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가 가계부를 잘 쓰는 이유
파도를 타자
건설회사 설계 직군에서 근무하면서 쌀밥을 채운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입사 이후 첫 월급은 부모님께 드리고 이후 3개월 차 월급부터는 스스로 가계부를 쓰며 관리했다. 그러니 가계부를 쓴 지도 10년이 넘은 셈이다.
가계부를 쓰는 일은 때로는 귀찮기도 하고 두통을 유발하기도 해서 누가 나 대신 써줬으면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쉽게 쓸까 스스로 연구하기도 하고 가계부를 쓰는 다른 이들의 지혜를 엿보기도 하며 10년이라는 세월을 통과했다.
최대한 단순하게 가계부를 쓰기 위해서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파도 위에 올라타야 한다. 돈의 흐름이란 파도 같아서 바라보고만 있다가는 어느 방향으로 얼만큼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서핑보드 위에 올라타서 파도를 직접 느끼며 물살의 양과 흐름의 방향을 인지해야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듯이, 가계부도 돈이 흘러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그때 그때 써야 한다.
이를테면 닭가슴살 지출내역을 적을 때 말이다. 손에 움켜쥔 모래알이 흩어지듯 카드 결제의 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위메프에서 닭가슴살 3킬로를 만 삼천 원에 결제한 기억은 뇌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이 내역을 쓰기 위해서는 다시 가계부와 위메프를 접속해서 위메프의 결제 정보를 가계부로 옮겨야 한다. 만약 그 순간 내 손의 피부와도 같은 스마트폰을 쥐고 양엄지손가락으로 가계부 어플에 "위메프 닭가슴살 / 13000원 / 우리카드" 라고 힘차게 입력했더라면, 가계부와 위메프를 연결하거나 가계부와 카드사 어플을 켜고 들여다보는 손가락 품을 줄일 수 있다.
예시 : Utility Consumption Summary공정 설계 엔지니어가 작성하는 문서 중 '유틸리티 서머리'라는 문서가 있다. 공장에서 사용하는 물이나 공기 혹은 가스 등의 사용량을 더하거나 빼서 "In - Out = 0" 이 되도록 하는 문서다.
운전원이 손이나 눈을 씻을 때 쓰는 물, 안전화에 끼인 먼지를 털어낼 때 쓰는 공기, 공장 내 실험실이나 빌딩에서 쓰이는 물, 밸브를 구동하기 위해 쓰이는 건조한 공기 (밸브용) 등 공장 전반에서 쓰이는 모든 유틸리티의 내역들이 그 속에 포함된다. 필요한 유틸리티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하므로 매우 중요한 문서 중 하나다.
쓰고 보니 장황한데 단지 엑셀 파일 안에서 덧셈 뺄셈으로 연결된 계산 시트이다. 이것과 비슷한 류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하다 보니 가계부라는 '밸런스 맞추는 일' 에도 친숙해진 듯하다. 좀 더 오래 엉덩이를 붙이고 눌러앉아 숫자의 균형을 바라보니, 어쩌면 가계부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중 하나인 인내심도 생겼을 터.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내 손가락이 가계부 어플과 친해지는 것이다. 파도에 익숙해 지자. 배경화면에 당장 가계부 어플 아이콘을 올려놓자. 편의점에서 2+1 꼬깔콘을 사고 편의점을 나서며 바로 가계부 아이콘을 누르자. 그리고 입력하자.
"편의점 과자 / 2100원"
대개의 것들이 그렇듯 익숙해지면 이 또한 별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