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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류스타, 난설헌 허초희


예술가는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해


조선의 한류스타, 난설헌 허초희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513877


질문: 역사에 이름을 날린 문인들을 보면 모두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남들보다 특이한 삶을 살다간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몸이 병약하거나 정신질환이 있거나 순탄치 못한 삶을 보냈거나 말이지요. 어찌 보면 예술가에게 고통은 숙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선인님께서도 생전, 어려운 환경에서 작품을 남기셨지요.



예술가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가 뭘까? 그들의 역할은 사람들의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켜 창조해 낸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지. 물론 보통사람들도 고통을 승화시켜 작품을 만들어 내긴 하지만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것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 주기에 사람들 마음에 더욱 뚜렷한 종적을 남길 수 있는 거란다. 사람마다 역할이 다르단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내 역할을 했지. 예술가들이 영감을 잘 받기 위해서 어느 정도 예민함은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예술작품이 고통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안다면 작품을 대할 때 허투루 할 수는 없는 것이야.



내 삶이 그러했던 것은 내 의도였단다. 그 편이 더욱 드라마틱하니까 후인들에게 더 큰 인상을 남길 수 있었지. 흔적을 남겨야 했기에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처음 지상에 왔을 때는 삶이 그리 흘러갈지는 몰랐지만 차츰 내 삶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짐작했단다. 선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현 상황을 극복하고 작품을 남기는 것이 내 역할인 것을 알았지.



허난설헌의 역할은 여성들이 그녀의 아픔을 느끼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거였어.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픔을 극복하고 이루어 내는 것을 보고 힘을 얻으니까. 어찌 보면 시대에 여자라는 것에 한 남자의 지어미라는 것에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존재였지만 내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상황에 포기하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지. 그렇지만 나의 삶도 여러 모델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일 뿐이란다.







출처: 조선최초의 한류스타, 허난설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513877



생활에서 예술이 되지 않은 것은 없어



얘기를 나누면서 선인님께서 시작에 굉장히 몰입하셨고 그 자체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현실에서는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다 가셨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행복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 내적으로는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지. 시 세계에서만큼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현실의 아픔을 이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단다. 예인들이 현실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유는 남들보다 더욱 큰 갈등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로 뛰어넘어 보라는 하늘의 뜻이 있는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자신이 가진 도구로 창조적인 행위를 해 보는 것이야. 쓸수록 발달하는 것이니까. 예술은 고통의 산물이지만 그만큼 값진 것도 없단다. 인간의 삶 자체도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어. 생활에서 예술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창조 행위가 곧 예술 행위이니까.




평생 쉬지 않고 시를 쓰셨지요.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내가 글을 써야만 했던 이유를 말하자면 끝도 없을 거야. 시를 쓰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었어. 글을 쓸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나는 도(道)의 길을 감에 있어서 ‘시’를 부여받았기에 그 길을 가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고 할 수 있지. 시를 통해 나의 성숙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야. 시를 통해 나를 확인하는 작업은 기쁨이었다.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에 의지했고 시를 통해 나를 확인했고 꿈꾸었지. 여상서(중국 동한 때 궁중에서 문서 정리를 보던 여성에게 내리던 관직. 허난설헌이 살았던 시기, 명나라에도 비슷한 관직이 있었다가 되고 여행도 마음껏 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말이야. 나는 자유를 꿈꾸었어. 자유로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고 싶었지. 알다시피 내가 태어난 시대는 사대부집 여자라 해도 개인으로 인정받긴 어려웠고 한 집안에 종속되었으니까 매우 답답했단다.






요즘 사람들은 글을 쓰고 나서 출간을 하고 이를 통해 인정을 받고 세상에 나아갈 수 있으니 하나의 원동력이 되지만, 선인님의 글은 읽어 주는 사람도, 출간할 상황도 아닌데 계속 글을 써 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있는지요?



그런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어. 당시 선비들이 글을 쓰는 것은 필수교양과도 같은 것이었지.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글 쓰고 사유하면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일을 했던 것이야. 글 쓰는 것 자체를 좋아했고 그것 말고는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도 하였지. 조각가가 작품을 빚으면서 그것과 하나가 되어 가는 것처럼 나의 글도 나의 삶과 일치되어 갔단다.




글 쓰는 것은 영혼을 달래주는 방법 중 하나



선인님의 글을 읽으면 무엇보다 아름다움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요?



그래. 진리를 가장 아름다운 그릇에 담아내고 싶었단다. 아름다움 그 자체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내가 아름다움을 강조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여성스러움과도 관련이 있지. 남자와는 대비되면서 여성만이 지닐 수 있는 분위기가 있어. 그중 하나가 이 아름다움인 바,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시가 되어 나타난 것이란다. 산문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시가 좋았던 이유는 완벽한 무엇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짧은 시구에 내 생각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과 상상 속의 아름다운 세계는 시로 나타내는 게 가장 적합했으니까.



언젠가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는 바람 속에서 계속 시를 써갔단다. 시를 쓰면서 무심이 되면 내가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워질 때 느껴지는 충만감이 나를 해방시켜 주었지.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멈춘 곳에 도달할 때가 있었단다. 글이 나를 여러 곳으로 데려갔단다. 여상서가 되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선계에도 가고, 바깥으로도 가고, 새로운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글 쓰는 것은 영혼을 달래 주는 방법 중 하나였단다.






김작가와 떠나는 문학기행 : ) 허난설헌 생가터









책을 쓰기 전, 인물에 대해 알기 위해 답사를 꼭 하는 편이에요.


허난설헌 선인에 대해 쓰기 전, 강릉 답사를 두 차례 정도 했지요.


이 곳은 허난설헌 선인의 생가터. 엄밀하게 말하면 생가는 아니지요.


그래도 여 시인이 태어났을 법한, 그런 환경이랍니다.


소담스럽고, 매화꽃이 아름답고....








이 곳은 안채 뒷마당이랍니다. 굴뚝이 참 독특해요.


양반집은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가 있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생활했다죠.








뒤뜰에는 각종 꽃나무가 심어져 있는데다, 솔밭에


생가터가 있어 들어서면 참 시원하답니다.








이곳은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쪽문








이곳이 사랑채에요. 허난설헌의 동생은 허균. 유명한


홍길동전을 쓴 작가이죠. 책을 보면 아실테지만


난설헌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작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허균의 역할이 컸더라고요. 시 스승이 되어주고, 재능을 살리도록


도와준 사람은 오라버니 하곡허봉, 민초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신분제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은 허봉의 친구인 천민출신의


시인 손곡 이달, 그리고 누이의 시를 중국의 사신에게 소개하여 준 이는


허균. 이렇게 허난설헌의 재능이 돋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빠와 동생, 그리고 스승이었던 손곡이달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죠.








양반댁 답게 솟을 대문이 멋있죠?









여기가 안채랍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집안에 갇혀 답답했을 것 같은데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을 공부해보면, 반드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더라고요.


규방에서 책 읽고, 규방문화를 꽃피우고, 시도 쓰고...그렇게


나름의 아름다운 생활을 영위했다고 하죠.









집안구경을 마치면 기념공원이 나온답니다.


이 곳에 허씨 집안의 5문장가 시가 이렇게 세워져 있답니다.


각 시를 보면서 각 문장가의 특징도 알 수 있고....









허난설헌 집안의 사람들은 다들 글을 잘했대요. 5문장가라고


사람들이 그랬다잖아요. 아버지는 동인의 영수 허엽.


서경덕 선인의 제자이기도 하였죠.









안채에 마련된 허난설헌 선인의 영정.


하얗고 반듯한 이마가 그녀의 지성을 잘 나타내주는 듯한 그림이어요.


이전 버전보다 저는 새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기념공원에 세워진 그녀의 동상.


제 생각인데 허난설헌 선인이 현재 살아 돌아왔다면,


자신의 동상이 이렇게 세워진 모습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시를 읽어주는 것은 반겼겠지만....










곡자 (두 아이를 잃고)


허난설헌 선인은 연년생인 아들과 딸 아이를 한꺼번에 잃지요.


이 시는 그냥 눈으로만 읽으셔요.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요.









비교적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생가터.


그녀의 시, 허균선인의 시를 읽으면


강릉의 집에대한 애정이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답니다.


시에 나오는 집 주변 풍경 묘사가


현재 집 주변 풍경과도 비슷한 것을 보면


뭔가....기분이 이상해요.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허난설헌 선인을 마주대하는 느낌일까요?


'그녀도 이런 것을 느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















집을 빠져나오면 이렇게 경포호가....


강릉은 갈때마다 이상하게 끌리더라고요.


설잠 김시습 선인의 고향이자


신사임당, 율곡이이 선인님의 댁인 오죽헌이 있고


또 허균, 허난설헌, 허봉의 생가터가 있으니까요.



강릉.....


강릉.....


경포대나 바닷가 뿐만 아니라


이런 조상님의 향기도 느껴보셔요.



아참, 선교장 들르는 것도 잊지마시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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