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것이 빛나지 않을 리 없다.

<슬픔의 비의> 리뷰1

by 김숲

집에 고래를 들고 온 적이 있다. 책방에서 일할 때 고래를 좋아해서 ‘고래’라는 닉네임을 썼는데, 하루는 옆집 할머니께서 “고래 씨 내가 줄게 있어요.” 하시며 수줍게 손에 뭔갈 쥐어주셨다. “내가 밭에 있다가 이거 보고 고래 씨가 생각나서” 손에 들린 건 손바닥 만한 돌이었다. 자세히 보니 돌 위에 흰 선이 고래 같기도 했다. 선물로 돌을 받다니! 돌을 받고 기분이 좋다니! 집에 들고 가 열심히 닦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이 돌은 다른 사람한테는 돌, 내게는 한 마리 고래다.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책 <슬픔의 비의> 마지막 장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에 대해 언급한다. 양적인 것은 서점에 높게 쌓여 있는 책, 떨어뜨려도 다시 주문할 수 있는 커피와 같이 잃어버린다고 해도 비용으로 다시 구매할 수 있다. 반면 질적인 것은 읽은 책, 가방에 넣어 다녔던 책, 여기저기 표시하고 메모한 책과 같다. 질적인 것을 잃어버렸을 땐 비용을 주고 다시 살 수 없다. 잃어버린 것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과 시간이기 때문이다. 에이스케는 한국 독자들에게 자신의 책을 친구처럼 대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책이 빨리 읽지 않아도 좋으니 하나밖에 없는 질적인 것으로 남길 희망한다.


p.173 한국의 독자들에게

<질적>이라는 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 분명하다. 그것은 고유한 것, 그리고 반복이 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은 질적인 것을 소유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일뿐이다.


<슬픔의 비의>에는 그가 질적으로 만난 경험이 담겨있다. 먼저 활자 이면의 것을 발견하는 질적인 읽기에 대해 말한다. 읽기는 고심하는 작가, 행간에 숨겨진 의미,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말’과 만나는 행위다. 내 안에 있는 말은 평소엔 알아채기 힘들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 말은 숨어있으며, 오직 읽는 행위를 통해서만 길어 올릴 수 있다. 책을 읽다가 유독 시선을 끄는 한 문장에 전율을 느끼거나, 노트에 옮겨 적고 가만히 읊조려보았다면 그것은 내 안에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던 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읽기는 창조적인 행위다. 작가가 쓴 글이 내게 잠재된 말을 만나 수많은 의미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현재’라는 돌아올 수 없는 찰나에 만들어지기에 더욱 소중하다. 이로써 어떤 이는 위로를, 어떤 이는 구원을 얻는다.


저자는 질적 만남을 슬픔까지 확대한다. 슬픔이 주는 고통에 집중하면 슬픔은 지워버리고 극복해야 할 감정이지만,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면 슬픔으로만 만날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한다. 상실로 인한 슬픔은 이별의 대상을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만든다. 슬픔을 느끼기에 대상이 눈 앞에 없어도 함께 있음을 느낀다. 오히려 슬픔이 있기에 그를 사랑할 수 있다. 이로써 슬픔을 피하지 않고 짊어질 용기가 생긴다. 이 용기가 없다면 남에게서 분주히 위로를 구한 들 이해받지 못한다고만 느낀다. 반면 슬픔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은 타인의 작은 눈짓에도 위로를 받는다. 위로는 결국 슬픔 속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나’의 소리를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적인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가?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무지의 자각’에서 온다. 정보를 쉽게 접하는 현대인은 무엇이든 알거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자 하는 대상 앞에서 진지한 물음을 던지거나 그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피한다. 아는 행위에서 ‘속도’가 같은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아는 것보다 빨리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p. 29 끝을 알 수 없는 '무지'

무엇인가에 대해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마음속에 무지의 방을 만들어야 한다. '알았다'라고 생각한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탐구를 계속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지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휘발한다. 반면 ‘모른다’, ‘모를 수 있다’에서 시작한 탐구는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은 관심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만든다. 소중히 여기면 특별해진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양적인 것을 질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딱 떨어지지 않는 답을 더듬고 질문하는 일은 두렵기까지 하다. 불확실성 위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두렵기에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람을 사귀는 것과 비슷하게 그 용기의 대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롭다.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으로,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변하는 것. 책뿐이겠는가. 슬픔뿐이겠는가. 인생의 숨겨진 비의는 이토록 투박하다.


p. 47 용기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답변에 안주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진정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면 내면의 용기를 잃어버린다.


아무리

미세한 빛일지라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안목을 기르기 위한

어둠

- 이와사키 와타루 <빛>


슬픔의 비의 / 와카마쓰 에이스케 /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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