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29) 강석경 장편소설 《미불(米佛)》(민음사, 2004)
소설의 주인공 이평조는 채색화가다. 그 시절 화가를 꿈꾼 이들이 그랬듯, 이평조는 일본 도쿄로 유학 가서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채색화를 배웠다. 한때 비구가 되려고 절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그는 끝내 화가가 될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나중에 스님이 그에게 미불(米佛)이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나는 버러지처럼 자기 본성에 순응하며 여자를 사랑하고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 미불로 살아갈 뿐이다.”
이평조는 일찍부터 산수화에 흥미가 없었다. 먹으로 그린 전통적인 그림은 아무런 감동도, 자극도 주지 않았다.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이평조는 20세기 작가라면 전통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가 리커란(李可染, 1907~1989)을 가슴 깊이 존경했다.
하늘 아래 최고라는, 계림을 즐겨 그렸던 이가염(李可染)이 위대한 이유는 중국의 유구한 전통화를 현대화시켰다는 데 있다. 중국 전통 회화와 함께 서양화를 공부했던 이가염은 사생에서 먼저 “풍부, 풍부, 풍부함”을 추구하고 그 다음엔 “단순, 단순, 단순함”을 추구하라고 했다. 풍부함의 추구란 중국 전통 산수의 특징인 지나친 여백의 사용을 극복하라는 뜻인데, 이가염은 산수를 그릴 때 왕왕 산꼭대기를 하늘 끝까지 그려서 장법(章法; 구성법)에서 피하는 바를 범하고 말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리장(離江) 그림이 있는가.
한국화라고 하면 으레 수묵화가 전부인 것처럼 여겼다. 이평조는 고구려 고분 벽화, 고려 불화, 민화의 자유분방한 색채에 매혹됐다. 날고기같이 생생하고 무궁무진한 세계. 자기만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남이 싫어하는 개성적인 그림을. 색을 두껍게 올리려면 종이가 얇아선 안 된다. 그래서 채색화에는 주로 두꺼운 장지나 여러 겹 배접한 종이를 쓴다.
이평조는 배접하지 않은 순지를 썼다. 한지가 젖으면 자연스럽게 요철이 형성되면서 물감이 고여 뭉치기도 하고 엷게 얼룩지면서 의도하지 않은 회화성을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배운 때로부터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도록 이평조는 채색을 버린 적이 없다. 해방 이후 채색화를 왜색(倭色)이라며 거세게 배척하는 척색(斥色) 사조가 화단을 휩쓸 때도 이평조는 색을 버리지 않았다. 스승이 일본인이었지만, 스승을 부정한 적도 없었다.
내게 있어 색채와의 교감은 본능에 가깝다. 함박 피어난 모란 앞에서 요기마저 느껴지는 심연의 색에 넋을 잃고, 추수를 앞둔 금빛 들판을 걷노라면 그 풍요로운 통합의 색채에 오체투지하고 싶다. 길을 다가 문득 숯불처럼 타오르는 노을과 마주치면 내 몸이 까마귀가 되어서라도 하늘에 닿고 싶고, 절에 가서 빛바랜 옥빛 문살을 보면 저승의 정적을 감지하며 지친 다리를 편다. 각기 생명을 발열하는 듯한 색채들은 나의 감성을 건드리며 영혼을 뒤흔들고, 나는 현실이 아닌 색의 영상들 속에서 어느 땐 억제된 격정을 투사하고 어느 땐 사색에 빠지기도 한다.
삼십 년 넘도록 화가로 살아왔지만, 이렇다 하게 이뤄놓은 것이 없었다. 돌아보니 깊은 회의가 밀려들었다. 달라지기 위해선 환경을 바꿔야 했다. 이평조는 언어학을 공부하러 간 딸을 따라 인도에 가기로 결심한다. 갠지스강이 지척에 있는 인도 바라나시에서, 낯선 이국의 환경과 풍습 속에서, 달라진 날씨와 공기 속에서 이평조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악어도 그리고, 소도 그린다. 다시, 리커란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먹으로 소 그림을 그리니 소를 즐겨 그리는 이가염이 생각났다. 소의 우직함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당호를 사우당(師牛堂)이라 지었지. 형태를 좋아하여 그리다가 소에 대한 관념까지 얻었겠지만 먹 하나로 물소를 이토록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사생하지 않고 즉흥으로 그린 듯 야성적이지만 어디 한 군데도 넘침이 없는 먹의 농담은 천의무봉의 경지라 할 만하다. 붉은 낙엽이 휘날리는 나무 아래 소를 타고 가는 소년이라든가, 멋대로 붓을 휘두른 것 같지만 발과 꼬리가 더없이 힘찬 투우로라든가 물소가 있는 몇 점의 그림은 나를 승복하게 만들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붉은 낙엽 아래 두 마리 소가 앉아 있는 이가염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그렸는데, 경애심으로 그의 스타일을 따른 것이다. 나와는 길이 다르지만 그가 평생 추구한 먹의 세계를 존경하였다. 그의 붓은 먹의 심연을 자유자재로 헤매고 다니는 물고기 같았다. 이가염은 내가 귀국한 다음 해인 1989년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나는 진작 이 대가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이평조의 그림은 인도에서 극적으로 달라진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건 내가 한국의 채색화가 조풍류의 삶과 예술을 다룬 책 《풍류, 그림》(아트레이크, 2025)을 쓰면서 화가와 나눈 대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환경을 바꾼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갱이 타히티에 가지 않았다면, 반고흐가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고갱과 반고흐가 있었을까.
내가 인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비가 되지 못한 채 미숙의 번데기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한국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오백 년 수묵의 그늘에 가린 채 모래밭을 헤매다 낭인으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나는 생의 계시나 받은 듯 칠순에 홀연히 한국 땅을 떠났고, 인도에서 색채를 재발견하고 링검의 에너지를 받아 창조의 잎사귀들을 피웠다. 인도에서의 삼 년이란 세월은 다른 사람의 삼십 년 세월과 맞먹을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내 인생의 절정이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인도와의 만남으로 화가 이평조는 부활했고 한국 화단은 찬란한 진채를 얻었으니.
이평조는 인도에서 새로운 예술적 자양분을 듬뿍 흡수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화면을 원색으로 채웠다. 그럼으로써 먹(墨)에 대한 부담을 보란 듯이 털어냈다. 3년의 인도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평조의 그림은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남들은 감히 변화조차 꿈꾸지 못할 70대 나이에 이룬 극적인 변신이었다.
특히 인도에서 돌아온 뒤로 이평조는 분채 물감 가운데 유독 파란 군청을 즐겨 썼다. 색채의 역사에서 파랑의 존재는 신비로운 지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이었고, 왕의 지엄을 드러내는 색이었으며, 먹이 아닌 채색 물감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심연의 깊이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궁극의 색이었다. 같은 파랑처럼 보여도 화가마다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파랑으로 독보적인 색채의 경지를 이룬 화가들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일본 채색화의 거장 히라야마 이쿠오의 파랑은 ‘히라야마 블루’, 데이비드 호크니의 파랑은 ‘호크니 블루’라 부른다. 채색화가 조풍류의 파랑은 ‘풍류 블루’다. 파랑은 화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색이다.
깊이 모를 바다 속 빛깔, 가장 비싼 물감이었다는 울트라 마린이 ‘바다 건너편’이란 뜻이라지. 재료인 청금석의 원산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먼 바다 빛. 어둠을 밀어내면서 열리는 청정한 새벽 하늘빛, 온갖 욕망으로 얼크러진 가슴도 이 무한의 느낌을 주는 청색을 마주하면 정화되는 것 같다. 이 신성한 색채를 염원했던 인류는 오래전부터 햇볕에 잘 바래지 않는 파랑 색소, 인디고를 사용했다. 시간을 ‘영원히 지속하는 파란 것’이라 불렀던 이집트인들으 인디고 블루로 염색한 천으로 미라를 감았다는데 파랑의 정기라면 시선의 부패조차 막지 않을까.
루이 14세 당시 파랑이 궁정에서 유행하자 가장 아름다운 파랑에 ‘왕의 파랑’이란 이름을 붙였다는데 내가 즐겨 쓰는 군청에 ‘이평조의 파랑’이라 이름을 붙이겠다. 누구도 나처럼 화선지에 강렬한 군청을 쓰지 않았으니 특허를 받아도 되지 않을까.
일본 우키요에의 거장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90살까지 장수했지만,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늘이 나에게 십 년 더 목숨을 주었다면 진정한 화공이 되었을 텐데.” 80살까지 그린 그림을 습작이라고 했을 정도이니 생의 만년에 비로소 그림의 도(道)에 눈을 뜬 노 거장의 고백은 ‘예술을 향한 열정’ 말고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평조는 식도암 선고를 받는다. 암 투병 속에서 꽃피운 예술혼. 이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좋은가. 전시회는 대성황이었고, 언론은 앞다퉈 노화가의 새로운 예술을 상찬했다. 이름도, 작품도 못 남기고 조용히 사라지는 화가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늘그막에 비로소 자기 예술을 세상에 내보이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평조는 진정 행복한 예술가였다.
오랜만에 소설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읽어 내려갔다. 책을 쓰려고 채색화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강석경의 장편소설 《미불》이 화가 박생광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채색화에 관한 내용은 박생광의 예술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소설가 강석경은 미술대학 출신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더 풍성하다. 미술을 소재로 한 소설이 드문 우리 문학계에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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