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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Jun 08. 2020

낯선 슬픔

20. 06. 08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패악을 떤 지 한 달 가까이 지나온다.


 오늘은 병원에 갔다.


 진료실 앞에 앉아서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요약해서 전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머릿속을 지워버렸다. 대학병원 정신과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온다. 마름모꼴 체형에 몹시 흉포한 짓거리를 해대며 환자 대기실을 어지럽히는 거한이며 머리칼을 엷은 보라로 물들인 자그만 사람이 다들 같은 목적을 두고 한 공간에 몸 담고 있다. 그 중 위생 상태 양호하며 무난한 검은색 복장을 입고 다소 수줍은 태도로 앉아 있는 대학생은 갖가지 병질을 치료하기 위해 스무 살때부터 얼굴을 마주한 의사와 한 달에 한 번 하는 진료를 받기 위해 팔짱을 끼고 기다린다.


 내 이야기를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떤 여과를 거칠까 고민하며 말을 떠올리는 일도 우는 일도 생략해버렸다. 내 목표는 내가 생각보다 아주 잘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중에 가장 의욕 넘치는 상태이고, 가끔씩 이유 모를 불안에 떨기는 하지만 내 안의 칙칙한 냄새를 맡게 된 순간부터 생각해본다면 지금이 꽤나 최상의 컨디션임을 의사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내가 참 기특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난 어쩐지 내가 진짜로 전하고 싶었던 말이 중간에 와해되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모호한 불쾌감에 빠졌다. 나는 기특하다는 말을 들으려던 게 아니었다. 나는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지금도 느껴지는 이 감정은 오랜만에 찾아온 두려움일까, 아니면 낯선 슬픔일까.


 처방전은 한 달 전과 똑같았다. 그때 나는 집에 오면서 울었다. 맥도날드 포장지를 안고 조수석에 앉아 가족에게 죽고 싶을 때가 있느냐고 물었다. 집에 와서도 엉엉 울었다. 눈물을 흘린 기억을 되뇌이면 금세 눈물이 난다.


 응급실에서 입원한 언니와 치료받는 어머니 사이를 뛰어다니던 중에 걸려온 지구대 팀장 전화에다 대고, 아버지라는 말을 발설하는 것조차 두려워서 '그분'이라고 말한 내게 '아버지한테 그분이 뭐야~ 허허허.'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지구대 팀장은 자기가 아버지 연배이기도 하고 딸내미 같아서 말을 놓겠다고 했다.


 내가 4년간 가족적인 고통 속에서 정신과를 다녔다고 했더니 놀랐다.


 아버지가 많이 힘드신 것 같으니 잘 달래드리고 애교도 부리고 잘 해드리라고 했다.


 그렇다. 아버지는 암으로 형제를 잃고 다시 암으로 형제를 또 잃게 생겼으니 내가 가여운 아버지를 보듬어야 하는 것이 맞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이완용과 일제강점기를 찬양하고 독도가 일본 땅이라 부르짖고 식탁 의자를 들어 식탁 위의 컵들을 모조리 깨버리고 내 작은 화분을 깨버리고 한 몸 같은 가족이 쓰러지고 울며 빌어도 나는 112를 불러서는 안 됐다.


 아버지 말마따나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괜찮아질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무 나약하고 겁 많은 내가 그렇게 해버렸다. 일을 크게 만들고 말았다.


 나는 어쩌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순간에 속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겼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스쳐가는 가족사의 일부일 뿐이다.


 그럼 나는 지금 왜 우는 걸까? 가족이란 이렇게나 슬픈 것인가?


 PMS 시기도 지난 지금에 와서 나는 몹시 슬퍼한다. 그리고 통학 차량에 타면서 우산 없이 선 내게 삼단 우산을 건네주던 그 애를 생각해본다. 나는 그 애의 최후를 부럽다고 생각했다. 부끄럽게도.

 우산을 쓰고 마중 나온 엄마를 발견해 삼단 우산은 바로 돌려주었다. 그런데 내 속에는 아직도 빚진 우산 하나가 남아 있다.


 나는 그 애가 왜 죽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윤리 과목을 담당하던 최 담임 선생님은 내가 자꾸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 게 공부가 하기 싫은 현실 도피라고 일갈해주셨다.


 나는 또한 그 순간에 속지 않으려고 분투해왔다.


 언젠가 만났던 사람은 술에 잔뜩 취한 채 내가 참 attractive한 사람이며 평범하게 산 편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그때는 우쭐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 사람의 기타 소리가 듣고 싶다.


낯선 슬픔의 출처를 알 수 없다. 언젠가는 나였다가 언젠가는 어머니였는데 언젠가는 아버지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지구대 팀장과 최 담임의 목소리가 나를 아프게 한다.

 기특하다는 말도 나는 조금 아프다. 나는 그냥 확답이 듣고 싶은 것 같다. 기특하다 장하다 수고했다 따위가 아니라, 네가 겪은 그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너는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팩트FACT들.


 그런 말을 못 들어서 나는 자꾸 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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