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지난 7월 17일 썼던 글입니다. 문재인 정권에서 감사원장을 역임하다가 대선출마를 선언한 최재형 전 원장. 그는 지난 7월 15일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하며 대권가도에 들어섰습니다. 최 전 원장의 '뜬금포'를 접했을 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 정치가 왠지 잘 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40세 이상이면 누구나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지만 문재인 정권에서 감사원장까지 역임한 인사의 대권 출마는 정치 도의적으로나 책임정치 측면에서 확실히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장면으로 보입니다. 최근 최 전 원장은 캠프를 전격 해체하는 강수를 두며 여의도 정치문법을 자신의 공식대로 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볼 때와 막상 직접 부딪쳐본 정치현실은 너무도 달랐을 것입니다.
막스 베버는 “정치란 단단한 널빤지에 강하게 또 천천히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직업 정치인도 수십년 내공으로 널빤지 뚫기에 도전하지만 대부분 나가떨어집니다. 그만큼 정치는 '열정'과 '책임감' 거기에 '균형감각'까지 갖춘다 해도 어렵고 지난한 여정입니다. 최 전 원장이 정치를 우습게 보고 대권도전에 나선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의 선한 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선함만으로 수백년 동안 강고하게 형성된 널빤지의 나이테를 차례로 뚫고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토론회에서 말문이 막힐 때마다 '아직 공부가 덜 됐다'라거나 기본적인 국민의힘 변천사마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최근 행보를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정치라는 영역을 공직자들이 얼마나 '우습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정치의 입문 과정을 이제는 시스템화 해서 정착시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정치와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에 흥미를 느끼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그들에게 열린 정치공간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청년시절부터 정치현장에서 정책의 입안과 추진과정을 경험하면서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태도를 습득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정치를 학습한 청년들이 널빤지 뚫기에 도전해야 강하게 또 천천히 오랫동안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무슨 전직 기관장이나 변호사 판검사 타이틀만 가지고 정치에 도전하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는 안 봤으면 합니다. 요즘 청년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젊었을 때 어찌어찌 해서 딴 스펙과 기득권을 평생 우려먹으며 청년들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알박기'에 있습니다. 경륜과 스펙만 들이밀며 대충 널빤지 뚫기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후진적이고 허술한 것입니다. 기본이 탄탄한 사회, 정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15일 국민의힘에 입당하면서 바깥에서 주유천하하며 마위에이를 가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는 '상황을 직시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 전 원장의 국민의힘 입당으로 야권의 대선후보 경쟁 구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사진은 최 전 원장의 모습. /연합뉴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15일 국민의힘에 입당했습니다. 지난달 28일 사퇴 이후 17일 만입니다. 장외 대권주자의 첫 입당으로 ‘8월 경선버스 출발’을 외치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어깨에도 힘이 조금 들어가게 됐습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사표에 잉크도 마르기 전인데 우사인 볼트도 울고 갈 속도”라며 뒤끝 작렬의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바깥에서 주유천하하며 마이웨이를 가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는 ‘상황을 직시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최 전 원장의 국민의힘 입당으로 야권의 대선후보 경쟁 구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습니다.
최재형 전 원장의 입당을 보노라면 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그의 ‘감사원장 출신 대권주자 선배’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1996년 1월 24일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했습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으로 임명된 지 만 3년만입니다. 최 전 원장도 2018년 1월 12일 감사원장에 임명된 뒤 3년 7개월 만인 2021년 7월 15일 보수정당에 입당을 했습니다. 감사원장에서 대권주자로까지 이르게 된 시간은 비슷하지만 그 속사정을 보면 천양지차입니다.
이 전 총재는 감사원장 발탁 1년도 되지 않은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영전되었다가 1994년 4월 ‘월권’ 혐의로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잘리게 됩니다. 야인생활을 하던 이 전 총재는 장외에서 ‘정치권력의 행태는 아직도 수직적, 수구적’이라며 김영삼 정권을 공격합니다. 이 전 총재는 권력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났지만, ‘강연정치’로 김영삼 정권과 드잡이를 하며 지지 세력을 점차 넓혀나갔습니다. 그러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궁지에 몰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창’ 콜업을 지시하고 드디어 그해 1월 24일 신한국당 입당을 하게 됩니다. 1994년 4월 김 전 대통령이 ‘당장 총리 그만두라’고 하자 이 전 총재가 너무 놀라 나가는 문도 찾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이회창의 정치입문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이 전 총재는 권력에 의해 축출돼 바깥에서 거의 2년(21개월)을 떠돌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대통령 감으로서 자신을 단련시키며 숙성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민심을 세세하게 살피고 국정의 최대과제는 무엇인지, 그 최종목표를 위해 어떤 전술적 정책들을 세워야 하는지 꼼꼼하게 공부했을 것입니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이런 대권주자로서의 ‘숙성기간’이 있었기에 그가 신한국당에 입당해서도 민정계 수구세력과 한판대결을 벌여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어떨까요? 야권의 저주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감사원장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퇴임 후 17일 만에 국민의힘에 곧바로 입당했습니다. 이런 초스피드 정치입문도 당혹스럽지만(정치공학적으로 시의적절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가 감사원장 재임 시절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국사에 임했는지 헷갈리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의아스러움은 최 전 원장에게 던지는 정치적 양심에 대한 질문이자 감사원 본연의 중립성 유지 여부에 대한 물음표이기도 합니다. 그는 퇴임 이후 고작 17일 동안 고민하고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 훨씬 이전부터 감사원장 넓은 집무실에 홀로 앉아 딴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입니다. 최 전 원장이 대권에 도전하려는 자기중심적인 가치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감사원의 정치적 독립과 그것을 보장하는 헌법정신입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권주자를 감별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의 지적은 최 전 원장에게 일침을 던지는 조언이자 대권주자가 난무하는 야권의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경계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최 전 원장은 앞으로 국민의힘에서 최단기간에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먼저 구체적인 국가운영 비전 수립입니다. 김 전 위원장은 최 전 원장의 정치 선언문에 대해 “그런 막연한 소리만 해서는 내가 보기에 일반 국민을 설득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야권주자들이 목을 매는 정권교체 주장은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그 실행 전술인 ‘변화와 공존’도 학생회장 수준의 출사표입니다. 17일 동안 고민했기에 그것밖에 나오지 않았겠지만 앞으로 국가운영 비전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국민의힘 의원들과의 접점을 넓히며 ‘최재형 팬클럽’을 무한확장 시켜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가 바깥에서 존재감을 뽐낼 때에야 국민의힘 의원들이 ‘원장님 어서 들어오세요’라며 상냥하게 웃었겠지만, 입당하는 순간부터 최 전 원장은 ‘원외 평당원’일 뿐입니다. 금배지를 단 의원들 대부분은 ‘당신이 대통령 한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그들의 높은 콧대를 꺾어야 합니다. 잘 될까요? 해박한 정치지식과 정책개발 능력, 현안의 경중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스킨십으로 다가가는 보스 기질 등을 두루 갖춰야 합니다. 의원들은 최 전 원장과의 만남을 통해 그에게 그런 ‘자질’이 보이는지 유심히 관찰할 것입니다. 그리고 몇 번 테스트 해보다가 아니면 금방 ‘손절’하고 다른 줄에 설 것입니다.
김 전 위원장은 최 전 원장의 국민의힘 ‘정착’ 여부에 대해 “정치라는 게 항상 그렇다. 밖에 있을 때는 근사해 보이지만 안에다 들여다 놓고는 그 다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최재형씨가 들어갔다고 해서 내일부터 최재형씨를 위해서 뭘 할 수가 없다. 정당이라는 것은 항상 밖에 근사한 사람이 있으면 욕심이 나는데, 일단 데려오고 나면 그 다음에는 책임을 지는 데가 아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 전 원장 스스로가 발광체가 돼 정치적 자질을 입증하고 집권의 가능성을 확신시켜 주지 못한다면 금세 그 거품은 꺼질 것입니다.
정치입문 기간으로 볼 때, 최재형의 17일과 이회창의 2년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최 전 원장의 온라인 입당이 던지는 신선한 변화보다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이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2021년 한국 정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보게 됩니다. 정치입문이 오래 됐다고 해서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짧다고 해서 못 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 국가의 5년 존망을 통째로 짊어져야 하는 사람의 정치입문 궤적 치고는 너무도 ‘간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고민했다고 해서 꼭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번갯불에 콩 볶듯이’ 후다닥 대권도전에 나서야만 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도 아니라고 봅니다. 감사원장이 대권주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공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국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영광스러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외치는 ‘국민을 위한 봉사’ 기회는 당장 문만 열고 나가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그것이 꼭 청와대 근무여야만 하는지는 의구심이 듭니다. 최재형 전 원장같은 훌륭한 인격의 공직자가 나라의 어른으로 남는 것이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더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