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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May 28. 2020

개는 가고 고양이도 간다

20. 5. 28.

고양이가 갔다. 모르는 고양이다. 모르는 곳으로 갔다.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마 내 안에서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영영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자기 엄마와 함께 떠났다는 것이다. 아침에 연어를 썰어서 먹을 지 아니면 냉동실에 있던 뭘 물에 넣고 해동해서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먹을 지 고민하던 차에 까치가 너무 심하게 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는 것도 아니고 짖는 수준이었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대체 뭘 보고 그런 락 스피릿 가득한 영혼의 우짖음을 토해내나 창문을 열어 봤다. 그러자 애옹 애옹 하는 소리가 들렸고 창문 한참 아래서 얼굴이 아주 작은 앳된 어미 고양이가 나를


^       ^

◎ ㅅ◎  ...


 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쌀벌레 같이 꼼지락대며 기어 다니는 작고 노란 고양이와 작은 흙색 고양이도 보았다. 목청이 두둑한 까친놈들은 그 주위에 앉아 있다가 내가 상반신을 불쑥 내밀자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       ^

◎ ㅅ◎  ...


 마치 안 꺼져? 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내 방이었는데도 말이다.

 단독주택 특성 상 길고양이가 자주 침입을 하기는 하지만 새끼를 치는 일은 흔치 않아서(이전에 딱 한 번 있었는데 그 사례는 다음 기회에 적어보기로 한다.) 너무 신나고 너무 궁금했다. 날벌레도 많고 먼지도 많고,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공간이라 애들이 건강할 지도 걱정됐다. 그래서 집을 반 바퀴 돌아 내 방 창문 밑에 섰을 때 곰실거리는 털복숭이들이 집 주인도 모르고 있던 틈새로 기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고양이들 길거리 생태를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 친환경 벙커가 여러모로 건강에 안 좋을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목장갑을 끼고 예전에 가족이 만들어 둔 깜찍한 스티로폼 집(삼각형 지붕이다.)을 주워다 고양이를 챙겨 넣었다. 종이컵을 잘라서 물도 떠다 주었다. 그런데 아기 고양이는 '물 그릇'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놔두고는 방에 들어가 누웠다. 고양이가 아주 앙칼져서 하완에 생채기가 남았다. 갑자기 코도 막히고 재채기도 너무 나고, 긁힌 부분들이 부어올라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가족이 "너 고양이 털 알..."이라고 묻는 순간 세차게 부정했다.


 하지만 안다. 내가 고양이 털 알러지를 가졌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깨달았다. 유학시절 룸메이트가 대뜸 상자에 넣어 온 아기 고양이를 구경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게 이제야 찾아왔다. 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개를 키웠다.

 개는 참 나를 미안하고 슬프게 했다. 기쁘게도 했다. 즐겁게 만들어줬다. 허전하지 않게 해줬다. 그 애가 세상에 비해 가지는 부피보다도 훨씬 더 많은 걸 받았다. 그런데 나는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


 이따금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거나 언니의 언니로 태어나는 상상을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와 같이 살았던 그 개가 되어 사는 상상도 자주 한다. 그러면 실재하지 않는 마음이란 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아파진다. 뇌의 신경물질이 분비됐기 때문일 텐데도. 개가 너무 그립다. 개의 긴 털이 들러붙은 부드럽고 따뜻한 머리통이 그립다. 거기에 턱을 대고 개의 가슴팍 아래 손을 넣어서 개가 숨 쉬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리고 네가 있는 게 얼마나 위로되는지를 말하고 싶다. 너무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곁에서 견뎌주느라 너무너무 미안하고 수고했고 고마웠다고 하고 싶다. 허나 그럴 수 없다.


 개는 이미 갔다.


 고양이도 갔다. 정신적으로 몰린 상황에 거의 생존본능 수준으로 잠에 빠진 내가 자기 엄마와 몇 마디 애옹대는 울음소리를 잡아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고양이는 떠났다. 스티로폼 집은 이제 빈 집이 됐다.


 내 안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키우던 애도 아닌데 상실감이 너무 컸다. 그래서 보호소 분양을 알아봤다. 처음엔 자신이 있었는데 점점 모르게 됐다.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다. 애초에 개와 고양이의 행복이 어떤 종류인지도 잘 모르겠다. 만일 그게 보호자와 함께 살며 사랑받는 일이라면 나는 자격이 없다. 내 자신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데 자기 걸 다 주는 애들과 같이 사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다.


 시든 식물과 아픈 동물. 죽은 식물과 죽은 동물. 장미 가시에 긁혀 생채기가 나고 코가 막히고 재채기가 나고 상처가 가려워지면 욕을 할 것이다. 그리고 신경쓰지 않겠지. 넌 식물이니까. 자체적으로 돌아다니는 애들이 아니고,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인데 내가 움직여서 나를 상처입힌 거잖아. 그런데 동물은 자기가 와서 내 몸에 상처를 내고 간다. 다가오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는다. 그건 어쩌면 두려움과 닮은 감정이다. 이제는 보지 않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로켓(얘도 동물이잖아?)이 이런 말을 듣는다. 넌 남들이 조금만 사랑해줘도 네 마음의 구멍이 얼마나 큰 지를 상기하게 되니까 자꾸 남들을 밀어내는 거다. 정확하지 않지만 이런 취지였다.


 개도 가고 고양이도 갔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서 어쩔 줄 모른다.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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