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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May 06. 2019

부대끼는 날에는 반주합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반주

점심시간 10분은 나를 다정하게 만들기도 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여유가 있는 날에는 “봄이다” 하며 라일락 향기를 맡고, 미운 사람에게 커피 한 잔을 사준다. 반차 쓰기 딱 좋은 날이라며 지하철 입구를 서성거리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밥을 먹자마자 사무실로 간다. 그런 날에는 꼭 속이 부대낀다.     


부대끼는 날에는 느린 음식을 먹는다.

오늘 나의 식사 시간은 가게 문이 닫을 때까지다. ‘이곳’은 일본 가정식 요리를 판다. 점심이면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저녁에는 한적하다. 빈 그릇이 그대로 놓인 테이블에 앉아 기다릴 일도, 우리보다 늦게 온 테이블에 음식이 먼저 나올까 곤두설 필요도 없다. 음식이 빨리 나오는 편도 아니라 여유로울 때 가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여유를 찾고 싶은 게 아니라,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때. 사장님은 일본 요리책을 한 장 한 장 번역해가며 레시피를 익힌다. 음식도 의미를 되새기듯이 꼭꼭 씹어 먹어야겠다.    


이곳은 매일 새로운 맥주를 들여온다. 사장님은 맥주 전용 칠판 메뉴판을 만들었고, 그마저도 깜빡하고 적지 않는 날에는 직접 맥주를 추천해준다. 스테이크 덮밥, 새우 파스타, 오키나와 생맥주, 이름 모를 스파클링 맥주도 주문한다. 빨리 달라는 말보다 맛있게 해 달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리고 "맥주 먼저 주세요".


맥주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어떤 날에 마셔도 좋은데 전용 잔에 따라 마셨을 때는 더 좋을 수밖에. 잔을 기울여 따라도, 바닥에 놓고 단번에 따라도, 전용 잔에는 맥주 한 병이 그대로 담긴다. 오늘 주문한 스파클링 맥주는 얼핏 샴페인 같다. 한 입 마시면 로즈마리 향이 먼저 끼치고, 어금니께에 단맛이 돈다. 초콜릿은 좋아하지만 단 맥주는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기분 좋게 달다.


스파클링 맥주와 오키나와 생맥주를 번갈아 마신다. 단짠단짠 아니, 단쌉단쌉의 조화를 추구한다.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는 걸 좋아한다. 오늘은 좋아하는 걸 하기보다 좋아하는 걸 만들어보려고 한다. 느린 음식을 기다리면서 저녁을 음미해줘야지. 내일 출근한다는 핑계로 딱 한 병만 시켜서 아껴 먹도록 하자.


꼭꼭 씹다가 맥주 한 모금으로 입가심하면 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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