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021년 6월 29일 백범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할 때부터 그는 여러 면에서 한국 정치에 파격과 ‘파괴’를 보여주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에 입당을 할 때부터 ‘어린’ 이준석 대표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죽어도 싫어해 ‘패싱 입당’이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을 동원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대선에 출마하려는 후보가 그 정당 대표가 없는 틈을 이용해 기습 입당을 하리라고는 아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당시 ‘패싱 입당’은 정치에 입문한 지 몇 달도 안된 인사가, 그것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당 대표가 참석한 자리에서 치르는 입당 ‘절차’를 간단히 무시할 만큼 안하무인에다 세간의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는 ‘배짱’을 지녔다는 얘기가 돌았고 ‘보통은 아니다’는 첫 인상비평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지금 윤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비상식적이고 구태에 찌든 정치도 아마 이때부터 그 전조가 확실히 보였던 것 같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자신의 13년 정치 인생에서 가장 돌이키고 싶은 순간으로 윤 대통령의 ‘패싱 입당’을 꼽은 바 있다. 그는 지난 6월 한 인터뷰에서 “선거를 앞두고 있어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넘어갔다. 그때부터 윤 대통령이 당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장착하고 급기야 저렇게 망가지는 길로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술회했다. 이준석 자신이 어린 나이지만 정치판 밑바닥에서부터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온갖 꼴을 다 목도했을 텐데, 그런 정치경험 10단마저도 처음 당하는 기상천외한 ‘패싱 입당’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런데 그 ‘패싱 입당’마저도 윤석열의 아이디어나 배짱이 아닌 지금 한창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뒷목을 잡고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명태균씨의 ‘작품’이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물론 정치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조언이나 전략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최종 선택하는 사람은 정치인 본인이다. 여기서부터는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철학 영역이자 정치를 대하는 태도의 영역인 것이다. 명태균이 ‘그날’ 들어가라고 조언했다고 해도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어린 대표라고 해도 어떻게 제1야당의 품격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혼자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느냐’며 명태균을 꾸짖고 내쳤어야 ‘정상’인데 윤 대통령이 취한 것은 그런 치사한 ‘꼼수’였던 것이다.
윤 대통령은, 겉으로는 큰 덩치에 ‘사법고시 9수생’다운 넉살과 배짱을 보여주며 ‘호탕한 정치’를 할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 그의 잇속과 직결되는 일과 마주했을 때는 그 누구보다도 영악하고 이기적이고 잔꾀가 많은 ‘여우’로 돌변하는 정치 스타일이다. 사실 그에게 정치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금 한국 정치뿐 아니라 사회에 끼치는 해악과 스트레스는 국민 정신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이기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동훈 대표가 한달동안 구걸 반, 협박 반으로 어렵게 얻어낸 윤석열 대통령과의 ‘어중간한’ 독대는 예상보다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누가 누가 더 잘 못하는가 시합을 하는 것 같다”는 비아냥과 조롱마저 나오고 있다. ‘친 한동훈계’는 “대통령이 민심을 너무 모르는 소리를 한다”라고 비판하고 ‘친 윤석열계’는 “여당 대표가 대통령과 싸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며 거센 반응을 보인다.
국민의힘의 이런 내부 분란은 으레 있는 것이니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준 치졸하고 천박한 정치 한 장면에 더 눈길이 간다. 아마도 2021년 윤석열 대선 후보가 보여준 ‘패싱 입당’에 버금가는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한 정치 참사이리라.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김판호가 내뱉는 한 마디가 있다. “금마 성격이 원래 그래요. 지삐 몰라!” 자신보다 힘이 센 친구 조폭 두목 최형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삐 몰라’는 부산 사투리로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나만 편하면 돼”라는 뜻이다. 꼭 윤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윤 대통령과 한 대표의 회담 장면 사진을 보면서 국민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지삐 모르는’ 정치인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윤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를 용산 대통령청사로 ‘초대’해 보여준 차담은 누가 기획하고 사진을 릴리스한 지는 알 수 없으나 정교하게 기획된 한 편의 유치찬란한 퍼포먼스였다. 윤 대통령은 검찰 재직 시 20여년동안 지켜본 한동훈의 기세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한달동안 칼을 갈고 온 한동훈의 공격을 단 한 번에 제압하는 ‘호신술’이 뭐가 있을까 실로 고민하고 걱정했던 것이 80분 차담의 ‘연출’에서 안쓰럽게 드러났다.
시작부터 25분 지각. 나토 사무총장과의 전화 통화와 영국 외교부 장관의 방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 지각 때문에 한 대표는 25분동안 혼자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친한계에서는 ‘한 대표 모욕 주기’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사실 회담 지각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주 쓰던 상대 기선제압 단골 메뉴였다. 긴장하고 폭발할 것 같은 상대의 페이스를 흐트러뜨리고 집중력을 분산시켜 김을 빼는 스킬.
뒤 이어 나온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거만한 포즈였다. 지금까지 그가 용산에서 국민의힘 지도부 등과 면담을 할 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대통령실의 화면과 사진을 보면 윤 대통령은 카메라를 보며 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 대표에게 뭔가 얘기를 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이야기할 때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역이용해 윤 대통령은 계속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 대표에게 얘기를 하며 ‘자세의 우위’가 ‘복종의 사슬’로 이어지도록 확실히 컨트롤하고 있다.
그 후 큰 후폭풍을 남기고 있는 ‘작은 테이블’ 연출은 차담 기획 ‘최악의 백미’다. 역대 정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표를 청와대에 초청, 원탁 테이블에 앉게 해 집권여당 대표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김무성 대표와 청와대에서 회담할 때 큰 테이블에서 마주 않아 ‘동격’의 이미지를 연출해주었다.
물론 대통령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아무리 여당 대표라고 해도 자신의 ‘아래’로 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통령 자신도 속한 정당의 대표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곧 대통령 스스로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그런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보수정당이 아니라도 정치에서 보여주는 최소한의 상호존중 태도다.
하지만 윤 대통령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존중이나 품격은 안중에도 없다. 2021년 주인도 없는 집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이제부터 이 집에 살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예의 그 무례함이 이번 차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 대표 옆에 정진석 비서실장을 같이 앉혀놓아 한동훈을 더욱 초라하게 보이려고 했던 윤 대통령의 정치는 치졸하고 잔인했다.
윤 대통령은 식탁에 앉아서도 카메라 촬영 시간에 계속 자신의 두 팔을 쭉 뻗어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마치 검사가 피의자를 신문하면서 ‘그래 시원하게 한번 얘기해봐, 내가 들어줄게’라는 예의 습관이 나온 것 같았다. 지각-주머니 손 넣기-작은 식탁-팔 뻗기-인상 쓰기로 이어지는 윤 대통령의 회담 장면은 필자가 접한 정치 사진 중 김건희의 마포대교 시찰 사진과 함께 최악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 같다.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너보다 높다’라고 영역표시를 하는 윤 대통령의 그 동물적 감각을 우리는 정치라고 불러야 하나. 윤 대통령은 한동훈 대표가 작심하고 달려들려고 하자 정교하게 조작된 이미지 정치로 여당 대표를 시궁창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대안 없이 떼쓰기로 일관하는 한동훈의 ‘고구마 정치’도 답답하지만 윤석열의 여우같은 이미지 정치는 보수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정치의 존재 이유마저 의심케 한다.
상대를 제압할 콘텐츠도 없고 논리도 없고 타협의 기술도 없는 윤 대통령은 사진 몇 장으로 한동훈을 깔아뭉개려고 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한동훈의 무능은 익히 예상된 바이지만 윤 대통령이 그토록 잔인하고 철저하게 집권여당 대표를 짓밟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수직복종체계의 검찰에서 배우고 익힌 것이 후배가 기어오르려고 하면 힘으로 막무가내 밟아버리는 ‘꼰대의 제압기술’ 탓일까.
집권여당 대표는 아랫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국정의 동반자다. 건강한 당대관계는 대통령이 의전으로 적당히 넘길 하나마나한 이벤트가 아니라 북한이 우크라이나로 특수부대를 파병하는 중대한 이 국면에서 나라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치열하게 토론하고 대안을 도출해야 하는 중차대한 국가운영 그 자체다.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민복을 위해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지 ‘후배’를 찍어 누르기 위해 아까운 세금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동훈 대표의 빨간 파일을 마주한 윤석열 대통령의 표정은 사실 창백하고 어두워보였다. 공포와 두려움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언뜻언뜻 보였다. 믿었던 동생이 대통령뿐 아니라 부인까지 ‘내놓으라고’ 덤벼드는 그 짱짱한 기세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배짱이자 배포다. 국가 원수로서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달려드는 여당 대표를 다독이고 부인 때문에 놓친 국정 운영의 허술함을 단단히 챙기겠다는 결기 정도는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럴 용기도 담대함도 없었고 오로지 회담 지각과 주머니 손 넣기와 작은 식탁과 팔 뻗기와 인상 쓰기로 넘어가려는 비겁함과 옹졸함만을 내보이고 말았다. 그래서 대통령실이 내놓은 몇 장의 ‘후진 사진’은 정치의 애잔함과 허무함과 ‘허업’의 끝자락을 쓸쓸하게 예견하는 것 같아,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