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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3대 미남왕, 정조이산


정조이산은 조선 미남왕에 꼭 들어가는 인물입니다 .


제가 알기론 조선 3대 미남왕에는



연산군!!! 피부병이 있긴 했지만 요즘 말하는 꽃미남의 모습에 가까웠다고 전해지는데요


하얗고 여리하고 손이 아름다웠대요


그리고 성종 그리고 정조임금



정조임금은 그렇게 잘생기고 못하는거 없고 완벽한 모습뒤로


조선최대 역모의 위협을 받았던 왕이면서


찐 로맨티스트이면서


알고보면 맘속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아픔, 컴플렉스등등


가지고 있었지만 끝까지 개혁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것에


그리고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49세 1800년.


그래서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정조이산의 모습은 요즘말하는 꽃미남은 아니었고


남자다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상상을 깨고 싶진 않지만


선원보략에 나오는 정조이산의 어진이라고 하네요.













짜잔~~~









조선후기는 영정조 르네상스라고 하잖아요. 그 만큼 문화가 발달했지만


기득권들과의 힘겨루기에서 결국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수원화성을 남긴채 돌아가신 정조임금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하잖아요.


지금은 대한민국 태동기, 학습기를 지나


한류가 그야말로 꽃 피우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도약이 남아있죠.



도약을 위해서는 기존의 익숙한 길에서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방법은 기존의 길을 버려야 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정조 임금은 수원화성을 만들어 조선을 새로이


개혁시키려 했지만 정조 임금은 죽고 말고


그 후 정순왕후는 정확히 정조임금이 한 일을 180도 돌려놓고 맙니다.


그 후의 역사는 우리가 알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귀족계급을 타파하고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의 흐름에 결국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조선의 미남왕 정조이산


100발 100중 명중에


역모위험을 하도 많이 받아서 잘 때에는 늘 옆에 칼을 두고


새벽까지 글을 읽다가 주무셨다고 합니다.



미남이셨지만 정조이산 께서 돌아가실 49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4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노심초사 정사를 걱정하고 처리하기 위해


너무 애쓴 나머지


이는 다 빠지고 머리는 하얗게 샌 모습이었다고 해요. ㅠㅠ.



맴찢....ㅠㅠ.










저는 이 기록을 대하고 오히려 정조이산 임금이 더 좋아졌답니다.


한편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나 왕으로 사는 것이


참 보통사람으로는 할 역할이 아니다 그런 것도 느꼈고요.


인간은 하나의 우주라고 하잖아요


하물며 정조이산과 같은 분을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아직도 안개를 헤매는 것 같고요


그러나 한가지 알게된 점은



그가 다른 왕들과 달랐던 것은 뛰어난 머리만 믿은 것이 아니라


항상 노력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부지런히 성찰했다는 데 있어요.


그 힘으로 자신을 바꾸고, 주변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 했던


왕이라는 것....아무리 천재왕이고 똑똑해도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 왕은 드물거든요.



그는 진정한 수행자면서 진정한 왕이었습니다.








규장각, 리틀정조 양성학교 








요즘 드라마 옷소매 붉은끝동이 인기입니다. 저도 정조이산 선인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공부하고 연구해서 책도 몇 권 펴냈는데요, 오늘은 그의 개혁의 산실인 규장각에 


대해 다루어 볼까 합니다. 흐흐흐. 사랑만 있다면.....세상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일도 있어야지. 안 그래요? 



규장각은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씽크탱크입니다. 조선 역사상 이러한 씽크탱크를 만들었던 왕은 두 분.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입니다. 



***



조선의 개혁을 위해 조정에 새로운 물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정조 이산은 세손 시절 송나라 왕안석의 개혁정치를 연구합니다. 그중에서 그는 송나라의 전각제도를 유심히 살펴보는데 자신이 조선 최고의 학자이기에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치제도에 관심이 가는 것이겠죠. 송나라 때는 용도각, 집현전, 고문각 등 전각제도가 발달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을 우대하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 왕이 직접 전각을 짓고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이를 정책에 반영하였죠. 요즘 식으로 하면 정부 연구소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다 과거에도 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즉위하면 왕을 보좌하는 학술기관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정조 이산은 즉위한 해 1776년 3월, 규장각을 궐내에 창설할 것을 명합니다. 정조실록 1776년 9월 25일 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대왕의 운장(雲章)ㆍ보묵(寶墨)은 모두 다 소자를 가르쳐주신 책이니, 존신 경근(尊信敬謹)하는 바가 어찌 보통 간찰(簡札)에 비할 것이겠는가? 



의당 한 전각(殿閣)을 세워서 송조(宋朝)의 건봉(虔奉)하는 제도를 따라야 하겠으나 열조(列祖)의 어제ㆍ어필에서 미쳐 존각에 받들지 못한 것을 송조에서 각 왕조마다 전각을 달리하는 것과 같게 할 필요가 없으니 한 전각에 함께 봉안(奉安)하게 되면 실로 경비를 덜고 번거로움을 없애는 방도가 될 것이다. 



아! 너 유사(有司)는 그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를 하라.” 하고, 인하여 집을 세우는 것이나 단청을 하는 것을 힘써 검약함을 따르라고 명하였는데 3월에 시작한 것이 이때에 와서 준공되었다. 



처음에 어제각(御製閣)으로 일컫다가 뒤에 숙종 때의 어편(御偏)을 따라 규장각이라 이름 하였는데, 위는 다락이고 아래는 툇마루였다. 



물론 정조는 자신의 정책을 보좌해줄 기관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죠. 처음에는 단순히 역대 제왕들의 글과 초상화, 유품을 보관하는 건물을 하나 짓겠다고 합니다. 대신들이 이런 발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죠. 그래서 정조는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의 누각을 짓게 했습니다. 










<존덕정>



처음에는 왕실도서관처럼 시작하는 듯했죠.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선발하되 균형의 원칙을 지키고자 노론, 소론, 남인 중에서 청렴한 인재를 골라 선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조시대의 명재상 채제공이니 김종수 같은 인물은 규장각 각신으로 뽑혀 거물로 성장한 경우지요.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조직과 기능을 늘려갔습니다. 초기에는 책임자로 제학 2명, 직제학 2명, 직각 1명, 대교 1명 등 6명을 두었고 이들을 칭하여 각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중에 당대 최고의 꽃미남이 나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KBS 2 TV, 2010)’ 아시죠? (연식나온다. ㅠ.ㅠ) 거기에 나왔던 아이들이 훗날 규장각 각신이 된다 아닙니까? 노론, 소론, 남인, 또 중인 출신으로 신분과 당색이 다른 아이들이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던 그들이 나중에 각신이 되어 일구어갈 우리나라의 미래가 아름답지 않겠어요? 픽션일지언정 보는 내내 흐뭇했답니다. 



당색을 초월한 인재등용에 성공한 정조 이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오른팔이자 왼팔인 홍국영이 괜찮은 제안을 하나 합니다. 정조 재위 3년째 되던 해인 1779년 정조가 도승지 홍국영에게 책자 간행이 어렵다고 얘기합니다. 



그때 홍국영이 서얼을 등용하여 교정 등의 업무를 보게 함이 어떻겠냐고 하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에 의하면 홍국영은 젊은 시절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모여 놀거나 얘기하기를 즐겨 하고 장기와 같은 잡기를 좋아했다고 전합니다. 글도 잘 썼다고 하는데 그런 탓에 신분이 낮지만 학식을 뛰어난 여러 서얼들과도 교류를 트며 지냈습니다. 










<부용지>



마침내 이들을 위한 직제인 검서관 제도가 신설되고 초창기 검서관으로는 이덕무, 유등공, 박제가, 서이수 등이 임명됩니다. 이들은 모두 서얼 출신이죠. 검서관들은 이제 ‘규장각 사검서’라고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하기에 이릅니다. 사검서의 탄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면 조선은 사(士)-농(農)-공(工)-상(廂)의 네 신분제도가 뚜렷하게 나눠진 사회입니다. 이것은 성리학적 질서이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같죠.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차별받는 위치에 있는 서얼들이 가장 똑똑한 인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규장각의 관리로 선발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신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은 아니죠, 그래도 그들의 능력이 일국의 가장 어른인 왕에게 인정받은 겁니다. 이로써 조선 사회는 한층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죠. 어떤 일이든 시작이 중요한 겁니다. 비록 네 사람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과 상징성은 경직된 조선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계속됩니다.




출처: 세계최초군주혁명가, 정조이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68134



출처: <궁중로맨스소설> 정조의 비밀사관, 은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89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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