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나는 조금 이상한 아이였다.
남들보다 일찍 온라인 세계를 접하며 그 나이대 몰라도 좋을 것들을 알기도 하고, 일찌감치 예쁘고 화려한 캐릭터들로 팬 픽션까지 써가며 공상에 빠져 살았다. 초등학교 수업시간에는 황금 갑옷을 입은 엄마가 황금 말을 타고 나를 데리러 오는 상상 따위를 했다. 당연히 수업에는 집중을 못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애초부터 적응력이 그리 좋은 아이는 아니었다. 초등학교는 물론 유치원 시절부터 친구 사귀기를 어려워하고 뭐든 불안에 떨었다. 바깥놀이를 하러 나가는 것도 싫고 식사 시간은 지옥이었다. 당시 유치원 교사들의 학대도 한 몫 했지만, 그냥 애초부터 예민하게 태어나버렸다. 몰래 급식을 테이블 아래 던져 발로 차거나(그러다 다른 아이 발 밑으로 넘어가면 소동이 일어났다.) 매일 토하고 울고 코피가 난다며 엄살을 피우고 꾀병을 부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불쌍하다. 알몸을 넘어서서 온 피부를 다 까놓고 남들 앞에 선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런 잔인한 비유를 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 시절 괴로움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초등학교에 들어와서도 순탄치 못한 생활을 했다. 공부는 어렵고 눈물만 나고 교실 규칙은 지키기 싫었다. 뭐든간에 너무 무서웠다. 2천년대 초반 당시는 물론 그 전 세대보다야 폭력이 덜한 때였다지만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머리에 주먹질을 하고 폭언을 쏟던 시절이었다. 아니면 그냥 내가 그런 학교를 다녔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소울메이트를 만나거나 누군가와 절교하거나, 나잇값 못 하는 어른을 만나길 반복하면서 나는 중학생이 됐다. 중학교 1학년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수학 성적이 22점까지 떨어지거나 사진관 아저씨가 학생증 사진 보정을 이상하게 해서 내 인중이 사라졌던 걸 제외하면 약간의 트러블은 있어도 평탄한 나날이었다. 문제는 다음 해, 2011년에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필요성도 못 느꼈고 재미도 성취감도 없었다. 내 미래와 현재 성적의 미싱 링크를 두고 번민하지도 않던 중, 지독한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 아래 나는 굴려졌다. 입맛을 잃고 체중도 잃고 하루하루 울며 살다가 어느날, 텅 빈 내 방 벽을 쳐다보니 무척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말했다. 티비 보는 거랑 벽 쳐다보는 게 똑같은 거 같아요. 난 벽을 보며 웃었다.
그때부터였다!
우울이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우울에는 밑바닥이 없다.
우울할 때마다 뭔가가 내 발목을 단단히 잡고 늪으로 끌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 힘이 너무 세서 혼자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고, 힘을 푼 채 체념하고 있다가는 한계점 없는 심연으로 더 더 가라앉고 만다. 내 생각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걸 알고 있다. 지금 내가 머리 위로 뒤집어 쓰고 만 이 우울이 무시무시하게 넓고 깊고 또한 두텁다는 걸.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조그만 천 면적으로도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만물을 가려버리는 값싼 수면안대처럼 나는 그저 이 막막함에 우울이란 녀석은 이불 몇 겹만큼 클 것이라며 지레 겁에 질려 있는 건 아닐까? 빠져나가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그만 우울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2016년 아마도 겨울.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새삼 글로 쓰고 보니 든든하다. 항우울. 우울에 대항한다는 의미다. 당시 내가 복용한 약은 브린텔릭스, 알프람, 아빌리파이였다(지금과는 약간 다르다.). 아빌리파이는 아마 틱 장애를 위한 처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아동기부터 눈을 깜빡이거나 소리를 내거나 특정한 말을 반복하는 틱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까지 계속됐다. 그러다 점차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만 나타나는 수준으로 호전됐다. 참고로 20대 중반을 지난 지금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증상만이 남아 있다. 생활이나 건강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상담을 해보아야 하나 싶다.
아무튼 2011년 처음 내가 우울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서(사실은 훨씬 전부터 우울했지만) 2016년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또, 내 우울증은 어쩌다 그렇게 심해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