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여행] 인도 아그라
"핀! 일어나 봐 얼른!"
반쯤 눈을 떠보니 열차 안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몸을 일으킬 힘은 이미 침대 시트로 빨려 들어가 버린 지 오래. 여느 하루보다 대단히 긴 날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위층에 누운 친구는 이미 단잠에 빠져 소리 내며 코를 골았다. 3층 침대칸 열차, 우리는 고락푸르에서 아그라로 향하고 있었다.
해가 진 후,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던 사람들을 어디론가 몰아내고 의자를 침대로 만들어준 건 샤룩이라는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었다. 그와 나는 고락푸르 정션역에서 만났다.
그날 오후 2시경의 고락푸르역. 기차는 제 시간이 지나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 같아 보였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빈자리에 천 조각이나 짐 보따리를 깔고 누워있는 태평한 자태가 그저 잠시 쉬었다 가는 사람들의 모양새였다. 널찍한 땅 덩어리를 자랑하듯 기차는 끊임없이 플랫폼으로 들어왔다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과 도착한 이들이 목적지로 향하는 분주한 발걸음이 얽혀 뿜어내는 그 활기가 좋았다.
다만 기차역의 한 구석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의 장면들은 참담했다. 짐칸에서 오물과 뒤섞여 잠을 청하는 하층 계급민, 헤지고 구멍 난 옷을 입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남자 아이들, 내 손에 들린 머리 고무줄보다 사모사(인도 전통 간식) 한 입을 아쉬워하며 '머니, 달러'를 속삭이는 맨발의 여자 아이들... 낯이 설고 비통한 장면 앞에서 동정심 따위만을 느껴서는 안 되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었다.
삽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 기차 선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종의 도피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어느 순간 낯선 목소리가 실려오는 것을 알아챘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에 샤룩이 있었다.
"안녕, 어디서 왔어?"
"코리아, 넌?"
"난 럭나우에서 왔어. 너 울고 있는 거니?"
샤룩과 통성명을 하고 잡담을 나누었다. 우리가 기다리던 기차는 세 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했다. 열차에 탑승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또한 잠시뿐 어수선한 사람들의 무리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찾아가니 3인용 좌석에는 다섯 개의 엉덩이가 보란 듯이 버티고 있었다. 그때 샤룩은 내 손에서 티켓을 가져가 나와 내 친구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해 앳된 얼굴을 한 그가 초점 없는 눈으로 열심히 빈랑을 씹는 건장한 무리를 몰아냈다. 그렇지만 샤룩도 엉덩이 다섯 개를 세 개로 만들 재간은 없었다. 기차 안의 사람들은 살갗을 맞대고 공기를 나눠 마시며 필요치 않은 온기와 땀방울을 섞어댔다. 나와 내 친구도 그곳에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야리야리했던 샤룩은 우리의 방패막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바탕 히즈라(인도의 트랜스젠더. 기차 안에서 협박에 가까운 수위로 구걸을 함.)들이 휩쓸고 간 다음에도 우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후에 히즈라가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그때 그가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열차 안은 두 명의 생소한 여자들을 향한 수십 개의 눈동자들로 득시글거렸으니...
"핀! 얼른 창밖을 봐."
샤룩이 포기하지 않고 나를 흔들어 깨워댔다.
"여긴 럭나우야. 나의 고향. 난 이제 곧 내려야 해."
땀에 젖은 살갗이 가죽 시트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꽤나 불쾌했다. 태양의 기세가 꺾인 깊은 밤에도 기차간은 열기로 가득했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검은 먼지와 눅눅한 습기 냄새가 짙었다. 차가운 물에 온 몸을 던지는 상상이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차라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인도, 그리고 여름 복판의 슬리핑 객차 칸은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봐, 저기 보이지? 아그라보다 럭나우가 훨씬 더 아름다워. 아그라에는 타지마할 밖에 없다니까!"
창밖으로는 이국적인 건축물이 노릇한 조명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샤룩은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럭나우를 지나쳐 아그라로 향하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그라에는 타지마할 밖에 없고 자기의 고향, 럭나우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 그는 끝까지 아그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멈추려 애썼다.
"샤룩, 언젠가 내가 다시 인도에 오게 된다면 그땐 꼭 럭나우에 올게. 너가 가이드 해주면 되겠다. 그치?"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차가 승강장에 진입하자 샤룩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샤룩과 마지막으로 손을 흔든 후 침낭 속으로 몸을 욱여넣고 스르르 단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수평선 위로 머리를 내민 지 얼마 되지 않아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땀에 절은 채로 눈을 뜨니 잠들며 잊었던 불쾌함이 갑절로 느껴졌다. 일층 침대 사이뿐 아니라 복도 바닥에는 자리를 깔고 드러누운 사람들로 빽빽했다. 다섯 개의 엉덩이가 세 사람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나머지 두 사람의 침대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기차 안에 있던 다른 이들의 지난밤이 머릿 속에 그려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른 아침 아그라 역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에어컨이 나오는 비교적 값비싼 숙소에 짐을 풀고 검은 먼지와 묵은 땀을 씻어냈다.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니 천국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나 싶다. 낮잠에 빠지려는 순간,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타지마할을 보러 가자."
숙소에서 늘어져있던 잠깐의 시간 동안, 험난했던 지난 하루는 깡그리 사라지고 타지마할의 웅장함과 그 찬란함을 기대하는 마음만 남았다. '타지마할을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설레는 마음에 타지마할 입구까지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서 엷은 소름이 돋았던 것도 같다.
"다시 인도에 가게 된다면 그건 아마 타지마할 때문일 거야"
옛 친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아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타지마할이었다. 랜드마크를 찍는 여행을 지양하다 보니 샤룩의 말처럼 타지마할 밖에 없는 아그라는 건너뛰어도 될 법한 동네였지만, 애정하는 사람의 확신에 찬 문장을 언제 올지 모를 다음 기회로 미뤄두기는 어려웠다.
750루피. 당시 환율로 한화 약 15,000 원을 주고 표를 샀다. 외국인 관광객보다는 현지인 관광객들이 더 많았다. 소지품 검사를 받고 출입구를 통과하니 저 멀리 타지마할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인다. 흐리고 뿌연 하늘이 연회색에 가까워 하늘과 타지마할의 경계선이 불분명한 날이었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맛보기 위해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조급함에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꼈다. 정면에서 오랫동안 타지마할을 음미한 후,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며 타지마할의 옆모습과 뒷모습, 내부까지 샅샅이 들여다봤다.
그런데 무덤 안까지 들여다 보고 밖으로 나와 계단에 걸터 앉으니 왠지 모를 허무감이 밀려왔다.
한 사람을 위한 사랑, 그 사랑이 만들어낸 무덤, 역사가 담긴 고귀한 건축 양식... 그러나 그 이면에는 22년 동안 매일 같이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쇼트와 쇼트가 충돌하여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뜻의 몽타주 이론처럼, '고락푸르역-슬리핑 기차 객실-타지마할'로 이어져 온 이미지 때문일까. 나의 타지마할은 타지마할 만의 의미를 갖는 것을 거부하고 자꾸만 고락푸르역과 슬리핑 객실의 얼굴들을 불러냈다. 그렇다면, 고락푸르역에서 내게 들이닥쳤던 눈물은 동정심이 아니라 어떤 분노였던 게 아닐까.
인도를 여행하며 시종일관 불편했던 건 가난과 빈곤으로 인해 존엄성이 훼손되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여행의 즐거움과 유희,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의 틈 사이로 이따금씩 밀고 들어오는 그들의 낯선 일상이 좀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화가 났다.
내 안에서 점점 자라난 분노는 무능한 인도 정부와 무심한 기득권 세력들을 거쳐 종국에는 나에게로 닿아 크나큰 부채감을 남겼다. 지난밤, '내 자리'를 침범한 사람들을 마땅히 몰아낼 수 있다고 여겼던 마음은 내 돈으로 기차표를 구입했기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의 지난한 궁핍에 추호의 관심도 갖지 않았던 건, 내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너무도 난폭했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머릿속을 맴도는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땐 다채로운 색깔의 사리를 입은 무리들이 보였다. 희끄무레한 타지마할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알. 록. 달. 록. 했다. 저마다 훗날 추억이 될 사진을 남기느라 바빴고, 어린아이들은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마치 타지마할이 그들의 놀이터인 것처럼, 자기가 타지마할의 주인이라도 된 냥.
경건하고 아름다워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가장 순전한 발을 딛는 사람들. 그때 내 눈에 비친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까지나 해답을 찾을 수 없고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해도, 나만큼은 그들 편에 선 사람이고 싶다. 내가 그들이고 또한 그들이 나이기를... 소박한 유쾌함이 깃든 그 얼굴들 사이사이로, 기분 좋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