진 색깔(아이린-빨강, 슬기-노랑, 예리-보라, 조이-초록, 웬디-파랑)과 매치한 과일이다. 멤버들은 각 과일을 인터뷰한다. 그들이 어떻게 한국에 왔고 심지어 누구와 친한지까지도. 이내 과일은 곧 멤버가 되고 둘은 서로 자리를 바꿔 이야기하기도 한다. 빨간 맛은 과일들이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그래서 빨간 맛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과일 그 자체다. 사진만 봐서는 이게 레드벨벳 뮤직비디오의 캡쳐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장면도 있다. 레드벨벳은 가장 생생한 과일을 배경으로 춤을 추며 노래한다. 생경해서 이상하지만 신기하게도 귀엽고 예쁜 이미지다. 흰 배경에 과일만 나온다든지, 물에 빠지는 과일을 비현실적으로 확대한 배경 앞에서 춤을 춘다든지, 처음 보는 방식의 뮤직비디오는 낯설지만 캘리포니아 태양을 잔뜩 받은 오렌지처럼 상큼하고 경쾌하다.
그런 멤버들이 이제는 한 차례 사계절을 겪고 돌아와 더욱 충전된 에너지를 보여준다. 'Power Up'이다. 파워 업에서 레드벨벳은 과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음악이기도 하며 쥬스이기도 하다. 작년 빨간 맛에서 각자(과일 혹은 자신)를 더 알아갔다면 이번에는 그 과일에 꽃을 피우고 과일을 재가공하는 것이다.
멤버들은 컨베이어벨트 위에 각자의 과읠 위 피어난 꽃들을 올려놓는다. 요리조리 돌려도 본다. 키위는 키위 요거트가 되기도 하고 LP판, CD가 되기도 한다. 파인애플을 자르면 그 단면과 닮은 CD 뒷면이 퉁하고 튕겨나온다. 낯선 이미지들을 섞어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기법은 동일하되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다.
과일인 멤버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음악(CD, LP)이라면 멤버인 과일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쥬스다. 각 멤버들의 색이 상징하는 통에서 쥬스가 나오는 것도 그렇고, 멤버들이 빠진 화면 다음 아이린이 컵을 들고 나오면 그 안에 다섯 색의 종이가 돌돌 구겨지는 것도 같은 의미다. 멤버들은 생생한 쥬스를 짜내 땅에 뿌리고, 그 자리에서는 커다란 나무 혹은 줄기 혹은 이파리가 자란다. 크기를 보면 알겠지만 보통 '파워 업'된 식물이 아니다. 과일들은 쥬스의 형태로 다시 땅에 돌아가 새로운 식물을 성장시켰다. 레드벨벳 또한 음악으로 리스너들을 저렇게 '파워 업!'시키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과일은 쥬스가 되었고, 멤버들은 타인에게 에너지를 주는 음악을 하고 있다.
+ 과일이 쥬스 형태가 되면 마셨을 때 더 빨리 혈당이 올라갈 것이므로 이건 파워 업이 맞다. 이런 뜻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레드벨벳은 듀얼 컨셉의 걸그룹이다. 레드 + 벨벳. 강렬한 색상의 레드와 부드러운 느낌의 벨벳이 합쳐져서 두 가지 매력을 동시에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번 컨셉은 (누가 봐도) 레드다. 아예 앨범 제목부터 [Summer Magic]이라고 칭해 여름을 겨낭한 시즌 앨범임을 알리고 있다. '통통 튀는 8비트 게임 소스와 귀여운 훅이 매력적인 중독성 강한 업템포 팝 댄스곡'이라는 소개를 단순히 줄이자면 '귀여운 곡'이다. 미니언즈를 연상케하는 노란색과 파란색의 옷, '빠-빠나나 빱빠-빠나나나나'부터, SNS로 공개한 포인트 안무 '아기 상어 춤'까지 전부 귀여움으로 중무장했다.
이런 컨셉이 먹히려면 컨셉은 귀여운 와중 음악은 '좋아야'한다. 구체적으로 이 곡이 좋은 이유는, 첫째로 뿅뿅 게임 사운드가 곡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픽셀로 구성된 8비트 게임을 연상시키는 기본 비트와 '빱-빠나나' 훅에 들어가기 전 효과음 등은 레드벨벳을 캐릭터화시키고 이들이 줄 수 있는 힘을 강화시킨다. 넘치는 에너지는 마구 해맑은 게임 속 캐릭터라는 컨셉을 통해 해석되기 때문이다. 레드벨벳이 주는 이미지는 무척 밝고 명랑해서 현실이라기보다는 게임 속 이미지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또 하나의 강점은 이 곡이 가진 베이스의 힘이다. 'Power Up'은 조악한 노트북 스피커로 작게 들었을 때와 베이스가 풍부한 스피커 혹은 이어폰으로 들었을 때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처음에는 통통 튀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면 이어폰으로는 곡을 힘있게 밀어붙이는 베이스가 들린다. 디스토션(지지직)이 섞인 일렉트릭 베이스는 첫 후렴구 이후 곡을 지탱하면서 일렉트릭 댄스 팝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시킨다.
특히 베이스가 강조되는 파트는 역시 두번째 후렴구 이후에 나오는 랩 파트! 두웅-웅 울리는 808베이스의 느낌을 살려 템포는 느려지지 않지만 한껏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몇 마디 가지 않고 금세 뾰로로롱 하는 효과음과 함께 원래의 색을 되찾기는 하지만 이 잠깐의 여유가 리스너가 지치지 않을 틈을 준다. 정말 매력적인 부분이다.
평소 애정하는 iZE 매거진에서 박희아 기자님은 레드벨벳에 대해 '새로우면서도 예쁘고 신기한 이미지들'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에 더없이 공감한다. 앞서 서술한 빨간 맛의 혁신적인 생과일 배경부터 'Power Up'의 파인애플 단면과 CD의 연결고리까지, 레드벨벳은 새롭고 낯선 이미지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스타일링만으로도 '아 이건 레드벨벳같아!'라는 말을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눈에 띄었던 점은 미니언즈 레퍼런스, 오버사이즈 이어링의 언밸런스 매치, 도형의 변형적 사용이다. 먼저 미니언즈 레퍼런스는 뮤비를 시작하자마자 알 수 있다. 미니언즈의 노랑과 파랑 그리고 바나나송, 레드벨벳의 의상 속 노랑과 파랑 그리고 '빱빠나나'는 대놓고 미니언즈를 어필한다.
언밸런스 오버사이즈 이어링은 '짝이 안맞는 엄청 큰 귀걸이'다. 괜히 영어로 말해봤다. 이번 뮤비 전반적으로 통일된 스타일링인데 주로 엄청 큰 꽃 혹은 기하학적 모양의 볼드한 귀걸이를 한 쪽에만 매치하는 것이다. 오버사이즈 이어링이 유행이 된지는 꽤 되었지만 레드벨벳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큰 귀걸이를 사용하되 다만 부담스럽지 않게 한 쪽을 빼버리기도 하는 과감함을 선보이는 것이다. 멋져!
도형의 변형적 사용은 파인애플 단면이 CD가 되거나, 테이블이 녹아내리는 등의 사용이다. 과일의 변형은 앞서 충분히 언급한 것 같아 사진으로 대신한다. 그 외에도 채도가 높은 파스텔 톤(파스텔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색도 아닌)의 사용, 아이라인보다는 섀도우와 마스카라가 강조된 눈화장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전반적으로 조금 비현실적이고 캐릭터같은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들의 에너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도록!
SM, YG, JYP는 레드벨벳, 블랙핑크, 트와이스로 다시 한 번 1:1:1 비교가 가능해졌다. 각자의 매력은 아이즈의 기사에서 잘 분석해두었으니 참고해도 좋다. 내게 3사의 인상은 색깔이 가장 확실한 곳(YG), 걸그룹을 가장 잘 만드는 곳(JYP), 그리고 가장 도전적인 곳(SM)이다. 그러니 레드벨벳은 가장 실험적인 컨셉을 시도하는 걸그룹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험'이라는 단어는 멤버들에게서 주체성을 지나치게 앗아가는 느낌이라 '도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한다.
레드벨벳 멤버들은 레드와 벨벳의 컨셉에 따라 표정 연기와 춤선, 음색에 서린 메세지까지 변화시킨다. SM은 실험적인 이미지와 사운드로 대중들에게 새로운 레드벨벳을 선보인다. 멤버들의 능력과 회사의 기획력이 만나 레드벨벳의 결과물은 거의 모든 경우 기대를 충족시켰다. 기분좋은 놀라움 덕분에 레드벨벳의 음악은 매번 기대하게 된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발매 시기다. 이제 더위 타령은 꽤 식상해진 느낌이다. 물론 여전히 날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덥지만 우린 7월 중순부터 덥다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이다. 이제 와서 녹아내리는 이미지들은 더이상 비현실이 아닌 현실이랄까. 그러니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제 나왔어!
사실, 8월 중순까지는 계속 더울 것이라고 하고, 경험상 9월까지 내내 더웠으므로 크게 상관은 없다. 슬슬 트와이스의 노래도 너무 많이 들은 차였다. 남은 여름은 파워 업, 너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