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여러 고을들은 왜적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역사 이래로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들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지리산의 여러 고을도 그 피해지역이 되어왔다
특히 남원은 그 현장의 실체가 보이는 유적이 많다 나라 급에 든 큰 것만 들추어보아도 고려 말 때 황산대첩과 조선의 정유년 남원성 전투가 있다 왜구의 침입은 백성들의 피폐로 이어졌으나 한편으로는 국난국복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바쳐 고을과 나라를 구해내는데 앞장섰다
출중한 전략 전술의 사용자인 장군 못지않은 백성들의 공심은 지혜를 내고 고을과 나라를 지켜냈다 그 이야기 하나가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 보이고 그것은 바닥난 군량미를 대신해낸 종이 풀대죽 이야기이다
1597년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 6만에 가까운 최신 무기로 무장한 왜군의 정예부대에 맞섰던 백성들의 남원성 전투에 든 이야기에 그것이 있다
작은 남원 성안에 든 조명연합군과 백성들 만여 명이 6만의 왜군과 싸우고자 하나 무기와 병사와 더불어 군량미 부족이 큰 난제였다 인근 고을에서 가져다 놓았던 군량미를 다 합해도 만여 명의 군량미로는 며칠을 버텨낼 수 없는 처지였다
전쟁을 대비한 백성들은 어떤 지혜를 내었을까? 그것의 흔적은 당시의 고지도에 보인다 남원성 동문 밖 근처에는 종이를 만드는 지소가 있었다 지소의 위치는 상식적으로 닥나무와 흐르는 맑은 물을 기본 환경으로 가진 곳이어야 한다
그러한 환경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곳에 자리한 남원성 밖 지소의 큰 역할은 전쟁 비상식량 제조소 기능이었다 여러 작은 방(읍면)에서 한지 완성품을 가져오면 여기에서 한지 한 장에 맵쌀과 찹쌀을 섞어 끓인 풀을 바른 후 그 위에 한지를 덮어 건조했다가 말아서 남원성 군량미 창고에 쌓아 두었다 또한 남원성 민가의 방벽에 도배지로 발라 두었다
군량미가 바닥나면 집집마다의 벽에 발라 두었던 종이를 뜯어다가 물에 불리면 두 겹 되었던 종이와 종이가 분리되고 그 속에 들었던 쌀풀이 풀어져 나왔다 이 쌀풀을 모아 성안 밭두렁의 풀을 뜯어다 함께 끓이면 풀대죽이 되었다 이것을 비상식량으로 사용하였다
성이 함락되면 구원군이 올 때까지 10일은 비축한 군량미로 버티고 5일은 비상식량 풀대죽으로 버텨내어 보름을 지켜내는 전략을 가졌던 것이다
"원촌 선생 우리 조상 중에 남원성 밖 지소에서 종이 맹글던 분이 계셨는디 그 양반이 고을 백성 많이 살렸대 매년 풀대죽 종이를 맹글어 놨다가 기근에도 썼대잖아"
옛날 이맘때는 닥종이를 만드는 시기였다 공동체의 단단한 끈은 종이 만드는 일처럼 모여서 솜씨 내는 데 있다 백성의 고을 백성의 지혜를 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