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책임회피 소송사회
“민원이 가장 무섭다!! “
공무원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다수가 즐겁게 누릴 수 있는 공공시설이라도 한 명이라도 민원을 제공하면 공공기관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곤 한다. 문제나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폐쇄하고 책임자를 추궁하고 문책하거나 아니면 자른다.
조직의 존립 목적이 무엇인가? 조직 구성원의 안녕과 설립 목적에 따라 공공 서비스를 잘 운영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기관장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목표가 되면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 해결방식이 기관장의 안위를 지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면 문제를 반영해서 최선의 서비스로 개선하기보다는 그 문제 주변부와 책임자를 문책하고 다시는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발본색원하는 방식으로 민원의 소지 자체를 제거한다.
예컨대 설사 그 기관의 존립목적이 어린이나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사회적 혁신을 위한 기관이라 해도 일단 민원이나 문제가 발생하면 어린이와 시민이 그 공공 서비스 혜택을 볼 수 없는 방향으로 차단되고 제거하는 방향으로 문제해결 방식이 작동한다. 관료조직에서 분란과 민원은 나쁜 것이라는 대 전제가 조직의 존립 목적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은 본질적으로 '분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공공기관에서 예술을 서비스로 다룰 때 상충하는 두 가지 가치가 항상 긴장을 일으킨다.
예술은 문제를 일으키고 질문하게 하고 논쟁을 촉발시킨다. 특히 사회참여 예술은 더욱더 그런 성향이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다. 단순히 환경미화를 하는 것과 공동체에 의미 있는 질문을 촉발시키는 것의 차이가 Social Engaging Art와 생활예술의 차이점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생활예술을 반대하지 않는다. 도리어 양질의 생활예술이 일상 속에 뿌리내리기를 바라고 좀 더 확대되기를 바란다. 일상이 풍부해질 수 있는 토양이 더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그것이 세월의 힘을 견뎌 내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생활 속 글쓰기가 풍부해지는 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글이 몇 세기를 견디는 문학으로 남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100년을 넘어도 남는 문학작품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기록물과 창작물은 나의 작품을 포함해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한다.
지역 공공 미술관 야외 마당에 설치작품 의뢰를 받았다. 미술관 마당에서 어린이 청소년 7여 명이 망치질 등을 하며 함께 놀이 소굴, 구조물을 만들었다. 높은 곳에 거침없이 올라가고 조심성 많은 아이는 알아서 아래쪽에서 놀았다.
하지만 미술관 측에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안 된다 지저분한 건 치워라 등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스스로 책임하에 자유롭게 놀기로 서약을 하고 소수 정예 멤버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문제가 나면 돌변하는 것이 일반 시민들이라는 것이 책임자의 설명이었다. 민원이 나면 경위서 쓰고 아주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다.
맞았다!! 문제가 생기니 돌변하였다.
바로 그 미술관 책임자가! 그의 말은 자기실현적 예언이었다.
설치 중 설치를 위해 인도와 잔디밭에 하차해 놓았던 목재에 산책 중인 강아지와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다. 그 강아지는 평소 습관 데로 잔디밭을 보고 흥분하며 달려갔는데 어둑하고 앞에 마침 목재물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건 예술작업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니다. 사소한 부주의와 예기치 않은 강아지의 흥분이 만난 사고였다. 강아지 보호자가 미술관에 관리 소홀과 적재의 책임을 묻고자 전화했을 때 미술관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강아지 다리골절 수술비가 기백이 들었는데 미술관에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민원이었다.
미술관에서 청소년들과 위태한 놀이터 만들기 워크숍을 6회 진행할 때는 한 번도 얼굴을 비치 지 않았던 미술관 관계자들이 우르르 나를 둘러싸 모여 않았다. 첫 번째는 그 민원인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인 내게 그 민원이 미술관까지 넘어오지 않도록 내선에서 책임지기를 주문하였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 스스로 이 경계가 애매한 사건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민원인을 따로 만나 두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다행히 그분이 제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서로 공통점도 발견하고 서로 호혜적인 입장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하였다. 제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하셔서 미술관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하셨다. 더 나아가 나중에 제가 위로의 마음으로 전달해 드린 소액의 수술 비용도 다시 돌려주셨다. 나의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이라도 더 사주라고... 사실 그분은 미술관의 안일하고 회피적인 태도에 더 화가 나셨고 사실 수술비를 돌려주기까지 청소년인 아들과 남편과 함께 가족회의까지 했다고 한다. 가족 회의 하면서 이 상황에서 책임을 진지하게 지고자하는 내 태도를 보고 속상하고 분노하는 마음이 이미 풀렸고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분의 청소년 아들이 말했다고 한다. 그 아들이 이 돈을 받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고맙다 T T)
잘 해결하였다는 합의 내용을 미술관에 전달하였고 전시를 마칠 무렵 그 관계자 분은 나중에 나를 따로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최대한 왜곡 없이 들은 그대로 적어보고자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최 작가가 아직 젊어서 잘 모르나 본데 일 처리는 본래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얼굴을 보고 일을 마무리해야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문자 메일로 일처리 하나?”
“최 작가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이런 일 있으면 법적으로 서약서를 다 받아 놓아야 해.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그분은 그분의 오랜 시간 공공기관에서 근무하신 풍부한 경험을 잘 내재화고 잘 실천하신 분이었다. 미술관 측은 나에게도 호혜적으로 합의를 마친 민원인에게 추가로 서약서 받으라고 요구하였고 작가인 나에게도 서약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건 이 민망한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계약직 큐레이터에게 시켜서 처리하였다. 이 일을 모두 처리하는 동한 책임자는 한 번도 나타난 적도, 나와 통화한 적도 없다. 그 불상한 큐레이터는 무척 민망해하고 미안해하면서 시킨 거라면서 나에게 서약서를 내밀었다. 두말 않고 사인을 해주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헤어질 때 나를 따로 불러서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그 민원인과 호혜적으로 합의를 마친 상태에서 이런 문서를 들이미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제가 이미 미술관에 책임을 더 이상 묻지 않기로 사인을 해드렸으니 그것으로 모든 책임을 저에게 전가하시면 된다."라고 말씀드리고 미술관을 나왔다.
그리고 그 미술관 책임자는 그 민원인이 신상이 드러나기 두려워하는 걸 보니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 민원인을 다시 한번 미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몰면서 대화를 마쳤다.
오랜 시간 공공기관의 생리를 풍부하게 경험한 연로하신 어른의 경험이 위와 같은 것이라면 그런 경험이 인생에 유의미할까? 그분 발언에 의하면 이상하게도 그분의 인생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가득한 것 같다. 내 인생에는 이상하게도 은혜를 입은 사람,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 호혜적인 사람,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후자의 세상을 만나기를 바란다.
자유롭게 놀며 스스로 책임지고 문제가 있으면 하나씩 해결해 가고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기쁨과 호혜를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나는 이러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미술관 마당에 엉뚱한 조형 실험물을 세웠다.
아이들이 뛰노는 것 자체가 이 사회에는 위협이고 '긴장'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자네가 아직 세상을 안 살아봐서 모르나 본데....”라고 운을 띄우며 젊은이들을 가르친다.
예술이 '자유'에 대해 말할 때 관료조직은 소송과 책임회피에 대해 논한다.
맞다! 나는 마흔이 다 되도록 아직 철이 덜 들었다.
아니 '철'이 의미하는 바가 세상이 말하는 그런 종류의 의미라면 아예 들기를 포기할 셈이다. 소송과 사실증명서와 책임추궁 문서가 오가는 세상에서 서류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이들의 놀이에는 목적이 없다. 싸우고 죽고 다시 부활한다.
그 순간만 있다.
왜 나라고 세상 험악한지 모르겠는가?
왜 나라고 바보 천치라서 이런 시키지 않은 위험한 일을 하면서 위태한 삶을 이어가겠는가? 왜 나라고 배운 게 부족해서 편리하고 쉬운 길이 뭔지를 몰라서 이렇고 살겠는가?
다만 내 아이들이 살았으면 하는 세상이
책임회피와 떠넘기기, 비루한 변명과 책략과 계략과 소송이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호혜적으로 서로 책임을 짊어지고, 공동선에 기여하며, 변명하지 않으며 솔직하게 있음과 없음을 시인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서이다.
세상에는 주름이 있다. 그 주름을 따라 물길이 점점 커지고 이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다. 내가 만드는 주름이 후대에 이로운 방향에 미약하나마 보태느냐 아니면 과거의 시스템을 강화시키는 방향이냐의 선택 길에서 다만 전자의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비루하고 어려운 일이 여전히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방향을 바라보느냐는 누구나 쉽게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의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