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선물> 리뷰 1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선물을 사게 되었다’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책 <말의 선물>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남과 겹칠 수도 있고 언젠가 낡기 마련인 선물을 사기보다는 ‘말의 선물’을 보낼 것을 작가는 제안한다. 말은 대상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심지어 세상을 떠났다 해도 보낼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도 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만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는 ‘말’은 음성이나 글로써 존재하기 이전의 말이다.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말을 뜻한다. 말 한마디로 위로를 얻어 그 말을 붙들고 힘을 낸 사람, 칭찬 한 마디로 콤플렉스를 벗어나 자신감을 얻은 사람, 빽빽한 글자가 가득한 책에서 유독 빛나는 한 문장에 멈춰서 본 사람들이 만나온 사적인 말 말이다. 인간은 이런 ‘말’을 갈망하는 존재라고 작가는 믿는다.
눈을 겨우 뜬 아침부터, 졸린 눈을 끔뻑이며 잠을 미루는 밤까지, 말에 둘러싸여 산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서 부지런히 텍스트를 흡수한다. 좋아하는 글에 하트를 누르고 ‘나중에 읽어야지’ 캡처하고 언젠가 구독을 신청했던 기업으로부터 뉴스레터를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만난 수많은 말 중 기억의 망에 걸러져 남는 말은 거의 없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말, 마음까지 닿지 못하고 눈에서 휘발되어 버리는 말, 손가락으로 바쁘게 넘겨버린 말을 과연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 현대인이 ‘말’을 잃어 간다.
p. 51 쓰디쓴 말
어떤 책을 읽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읽는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읽을까 하는 문제도, 읽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실감하는 일에 비하면 2차적인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인인 우리는 무엇을, 또는 어떻게, 라는 것만 생각하며, 읽는다는 행위를 얼마나 실감할 수 있는지는 거의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말을 찾는 일은 뿌리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땅에 박힌 뿌리를 찾듯이 깊이 나의 내면을 파는 일이다. 멀리 넓게 보려 했던 시선을 좁게 다듬어 나를 비추는 일이다.
p.17 뿌리를 찾는다
사람은, 뿌리가 필요한데 꽃을 모을 때가 있다. 열매를 얻으려고 기를 쓰는 일도 있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 지쳐가는 일도 흔한 것 같다. 그리고 꽃을 손에 넣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자기 손에 열매가 없는 현실에 낙담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뿌리에 닿고 싶으면 멀리 찾으러 가선 안 된다. 그 힘을 파는 데 쏟아야 한다. 우리를 깊이 치유해줄 식물은 인생의 숲, 그것도 땅속에 숨어 있다. 별로 눈에 띄지 않으니 그저 지나칠 뿐이다. 꽃이나 열매를 손에 든 채 대지를 팔 수는 없다. 그것을 일단 옆에 두고 파지 않으면 뿌리에 다가갈 수 없다.
꽃이나 열매는 때로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다. 하지만 뿌리는 늘 우리 발 밑에 있다.
에이스케가 말한 말을 찾는 노력은 씨앗을 빨리 키워 열매를 먹는 행위라기보다는 씨앗을 기르는 일 자체이다. 이는 삶의 정답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말한다. 성공으로 이끄는 금 같은 말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말과 사귀고 그 속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나 공간에 머무는 것 같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고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인생에 물음표를 만들며 시간을 지체해야 ‘말’을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소리나 글로 만난 한 마디 ‘말’이 그토록 반가운 것은 이 때문이다.
p. 142 말의 씨앗
말은 때로 씨앗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바람에 날려 찾아오기도 하고, 새 같은 작은 동물이 날라 오기도 하고, 사람이 건네주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작아서 주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고 만다. 그것을 땅에 심고 키워야 한다.
간단한 말이라면 외우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키우기는 그리 쉽지 않다. 농업과도 비슷해서 시행착오와 인내가 요구된다. 농부가 날씨를 거스르지 않는 것처럼, 말을 키울 때도 마음의 날씨를 무시할 수 없다. 화창한 날도 있지만 구름 낀 날도, 비 오는 날도 있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이 없으면 흙이 바싹 말라버리듯 말도 말라버린다.
씨앗은 햇빛과 물을 주어야 변모한다.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말에서의 대지는 우리의 마음이고, 햇빛은 시간이며, 물은 남모르게 흘려온 눈물이다.
<말의 선물>을 읽으며 나도 ‘말’을 만났다. 입에 넣고 한참을 사탕처럼 굴려보다 펜으로 적어본다.
한 컵의 설탕물을 만들려고 한다. 그럴 때 사람은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 앙리 베르송, <사유와 운동>
당연한 말에서 진리를 길어 올리기까지 철학자가 기다려온 시간을 가늠해본다. 그의 문장을 한 일본 작가가 마음에 담고 자신의 책에 인용하기까지의 시간,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책을 통해 이 문장을 만나 노트에 조심히 옮겨 적은 나의 시간을 선물처럼 담아 그대에게 보낸다.
- 말의 선물 / 와카마쓰 에이스케 / 송태욱 옮김 / 저녁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