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운명’은 매우 기구했습니다. 최측근 총탄에 쓰러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영어의 몸이 됐다가 가까스로 풀려났습니다. 그 와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만이 가장 ‘무탈한’ 전직 대통령의 삶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잊힌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지켜본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소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퇴임 1년이 지나자 본인이 원했던 ‘잊힌’ 전직 대통령의 평온한 삶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평산책방’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홈페이지와 SNS(페이스북·인스타그램)를 개설한 데 이어 지난 5월 19일에는 유튜브 채널까지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전국에서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문 전 대통령도 앞치마를 걸치고 ‘책 장사’를 하게 되면서 ‘조용히 잊히고 싶다’던 그의 꿈은 퇴임 1년 만에 물거품이 됐습니다.
문 전 대통령의 소망이 ‘번복’된 것에 대해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출신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평산책방은) 문 전 대통령이 평산마을 주민과 찾아오시는 방문객들을 위해서 만든 작은 문화 공간”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윤 의원은 또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두 분이 교도소를 다녀오시면서 전직 대통령에 관한 문화 또는 일종의 모델이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문 전 대통령이 저는 하나의 전직 대통령의 문화와 모델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퇴임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롤 모델’을 만들겠다는 문 전 대통령의 소신이 평산책방 개점으로 현실화하였다는 설명입니다. 또한 문 전 대통령은 평산책방이 지역의 작은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책방 구상을 “평산마을을 비롯해 인근 마을 주민들이 언제든지 책방에 와서 책 읽고, 차도 마시고, 또 소통하는 사랑방”이 되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퇴임 후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전직 대통령이 주민들과 그 사랑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저절로 흐뭇해집니다. 특히 문 전 대통령은 세월호 동조 단식 때도 독서를 할 만큼 워낙 책을 좋아했던 터라 책방 개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다독가 ’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 아마도 책방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럽게 퇴임 후 활동 영역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 전 대통령이 책방이 아니라 ‘꽃집’을 ‘개업’했다면 지금과 같은 ‘정치적 논란’이 조금은 덜 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차피 책이라는 ‘미디어’는 이념과 철학을 주장하는 매개체입니다. 평산책방이 판매하고 있는 ‘독서 리스트’는 일종의 정치이데올로기 가이드라인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습니다. 평산책방에는 ‘문재인의 책’ ‘문재인이 추천합니다’ 등의 코너에서 ‘문재인 리스트’ 책들이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문재인의 책 리스트’를 두고 정치적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는 전언입니다. 이낙연 전 대표의 책은 판매되고 있는데 이재명 대표의 책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측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왜 특정 정치인의 책만 파느냐” “왜 야당 대표 책은 없느냐”며 입씨름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 전 대통령은 책방을 사랑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싶어 하지만 그의 이런 소탈한 소망은 이미 물 건너가 버렸습니다. 평산책방은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자들 사이에서는 평산책방을 ‘친문 세력’ 지지층 결집을 위한 일종의 ‘정치적 교두보’라고 비판합니다.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던 문 전 대통령이 왜 스스로 책 장사를 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딸 다혜 씨가 문 전 대통령을 대신해 홈페이지 계정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하는 등 평산책방 운영에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권에서는 “다혜 씨의 장기적인 ‘문재인 브랜딩 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문 전 대통령이 할 수 없이 책방을 시작했다”며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개점의 경위야 어찌 됐든 앞으로 평산책방은 끊임없이 ‘문재인’이라는 이름과 함께 국민들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는 ‘양산 당사’가 되었습니다. 특히 야권 일각에서는 퇴임 후 지지율이 40%대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잠재력을 여전히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문 전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가 사법 리스크로 낙마하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야권의 ‘정치적 소도’를 만든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옵니다. 평산책방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지지자들과 교류하면서 ‘포스트 이재명’의 후일을 도모하기 딱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재명 대표가 사법 리스크로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명운이 다했을 때 ‘평산책방’이 ‘평산정당’으로 발 빠르게 변신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옵니다.
문 전 대통령이 ‘잊히고 싶다’던 퇴임 직후의 바람을 깨고 왜 ‘평산책방’을 개점해 사서 고생을 하는지 그 연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면서 국가 통치라는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을 획득했습니다. 이런 국가적 자산을 ‘개인’의 책방 운영을 위해 쓰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 전 대통령은 책방을 사적인 이유가 아니라 재단 형태를 통해 공적으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 전 대통령이 직접 소개하거나 진보세력의 특정인과 손잡고 밀어주는 책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사적 이익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책 판매가 특정인의 ‘이권’ 문제와 연결될 가능성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은 직접 페이스북에 공개한 편지에서 “수익은 전액 재단에 귀속되고, 이익이 남으면 평산마을과 지산리 그리고 하북면 주민들을 위한 사업과 책 보내기 같은 공익사업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이재명 대표가 사법 리스크로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며 국민적 심판을 받은 문재인 정권이 ‘이재명의 대안’으로 떠오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역사적 퇴행입니다. 혹시 문 전 대통령이 누구의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평산책방을 만들었다면 이는 민주당의 또 다른 불행의 시작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자연인’으로서 퇴임 후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퇴임한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는 그 선택이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문 전 대통령의 평산책방 개점을 보면서 아직도 그가 ‘운동권의 투사’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퇴임한 국가 최고 지도자의 국민통합 책임을 망각하고 열혈 지식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한때 국가를 통치했던 대통령으로서 그 최고의 본분은 국민의 통합입니다.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국가 최고 지도자가 똑같이 껴안아야 할 ‘국민’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나만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같이 책방을 운영한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하기 싫은 일도 하라고 국민들이 준엄하게 명령한 국가 통합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우리 편’만 찾아오는 책방을 열 것이 아니라 그가 집권 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던, ‘등 돌린 국민’들을 찾아가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통합의 전도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