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윤리 2주차. 2024. 9. 10
<오늘의 논제>
강유찬: 고통을 견뎌 진리를 인식했다면 이를 타인에게 알려야 하는가?
정성학: 진리를 알면 우울하지 않고 행복할까?
박인서: 우리는 왜 진리를 좇는가? [선정 논제]
조휘: 우리가 좇는 진리란 무엇인가?
김수민: 동굴에 남겨진 사람들을 존중하여 그들을 내버려둬야 하는가?
김민서: 고통 없이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지하의 동굴 모양의 거처에서, 불빛 쪽을 향해 길게 난 입구를 가진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이 세워져 있는 것을 상상해 보게.”
“상상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또 상상해 보게나. 이 담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이상한 비유와 이상한 죄수들을 말씀하시는군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네. 이런 사람들이 자기들의 맞은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외에 자기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이든 본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들이 평생 머리조차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제당했다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인공적인 제작물들의 그림자 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걸세.”
“다분히 필연적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게.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을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걸세. 만약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그가 엉터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에 더 가까이 와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더군다나 지나가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가리켜 보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서는 대답하게 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는 당혹해하며 앞서 보았던 것들을 더 진실된 것들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더 진실된 것들로 믿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에 그로 하여금 그 불빛 자체를 보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눈이 아파서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을 향해 달아날 뿐 아니라 이것들이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 정말로 더 명확한 것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낼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이 끌려온 데 대해 언짢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가 빛에 이르게 되면 그의 눈은 광휘로 가득 차서, 이제는 진짜라고 하는 것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당장에는 볼 수 없겠죠.”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비친 것들의 상들을 보게 될 것이며, 실물들은 그런 뒤에야 보게 될 것일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는 그가 태양을 그 자체로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필연적으로 그럴 것입니다.”
“또한 다음으로 그는 태양에 대해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을 걸세. 즉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며, 또한 그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일세.”
“그가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가? 이 사람이 최초의 거처와 그곳에서의 앎, 그리고 그때의 동료 죄수들을 상기하고서는, 자신의 변화로 해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되,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지 않는가?”
“그러고 말고요.”
“만약에 그때 그들 앞의 벽면에 지나가는 것들을 그들 사이에서 가장 예리하게 관찰하고서는, 앞으로 닥칠 사태를 가장 유능하게 예측하는 사람에게 명예와 상이 주어졌다면, 그가 이것들을 갖고자 욕심부리며,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자들을 부러워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런 식으로 사느니보다는 무슨 일이든 겪어내려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런 식으로 사느니보다는 오히려 모든 걸 겪어내는 쪽을 택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가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 나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줄곧 그곳에서 죄수 상태로 있던 그들과 그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 봄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도록 요구받는다면, 그것도 눈이 제 기능을 회복하기 전 시력이 약한 때에 그런 요구를 받는다면,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오늘의 논제>
강유찬: 고통을 견뎌 진리를 인식했다면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정성학: 진리를 알면 우울하지 않고 행복할까?
박인서: 우리는 왜 진리를 좇는가?
조휘: 우리가 좇는 진리란 무엇인가?
김수민: 동굴에 남겨진 사람들을 존중해 그들을 내버려둬야 하는가?
김민서: 고통 없이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