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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아 Jul 29. 2021

도구


1. 도구

1.1 득도


Talent works, genius creates.

- Robert Schumann


명화극장 시절 추억의 영화, '대십자군'(The Crusades)에서는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천조각이 살라딘의 다마스쿠스 강철 시미타르(Scimitar)에 잘리는 장면이 나온다. 십자군 제후들은 경악하다 못해 속임수라고 비난한다. 오랫동안 다마스쿠스 검은 냉전시대 러시아의 비밀 병기 만큼이나 서구 세계엔 공포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다마스쿠스 강철검을 만드는 비법이 온전히 누설된 적은 없다. 핵심 기술은 철괴를 거듭 접어가며 두들기고 날을 벼르는 접쇠 가공이다. 요즘의 탄소 나노 튜브와 유사한 원리의 유연성과 강성을 갖춘 명검을 만드는 비법은 문헌이 아니라 도제 수련을 통해서 다음 세대의 도검 대장장이에게 전수되었다.



손놀림에 따라 철괴의 형태는 물론 성질이 달라지니, 명검의 여부는 순전히 대장장이의 숙련도에 달렸다. 그러한 대장장이에게 망치는 신체의 일부처럼 재료의 감각을 매개하는 도구이다. 마찬가지로 검객에게 있어서는 도검 자체가 신체의 일부와 같은 도구이다. 베어야 할 재료, 즉, 상대의 움직임에 감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도검이라는 도구에 숙달해야 한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가진 자의 허세일 뿐이다. 도구가 훌륭하면 제작 과정이 즐겁고 도구의 수준은 프로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이다. 미용사들의 가위나 요리사의 식도의 가격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프로가 될수록 명품 도구를 얻기 위해서 거금을 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도구들은 신체의 일부처럼 자유롭게 다루면서, 재료의 성질을 느낄 수 있을 때, 즉, ‘손맛’이라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궁극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전동 드릴조차도 숙련된 기술자에겐 손맛이 여전히 중요하고 캡슐 커피 머쉰조차도 커피 애호가는 비정상적인 조작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도구 제작자가 상상한 기능만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도 '재능'을 필요로 하지만 특별한 노력과 '천재성'만이 같은 도구로도 창조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최고의 도구를 얻기위한 노력은 대부분의 신화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아서왕의 엑스칼리버나 베오울프의 흐룬팅처럼, 절대도구는 항상 이야기의 중심이다. 절대 도구를 획득한 영웅은 특별한 수련이 없어도 신공을 발휘하는 마법이 그 도구에 깃들어 있다. 그러나, 신화적 포장을 걷어낸 현실에서 절대도구란 당대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명품이며 소유자의 각별한 노력을 통해서만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전투기는 현 시대의 대표적인 절대도구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붉은 남작, 폰 리헤트호펜의 포커 드라이데커(Dreidecker. Dr.I)나 2차 세계대전의 메셔슈미트와 같은 전투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마르세예는 메셔슈미트 전투기를 자신의 분신처럼 만들어 공중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공중전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스-요하임 마르세예(Hans-Joachim Marseille)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맹활약한 독일 공군의 에이스로서, 그 유명한 ‘황색 14번기(Gelbe Vierzehn)’를 몰고 올린 전설적인 전적으로 그는 ‘아프리카의 별 (Der Stern von Afrika)’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음은 마르세예의 화려한 기록들 중 대표적인 것이다.


• 1942년 9월까지 영국 전투기만 158기 격추

• 1942년 9월 1일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17기 격추

• 10분 동안의 전투에서 8기를 격추

• 1942년 9월 첫 주의 1주일간에 38기 격추


동료였던 에밀 클라데(Emil Clade)는 훗날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마르세예는 그 자신만의 특별한 전술을 개발했는데, 여타의 파일럿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러플베리 서클을 공격할 때) 그는 매우 천천히 비행해야했다. 따라서 착륙 플랩을 작동해야만 추락을 면할 정도로 천천히 비행함으로써 위쪽의 상대편 방어 원형진보다 더 타이트하게 비행 곡선을 만들 수 있었다.  그와 전투기는 한 몸이었으며, 다른 누구도 그처럼 전투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었다.”


마르세예가 몰던 황색 14번기는 당대 최강의 전투기 중의 하나였던 메셔슈미트 (Messerschmitt) Bf109이다. 이 무렵 전투기의 기체 설계 개념은 ‘양성 정적 안정성 (Positive Static Stability)’의 확보이다. 양성 정적 안정성이란 어떤 물체가 평형상태를 잃은 후 곧바로 원 자세를 회복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어떤 외력이 가해졌을 때 기체의 자세가 바로 원상태로 복원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계된 기체는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오리(rubber duck)와 같아서 어떤 한계 이상의 과도한 움직임을 불허한다. 즉 기체가 부서지거나 조종불능이 된다. 마르세예는 이러한 특성의 전투기를 몰고 공중전에 필요한 고난도의 기동과 그의 전설적인 편차 사격술(deflection shooting) 을 함께 펼치기 위해서 기체를 자신의 몸처럼 섬세하게 다루는 조종술을 터득했다. 다시 말하자면, 도구 제작자가 의도한 기능을 넘어서 ‘특별한 노력과 천재성'으로 창조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마르세예처럼 공중전 기술을 득도한 에이스에게 있어서 전투기는 그의 분신처럼 움직이는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도구(tool)이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득도하는 것은 아니다. 내재된 천재성을 들춰내는 계기와 적절한 방법만이 득도에 이르는 길이다. 공중전의 신에 접하기 위해선 그에게 주어진 도구를 신체의 연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천재성을 발굴해낸 그만의 방법이 필요했다. 북아프리카 전투 초기 별 볼 일 없던 전과를 기록하던 시절, 마르세예는 작전 후 귀환하는 동료 전투기들을 상대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기동술을 실험하면서 나름대로의 득도를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축의 신에 접하기 위해선 타고난 건축적 천재성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천재성을 가우디(Antoni Gaudi)나 에펠(Gustave Eiffel)과 같은 천재들에게서 발견한다. 건축을 자연과 일체화하는 과정에서 가우디는 인간의 직선이 아니 신의 곡선을 구현하였고 천재성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든 업적을 남겼다. 


 “Anything created by human beings is aleady in the great book of nature.- 인간이 창조한 것들은 모두 이미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에 있던 것들이다”. 


그의 유명한 이 경구처럼 가우디에게 있어서 건축술이라는 것은 그저 주어진 도구가 아니라 자연을 구현하기 위한 그가 변용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한 도구였다. 


1.2 영웅들의 황혼


현대 제공 전투기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F-16 전투기의 개발 이후 전투기의 설계 철학은 일반적으로 ‘음성 정적 안정성(negative static stability)’에 기초한다. 음성 정적 안정성이란 동체가 일단 평형을 잃은 후에는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외력이 가해졌을 때 전투기가 쉽게 안정성을 잃는 불안정한 역학구조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역설적인 설계의 이유는 전투기의 공중 기동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전투기를 사람이 제대로 조종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기술이 디지털 플라이 바이 와이어(digital fly-by-wire), 즉, 조종사가 의도하는 기동을 실현하도록 컴퓨터가 판단하고 기체의 각 장치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엔진 추력을 디지털 신경망을 통해 통제하는 체계이다. 이때 조종사의 의도는 항공기의 기동 동작으로 가시화되지만 조종사의 동작과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기체 각 장치의 동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종사의 의도와 전투기의 날렵한 기동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적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알고리즘이 존재할 뿐이다.



현대전에서 더 이상 마르세예처럼 전설적인 기록을 가진 영웅이 나오기는 어렵다. 전투기 한 대가 차지하는 전략적 비중이 커진 탓도 있지만, 조종사의 실력보다는 전투기의 성능이 공중전의 성과를 좌우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림 같은 근접전(dogfight)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다. 적기는 대개 가시 범위 밖에서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며, 일개 전투기가 조기경보기 등의 입체적 지원을 받는 통합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 한 사람의 영웅이 신화를 만드는 시대는 사라지고 자동화와 통합 시스템이 좌우하는 것이다. “감각과 느낌에 따라 수동으로 조종했던 유명한 조종사의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전설에서나 나올 법 하다.” (Nicolas Carr, 유리 감옥). 어느덧 조종사는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가상의 전투기를 몰고,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 적을 상대로 전투를 한다. 전투기 뿐만 아니다. “오늘날 비행기에서 컴퓨터 자동화가 만연했기 때문에 조종실은 비행하는 하나의 대형 컴퓨터 인터페이스로 간주될 수 있다.” (Don Harris, 항공학자, 인간공학자)


이러한 최신 항공기의 조종 시스템에서 조종사는 ‘기계’를 직접 통제한다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마르세예가 자신의 황색 14번기를 조종하면서 가졌던 상호작용과는 다르다. 조종사는 포스 피드백(force feedback)을 느끼면서 항공기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공의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기계는 위대한 자연의 문제로부터 인간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를 더욱 깊이 다룰 수 있게 해준다”는 생텍쥐페리의 경구는 이제 “기계가 인간을 자연으로 격리하여 가상성의 유리 감옥에 가둔다”라고 변용될 수 있다. 


유려한 스케치를 뽐내며, 어깨 너머 배우는 제자들과 선문답을 주고받던 건축 영웅들의 신화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의도대로 시공되지 않은 콘크리트 기둥을 손수 해머로 까부수던 건축가의 일화는 그저 빛 바랜 전설일 뿐이다. 마르세예가 분신처럼 몰던 전투기와 달리 디지털 플라이-바이-바이어 기술에 의해 통제된 최신 전투기들에게 있어서 조종사는 영웅이 아니라 시스템의 일원이 되고 있다. 현대 건축에서 스타 건축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역시 시스템의 일원이다. 건축가의 아이디어는 클라우드에서 공유되고, 가상 건물이 클라우드에서 진화하면서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언제 어디서나 가상 건물을 넘나들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고참 건축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난해한 스케치로 남겨놓으면 누군가 스탭이 도면으로 정리해주고, CAD 모델러는 CAD 파일들을 보물인 양 자신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두는 시대는 아니다. 



규모와 무관하게 현대 건축 프로젝트의 복잡성은 점점 커져서 일개 개인 설계자가 종횡무진하며 제대로 관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혁신적인 (혹은, 혁신적이고자 하는) 프로젝트는 더 이상 2차원 도면이나 전통적인 표현 수단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시공 품질, 안전,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에 의한 생산 혁신, 유지관리 단계에서의 복합적 성능, 자원 재순환을 설계단계에서부터 제대로 고려해서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이끌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의도를 디지털 플라이-바이-와이어처럼 번역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모든 실무에서 이러한 도구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건축의 본질’을 운운하며 여전히 근사한 도면에 치중할 수 있고, ‘감’과 ‘열정’으로 버텨낼 수 있다. 기존의 척박한 건축 생산체계 내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개탄하면서 묵묵히 희망을 찾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 환경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적시에 조직화할 수 있는 시스템과의 싸움에서 도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서문에서 고백한 것처럼 온갖 후진적이고 불합리한 요소들이 해결되지 않는 우리 건축계에서 창조적 도구를 논하는 것은 허튼짓일 수도 있다. 결정적 수익은 부동산 조작에서 발생하며 기술의 개발이나 혁신으로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 지가 상승이나 비정상적 투기에 의해 발생하는 이익에 비해서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 여타 분야와 마찬가지로 건축 생산은 고도로 시스템화되고 디지털 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1.3 디지털 설계 도구


"음계 내의 모든 음 간격이 동일해졌다는 것, 그리하여 다른 음계로의 전조가 가능해졌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변혁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순정율의 감각을 희생시켰으나 평균율의 실용성과 합리성을 얻은 건반 악기는 이제 명실상부한 작곡가의 악기가 되었다. 건반을 눈으로 내려다보며 악상을 시험해보고 쉽게 기록할 수 있는 장점에다가 음계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착상의 자유로움이 더해지자 작곡가들의 '생산성'은 크게 높아졌다." 

- 나성인, <베토벤 현악 사중주>


장인이 재료를 다루면서 축적된 경험은 어떤 명문화된 매뉴얼이나 문헌을 통해서 전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디지털 도구를 건축설계에 활용하면 설계 생산성이 저절로 높아질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디지털화는 통상 디지타이징(Digitization), 디지털화(Digitalization), 그리고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의 3단계로 설명된다. 디지타이징은 문자 그대로 데이터의 디지털화이다. 도면을 손으로 그리거나 타자기로 보고서를 쓰는 일은 없으므로 현재 대부분의 ‘정상적인' 설계회사의 업무 프로세스는 디지타이징 단계를 넘어섰다고 하자. 한편 디지털화는 ‘도구' 활용 수준에서의 디지털 업무를 말한다. 이는 건축을 엔지니어링 제품 수준에서 표현하면서 그것의 생산 지식이 디지털 정보로 인코딩 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설계사무소에서 흔히 CAD라고 부르는 것은 소위 CAD 몽키(Monkey)들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현란한 단축키 신공과 무거운 엉덩이로 도면은 물론이고 물량표, 심지어 일반 문서까지 특정 CAD프로그램으로 해결하는 디지타이저(digitizer) 전사들이다. 우리가 설계전산(Computational Design)이라고 부르는 디지털화(Digitalization)는 컴퓨터가 '신체의 연장'이 아닌 '정신을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때 가능하다. 


최근까지 건축분야에서 설계전산은 특이하게도 디지털 장인 또는 아티스트에 의해 주도되어왔다. 극사실적 CG나 애니메이션 도구는 그 자체가 예술적 구현 대상이 되어, 탐미적인 형태 실험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델란다(Manuel Delanda)의 지적처럼 대개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은 뻔한 형태로 수렴되며, 정신의 확장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 예술적 구현 대상으로서의 디지털 모델은 재현 수단이지 생산수단이 아니다. BIM, 파라메트릭 디자인 기술과 결합된 성능 시뮬레이션 도구, 그리고 3D 프린팅과 결합된 생성수법적 설계(Generative Design)는 본격적인 디지털화(Digitalization)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지만, 결국 그러한 시도는 '제품으로서의 건축'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건축 생산 프로세스에서 ‘제품'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디지털화(Digitialization)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건축물도 엄연한 ‘상품'이라는 명제를 거부한다면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디지털 전환의 본령은 가치 혁신과 비즈니스 모델에 있기때문이다. 크리틱 중심의 학교 스튜디오를 확장한 설계사무소의 조직은 급변하는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시장성 있는 상품을 만들 수 없다. 새로운 설계 조직은 전통적인 건축가 외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재료 전문가, 파라메트릭 디자인 전문가, BIM 코디네이터와 같은 새로운 재원을 필요로 한다.이러한 조직은 Generative Design과 같은 강력한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여 하향적 진화가 아니라 수평교배적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세스를 만든다. 상품으로서의 건축은 개념의 물질화와 같은 일방향적 프로세스가 아니라, 기능과 니즈를 신속히 형상화하고, 테스트하면서, 그 성능을 측정하고 학습하여, 재창조하는 프로토타이핑과 린스타트업 프로세스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학 설계 교육의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크리틱 중심, 도제식 설계스튜디오 교육은 과감히 축소되어야하고 시대착오적인 CAD냐 손도면이냐 식의 논쟁은 사라져야 한다. 건축학과를 졸업하면 모두가 설계사무소를 차려서 집을 설계하는 직업모델도 재고되어야 한다. BIM, 파라메트릭 디자인 도구, 또는 VR 기술 등은 새로운 CAD 몽키를 위한 일거리가 아니라 디테일이나 컴퍼넌트 디자인 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게하는 디지털 건축가의 정신을 확장하기 위한 도구이다.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도구들을 신체의 연장으로 가르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 전환은 설계업무조직의 재편, 프로세스의 혁신, 그리고 교육의 변혁을 전제로 한다.


디지털 설계 도구 역시, 그것이 2D CAD 이든, 3D 도델링 도구이든, 파라메트릭 디자인 도구이든, BIM 설계 도구이든, 정작 표현물을 만들면서 축적된 경험도 명문화된 매뉴얼이나 문헌을 통해서 전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도구 개발자들이 연필이나 트레이싱 페이퍼와 같은 표현 매체를 태블렛 PC나 UI에서 흉내내려는 시도 역시 건축설계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디지털 설계 도구는 개인의 지식 체계가 아닌 기관의 지식체계를 담는 용기이다. 파라메트릭 디자인 도구는 설계 지식을 기관화하기 위한 도구이지 개인 설계자의 유려한 검술을 뽐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건축가가 디지털 도구를 이용하여 설계를 한다는 것은 도면을 제작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도면은 일견 설계의 수정을 용이하게 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 같지만, 도면은 본질적으로 도면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적어도 르네상스 이후 건축설계는 더 이상 실제 건축물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며, 따라서 설계도구 역시 건축물을 직접 다루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면이나 모형은 건축물의 표현물이며, 연필이나 CAD 도구 역시 건물의 재료를 직접 다루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건축 설계 도구는 일찌감치 재료의 물성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상실했다. 표현물이 건축물의 재료로 온전하게 환원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설계가 수행된다는 것이다. 제품 설계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를 안고있지만, 근본적으로 제품은 대량생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프로토타이핑 프로세스라는 것이 존재한다. 건물은 모든 사례 하나하나가 프로토타입이나 마찬가지이다.


건축설계는 표현물을 다루는 작업이지만, 표현물이 목적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실제 재료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가상성이 지배한다. 재료의 물성을 직접 느끼면서 대응한다는 것은 마치 음악에 있어서 현의 물리적 특성을 손끝으로 제어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같다. 디지털 설계도구가 아직 그러한 물성을 전달해주지 못하므로 디지털 도구를 장인의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디지털화의 본령, 즉 지식 도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이올린이 연주자의 도구라면 피아노는 작곡자의 도구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설계 도구는 건축가에게 과학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파아노와 같은 도구이다. 특히 성능평가 시뮬레이션과 결합된 파라메트릭 디자인은 가상 건물을 눈으로 내려다보며 형상과 성능을 시험해보고 쉽게 기록할 수 있는 장점에다가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착상의 자유로움을 더해주는 것이다. 피아노처럼 디지털 설계 도구는 '하나의 완결된 건축물'을 표상한다. 그것은 도구인 동시에 하나의 가상 건물인 것이다.


도제식 수련과 비법의 전수, 그리고 부단한 자기 계발에 의해 도구를 익히게 하는 전근대적 지식 생산 모델은  여전히 건축 교육의 현장을 장악하고 있다. 단축키 신공과 강철허리로  CAD 소프트웨어를  귀신처럼 다루는 것, 설혹 알량한 BIM 모델링 실력을 믿고 설계사무소를 관두고 고수익 프리랜서 모델러가 되든, 본질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지식이나 기술은 사유화되기 때문에 사회전반의 선진화에는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한다.


1.4 건축가의 도구


道可道 非常道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 노자, 도덕경 1장


건축가가 향유하는 최고의 가치는 창작 과정에서의 자기 성장과 성취감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총체적 비용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성숙도와 비례한다. 적절한 보상과 성취감만 있다면 건축가들은 무엇이라도 디자인할 수 있도록 훈련된 전문가들이다. 답이 정해져 있지않은, 그리고 모순 덩어리의 설계 문제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사유하고 독특한 해결안을 제시할 수 있는 ‘천상 연구자’들이다. 


통상, 인공지능으로 지칭되는 컴퓨터 알고리즘은 단 시간 내에 무수한 설계안을 자동 생성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임의의 꼭지점을 프로그램이 선택해서 형성된 바닥면을 진화 알고리즘으로 최적화하면서 투입 비용 대비 최대 임대 면적이 나오는 설계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 현재 일반화된 방법이다. 규칙 기반 알고리즘으로 법규가 허락하는 최대 볼륨의 범위를 정하고, 그 경계 내에서 가능한 최적의 조합을 찾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설계 자동화 도구의 사용자는 건축가가 아니라 공인중개사나 일반 개발업자이다. 그런 프로그램이 보다 혁신적이고 우아한 건축 유형의 변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건축가가 필요하다. 즉, 건축가의 설계 지식과 감각, 설계 전략이 인코딩 된 추가적인 지식체계가 필요하며, 건축가마다 그러한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현재 대부분의 유사 프로그램에서 적용된 레퍼런스 모델은 가장 인기 있는 유형,  결국 원 설계를 알 수 없이 반복되어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 잡은 설계 방법이다. 이 모델은 불행히도 척박한 우리 도시 건축 환경의 수준을 대변한다. 인공지능 챗봇에 비교하면 간단하다. 품격없는 말을 하는 사용자와의 인터랙션을 통해 나쁜 말을 배운 챗봇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연어 처리 프로그램과는 달리 현재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아직 건축설계의 형상과 공간 관계의 의미를 바둑의 기보처럼 학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건축가의 설계 의도와 공간적 퀄리티를 기계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인코딩 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많은 것이다. 상업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좀 더 특정한 건축가의 설계 스타일을 흉내내는 알고리즘들은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모듈화되어 있는 제품 생산 체계와 연계되어 있지 않은 채 생성되는 환환상적인 디자인들은 결국  형태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설계 대안을 알고리즘이 무한정 생성하도록 맡겨두기 보다는 설계자가 직관을 발휘해 매스 스킴을  정하고 그러한 방향에서 알고리즘에 의한 형태 찾기 전략으로 디자인 스페이스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여전히 인간 건축가의 직관이 개입하는 것은 컴퓨팅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유명 건축가들이 건물이 아닌 요트와 같은 산업 디자인 제품을 하는 사례를 보면 이러한 어프로치의 합리성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본업이 아닌 분야이지만, 건축가가 디자인 한 요트가 미적으로 세련된 동시에 바람을 이용하고 파도를 가르는 기능에 부합될 가능성이, 건축설계 경험이 없는 사람의 디자인보다 월등히 높다. 또한 맹목적인 기계학습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무수한 요트 디자인보다 우수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건축가의 직관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하는 디지털 도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건축가의 스키매틱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그것이 내포하는 성능을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구조적으로 보완된 형상을 제시해주거,  여러 측면의 성능이 보다 나은 솔루션들을 알고리즘적으로 탐색하는 방법이다.


건축가는 직관적으로 감각적인 형태와 조화로운 비례감, 그리고 그 형태와 배치가 내포하는 기능과 공간적 연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쉽게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과정에서 얻는 건축가의 성장과 성취감은 오롯이 건축가의 몫이며  알고리즘이 절대로 대체해줄 수 없다. 따라서 건축가라는 직업이 존재하는 한 건축가는 도구의 즐거움을 기계에게 온전히 내어줄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얻는 감동을 포기할 수 없다. 스스로를 감동시킬 수 없다면 고객을 감동시킬 수도 없다. 


철근콘크리트의 예측 가능한 품질을 담보로 하는 설계는 언제부턴가 재료와 구법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단조롭고 판에 박힌 설계행위에 의해 공간을 나누고 뼈대를 계획하여 도면으로 제시하면 그것은 표준화된 시공 과정을 통해서 건물로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 과정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단순한 도면 기술자의 역할로 전락하게 된다. 델란다가 지적한 것처럼 4차 산업혁명시대 특히 인공지능에 의해 이내 대체 가능한 영역은 바로 이 규범화된 지식과 기능이라는 것이다. 재료와 상황에 직관과 경험으로 대응하는 암묵지는 여전히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하기 어려운 마지막 영역인 것이다. 


대지의 흐름을 읽어내고 어디에 축을 정하고 어떤 지역적 역사적 상징성을 도출하며 어떤 공간적 분위기를 연출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여전히 숙련된 인간 건축가만이 할 수 있다. 그런 핵심적인 의사 결정으로 건축가가 틀을 잡아가면서 물리적 성능에 근거한 세부적인 설계의 의사결정은 컴퓨터가 진행하는 공생적인 설계 워크플로우의 필요성은 자명하다. 정량적 성능 예측에 근거한 대부분의 '합리적' 짜맞추기 보다도, 결국 사람들에게 영원한 감동을 주는 한 방은 인간 건축가만이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겐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인간 건축가 만이 비합리적인 공간에서 감동을 기획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감동을 줄 수 없는 건축가가 설 자리는 없다.


모듈화, 표준화된 프리패브 시스템에서는 알고리즘의 역할이 우세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공장냄새 나는 이름의 시스템조차도 퀄리티와 마무리가 훌륭해서 쾌적한 건축환경을 향유할 수 있는 건축물은 도처에 널려있다. 사실 이런 건물들은 형태만 요란하고 디테일이 형편없는, 그러면서 공허한 개념으로 핑계를 대는 질 낮은 건축 나부랭이보다는 훨씬 쾌적하고 친환경적이며 편리하다. 사람의 욕망을 읽어내는 정교한 알고리즘과 결합된 설계 자동화 시스템의 지원을 받는 제품 수준의 생산 시스템이, 감동을 줄 수 없는 이류 건축가들을 대체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일류 만이 살아남는다.


건축가에게 다마스쿠스 강철검과 같은 절대 도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검객이나 대장장이와는 달리, 건축가는 설계 과정에서 실제 물성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 설계는 지극히 가상성과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프로세스이다. 물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물성의 근원지는 건물이지, 도면이나 심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물성을 객관적으로 다루고'하나의 완결된 건축물’에 포함시킬 수 있는 도구야말로 건축가에게 필요한 절대 도구가 될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주어진 도구를 마치 강철검처럼 다루고 배우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건축가의 표현처럼 ‘건축은 꿈을 그리는 캔버스’이다. 꿈을 경험하게 하고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늘 건축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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