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는 비취색이 흘러

CERULEAN BLUE

by 원성진 화가

2025/01/03/10:00

이른 아침, 베네치아를 떠나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였다. 떠남과 도착, 익숙함과 낯섦,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했다. 떠난다는 것은 한 시점의 나를 남기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로 나아가는 행위다. 인간은 늘 두 지점 사이에 존재한다. 지금의 나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 사이에서.

물결이 찰랑이는 아드리아 해를 뒤로하고 알프스를 향해 가는 길, 창밖의 풍경이 점차 변해갔다. 땅은 점점 높아지고, 공기는 서늘해졌으며,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봉우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설경은 이 세계가 신의 붓끝에서 탄생한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졌다. 산맥이 길을 따라 거대한 벽처럼 솟아오른 모습을 보며,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실감했다. 이런 장면을 볼때마다 드는 누구나의 생각이지만, 우리가 창조해 낸 문명이란, 저 영겁의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가? 인간은 스스로의 위대함을 믿으려 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그 믿음의 균형을 되돌린다. 산맥은 말이 없지만, 모든 언어보다 오래된 설득력을 지닌다. 역시나, 침묵이 훨씬더 강하다. 우리는 그 앞에서 작아진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음 속에서 진실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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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잠시 멈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흘러든 강물을 바라보았다. 비취색의 맑고 투명한 물결이 햇살을 받아 흔들릴 때, 그것은 세상의 순수를 담고 있는 듯했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자연의 조화 속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가? 그러나 그 덧없음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를 찾아 헤매고, 언어와 예술로써 우리의 흔적을 남기려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역설이다. 덧없음을 인식하면서도, 그 위에 의미를 세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록하고, 사랑하고, 창조한다. 어쩌면 예술은 인간의 유한성을 견디는 가장 고귀한 방식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 후에 스스로를 정의한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은 고정된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행동 속에서 그 의미가 형성된다. 자연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야 말로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 아닐까? 자연을 지배하려 하기보다는, 그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야 말로 더 깊이 있는 성찰이 아닐까? 존재는 완성된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다시 써 내려가는 초고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함께 자기를 고쳐 쓰는 존재다. 인간이란, 세계에 맞춰 자신의 의미를 재배열하는 끊임없는 편집자다.


그렇게 알프스를 흘러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도시, 그라츠였다. 처음 마주한 도시는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이 뒤섞인 듯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 중세의 유적이 간직한 과거의 시간성과, 현대 건축이 빚어낸 새로운 질서가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역사는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었다. 인간의 의식과도 같았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듯, 그라츠 역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기억은 과거의 창고이자, 현재의 작업실이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새로운 ‘나’를 조립하며, 그 과정에서 과거는 늘 갱신된다.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뮤르 강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왼쪽으로 현대미술관 쿤스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온다. 우주에서 떨어진 거대한 생명체처럼 보이는 이 건축물은, 주변의 전통적인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존재 자체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전통과 현대, 보존과 혁신이라는 대립되는 가치들이 한 도시에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보였다. 이는 도시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맞이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간직하고자 한다. 변화는 존재의 구조적 조건이다. 우리가 고정된 중심을 상실할 때, 비로소 세계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정체성은 지속적인 협상의 과정이다.

키르케고르는 "삶은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긴장과 균형 속에서 삶은 지속된다. 그렇다. 삶은 이론이 아니라 연습이다. 매 순간의 선택이 곧 사유의 문장이다.


전시장 내부에서는 미디어 아트, 증강현실, 인터랙티브 설치미술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작품들은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했다. 디지털 이미지와 소리, 움직임이 결합된 공간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과연 실재인가? 아니면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현대의 동굴은 스크린과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림자의 유무가 아니라, 우리가 그 그림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모든 허상은, 또 하나의 실재일지도 모른다.


전시된 작품들은 기술적 혁신을 넘어, 시대적 아픔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전쟁, 난민, 환경 파괴, 인간 소외 등의 주제들이 디지털 매체를 통해 새롭게 표현되고 있었다. 예술은 미적 즐거움을 넘어, 사회적 인식과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적 역할이 아닐까? 인간은 본래 유한한 존재이지만, 예술을 통해 영원을 갈망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고민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행위 속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예술은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존재의 장치’다. 그것은 시간을 붙잡고, 감정을 번역하며, 불가능한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예술 속에서 인간은 잠시 영원을 흉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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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츠를 떠나 빈으로 향하는 길, 다시 알프스의 장엄한 풍경이 펼쳐졌다.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가? 우리는 종종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사실 변화 속에서야말로 진정한 생명이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 안에서 존재하며, 스스로 그 의미를 형성해 나간다"라고 말했다. 인간과 자연이, 과거와 미래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대화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인간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정의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존재는 수학의 증명이 아니라, 시의 해석이다. 정답이 아니라 고백,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해석하며 살아간다.


알프스의 웅장한 산맥과 그라츠의 독특한 조화는,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기억은 결국 풍경의 다른 이름이다. 풍경은 사라져도, 그 순간의 사유는 내 안에서 계속 빛난다. 그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남기는 진짜 흔적이다.


알프스의 기억


아드리아의 물결이 이별을 찰랑일 때,

산맥은 솟아오르고, 바람은 서늘해졌다.

태양 아래 눈부신 만년설,

그 아래 흐르는 비취 빛 강물.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곳,

고풍스러운 벽돌 틈으로

유리 빛 곡선이 낯설게, 그러나 당당하게 서 있다.

쿤스트하우스, 시간의 틈에서 빛나는 존재.


전쟁과 바다, 고통과 희망,

침묵 속에서 울리는 공감의 메아리.

전통과 현대가 맞부딪쳐

새로운 길이 탄생한다.


산맥 위에 스며든 저녁노을,

알프스는 말없이 나부끼고,

강물은 시간을 유영한다.

그라츠의 기억을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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