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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Jan 30. 2023

김씨의 우울: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나는 그런 건 없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죽는 거고, 옛 미스터리 예능방송에서 정체모를 아저씨가 풀었던 이야기 보따리처럼, 웬 어두컴컴한 산길을 걷거나 저승사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꺼진 티비처럼 아무것도 없어지리라 믿었다. 그러다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없다’는 건 뭘까?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까? 그 또한 존재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내가 유일하게 죽었던 시절, 죽은 채 보냈던 나날들이 바로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언제나 허공을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난 사회 속에서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을 공포스럽게 느끼고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전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내 하루를 지배당하는 생활이 3년, 1095일, 26280시간, 1576800분, 94608000초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죽은 채 보내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죽었다. 물리적으로는 죽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죽었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죽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담임 교사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내 상태를 정리하자면, 누군가 인사만 건네도 조롱받는 기분을 느끼던 시기였다. 인사 해주면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나? 네 생각대로 안 될걸? 당연히 친구도 없었다. 혼자 먹는 점심시간이 괴로워서 집에 와서 밥을 먹다가 아까운 급식비를 이유로 진탕 혼났다. 소풍도 수학여행도 혼자 다녔다. 다 어려웠다. 초중학교보다 쉬운 점도 있었지만 어려운 일이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착한 친구들이 몇 있었기에 괜찮게 지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학년 시절 만난 담임 교사가 섬세한 사람이었다. 자주 상담을 했고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늘 언제 죽지 생각했다. 가족과 트러블이 생기면 방문을 잠그고 가슴팍을 마구 때리거나 벽에 머리를 박거나 커터칼로 자해를 했다. 그때는 그 자국이 너무나 안정이 되고 위로가 됐다.


성적표는 난장판이 됐지만 나쁘지 않게 지내던 나날이었다. 자주 우울했지만 가끔 행복했다.

어느 한 날까지는 그랬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뇌 한 부분이 죽는 것 같다. 바짝 말라서 시드는 감각을 느낀다. 그렇지만 해야겠다. 2014년 11월 19일에 한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사는 곳과 내가 다니는 학교와 그 애가 죽은 독서실을 이으면 이등변 삼각형이 되는 거리였다. 그 애는 내 옆자리에 앉았었다. 그 애는 내게 우산을 빌려주고 나는 그 애에게 시리즈가 되는 책의 첫 권을 빌려주고 그 애는 내게 윤리교육과에 갈 생각이라고 말했으며 점심시간 전에 언제나 동아리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했다. 그 애는 발표 하기를 싫어했고 발톱 하나를 다쳤고 키가 작고 머리가 부스스했으며 안경을 꼈다. 그리고 언제나 더워 보였다.


언젠가 열린 학교 바자회에서 향수를 산 내가 사용법을 잘 모르고 머리에 그걸 뿌렸더니 교실로 들어와 웃으며 너 머리에 향수 뿌렸다며? 했다. 그 애가 가져온 초코파이를 내가 오백 원에 샀다. 지금 생각해보니 금전적인 피해가 막심하다. 그 애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 애는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 그 애는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애 납골당에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처리됐다. 어느날 아침 그 애가 죽었음을 담임 교사가 알리고 난 뒤에 나는 하루종일 울었다. 다음날 그 애 책상에 국화 꽃다발을 사다 놓았다. 그 애에게 보내는 편지를 노란 메모지에 써서 책상에 붙였다. 교육청과 연계된 기관인지 뭔지 어딘가에서 마음을 추스르는 법을 알려주러 왔다. 하루 이틀 지난 뒤 학교에서 책상을 빼냈다. 3학년 첫 모의고사 때 국어 만점을 받은 내게 저것은 말이 안 되며 뭔가 잘못된 것이리라 말했던 어느 국어 교사는 출석 시간에 대답 없는 그 애 이름을 연신 부르다가 아, 맞다! 했다. 다른 친구는 그 애 책상이 빠지기 전 성경책을 가져와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이라며 잠언 파트를 펼쳐두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했다.


유일무이한 친구였던 것도 아닌데 내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 즈음 나는 연속해서 자살에 실패하고 있었다. 넌 했는데 왜 난 안 되지?! 진심으로 몰랐다.


다시 내가 담임 교사에게 살해당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해를 지나 6월쯤 되었을 때 우울증이 극에 달한 나는 담임 교사를 찾아갔다. 2학년과 3학년, 2년 연속 같은 교사였다. 그 교사는 그 애가 가고 싶어하던 윤리교육과를 나왔다. 왼쪽 책장 맨 윗칸에 주홍색 표지의 <서양철학사>를 꽂아두고 지냈다. 나는 그에게 너무 힘들고 자꾸만 자해를 하게 되고 자살 시도를 하게 되고 그 애가 안 잊어진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공부하기 싫어서 하는 현실 도피라고 일축했다.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래서 잠을 못 자기 시작했다. 분에 못 이겨 씩씩대느라 새벽을 보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서였다. 공부하기 싫어서 우울해하는가보다. 그러니까 성적이 잘 안 나오는 건 내가 머리가 나쁘고 게을러서야. 나는 지금 내 게으름에 그 애를 이용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화가 났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놓고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지냈다. 결국 수능은 보던 대로보다 좀 더 안 좋게 나왔다. 그러자 담임이 다시 말했다. 왜 이렇게 못 봤어? 며칠 뒤 11년간 키우던 강아지가 하늘나라로 갔다. 슬프고 애석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났다. 분노와 짜증을 빼면 아무것도 안 느껴졌다. 그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대학에 와서도 난 죽을 것 같았다. 자살이라는 단어만 봐도 눈물이 나고 숨이 가빠졌다. 정신과에 방문했다. 내 가장 가까운 친구가 함께 와주어서 마음 놓고 이야기했다. 약을 먹으니 머리가 텅 비어서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훨씬 편했다.


여기서 신기한 건, 초진에 받았던 브린텔릭스정은 5mg이었는데 지금은 20mg이라는 것이다. 난 왜 더 나빠졌을까? 확실한 것은 내 우울증에는 유전적인 요소와 그 애의 비중이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다른 복합적인 원인들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수준으로 많다는 점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차차 소개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그러던 중 우연히 동창을 만나 담임 교사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난 많은 상상과 생각을 했다. 내가 죽으려던 동안에 그는 자신의 와이프와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1학년 시절 담임 교사는 나와 꽤 친했는데 갑자기 웬 메시지로 경고를 보냈다. ‘연락을 안 한다면 기억에서 지워버리겠다!’ 난 카카오톡을 탈퇴했다. 그리고 이런 씨팔 이 학교 교사들은 왜 다 이 지랄이지? 울분을 토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유학을 결정하고서 휴학계를 냈다. 이 한 문장에는 많은 일들이 생략되어 있다. 처음으로 가족에게 서러움을 표출한 일, ‘심리부검’에 처음 관심을 가진 일, 그간 만났다가 헤어진 친구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우울과 관련성이 낮은 이야기들은 ‘차차’ 소개할 생각이다. 다만 한 마디만 하자면 남자친구가 생기고 묘하게 바뀌어가는 친구들에 주의하라.


유학생활 첫 일 년은 룸메이트와 함께 보냈는데, 환경을 바꾼다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접하고 느닷없이 희곡에 빠졌던 걸 빼면, 여전히 밤에 부엌에 걸린 식칼을 쳐다보느라 잠을 안 잤다. 가장 즐겨 듣던 음악이 ‘언니네 이발관’이었으니 말 다 했다. 


변함없이 우울하고 이석원만큼 예민해서 고등학생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친구를 못 만든 채 지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과 낯선 언어들은 재미있고 즐거웠다. 할 일이 많고 적응하기 바쁘다보니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끔 울긴 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사람들도 모두 친절했다. 그럼에도 글을 썼다. 글은 내 마음과 머리를 비우는 쓰레기통 같은 것이었다. 모티브는 전부 내 우울감에서 뽑아 썼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지만, 그런 글쓰기 방식으로 취향이 적중한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아 글을 쓰는 동기를 얻었다. 취미가 맞는 친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밤에 잠을 잘 자다가 생각했다. 이제는 너를 놔 줘야지… 재생목록에 언니네 이발관을 빼고 카라 ‘STEP’을 넣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아주 힘들게 그러나 조금씩 지옥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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