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클럽 창립 20주년 사진전
왠지 사진이 좋았습니다. 고등학교 당시 영어선생님이던 안우식 쌤이 사진반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1학년임에도 얼른 가입을 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사진쟁이'들은 다들 착한 거 같습니다. 사진반 2학년 형들도 점잖고 후배들을 잘 대해줬습니다. 안우식 쌤이 유창한 발음(?)으로 셔터스피드와 아싸(ASA 지금의 ISO)를 강조하며 사진실기를 가르치던 때가 그리워집니다.
당시 어머니를 졸라 집안 장롱 깊숙이 숨겨져 있던 '보물' 니콘 FM2를 어깨에 메고 씩씩하게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학생 사진콘테스트에 참가했던 기억이 나네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델 누나들이 포즈를 잡으며 서 있는 모습은 무척 생경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도 잘 모르면서 '여기, 여기'만 외칠 줄 아는 자칭 '작가'들이 대포만한 망원을 들고 멀리서 고함을 지르는 그 기세에 눌려 나는 한 귀퉁이에서 소심하게 50mm 렌즈로 누나들의 미소를 살짝살짝 훔치기에 바빴습니다. 모델 누나들과 렌즈 안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혼자 얼굴이 벌개지던 기억도 나네요. 그때 처음, 사진을 잘 찍으려면 모델(피사체)을 압도하는 예리한 눈빛과 기세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용기는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고 3학년이 되면서 사진반 활동에도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5년 전쯤부터 다시 사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엄밀하게 말하면 사진보다는 '카메라'를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필름카메라 똑딱이들을 사모으는 수준이었지만 이베이에는 너무도 황홀한 카메라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때 만난 카메라가 라이카였습니다. 너무도 예쁜데다 튼튼하면서 색감도 한국사람이 좋아하는 진득한(물론 카메라보다 필름종류와 현상액 스캔 등에 의해 차이가 결정나긴 하지만) 색을 뽑아내는 라이카는 제가 생각하는 카메라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른 카메라들도 각각의 개성과 장점이 있지만 라이카는 감히 타기와 비교를 불허하는, 웅장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나의 안식처가 돼 주기도 하고, 때로는 피난처가 돼 주었던 카메라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일기장에 기록된 카메라 사진일기들을 보면 지나온 길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다시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다시 오지도 않을 길입니다. 카메라는 그것을 알기에 더 절박하게, 찰나에 과거가 돼 버리는 그 현재를 찍으려고 합니다. 마주하기 싫은 과거도 있지만 카메라는 더하고 빼는 것 없이 정확하게 그날의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인사동 경인갤러리에서 라이카클럽20주년 기념사진전이 열렸습니다. 딸이아와 같이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영어 특별수업'을 해야한다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내세우기에, 결국 혼자 갔습니다. 사진은 모두 좋았습니다. 세상은 미래를 넘어 우주로 향해가는데 라이카는 아직도 현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이 찍었던 수만장의 사진 가운데 왜 단 한 장의 '이 사진'을 선택했을까를 계속 떠올리며 감상했습니다. 그 속에는 '내'가 있었습니다. 잊고 싶었던 과거, 혼란했던 상황들을 이겨내려 카메라에 나를 가두고 그 사각의 프레임에 고통을 몰아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은 언제나 냉정하게 사실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며 사진을 진심 즐길 수 있게 된 거 같기도 합니다. 더 이상 카메라의 버전과 한정판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카메라도 똑같이 소중한 장면을 잡아내는,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여전히 사진이 좋습니다.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도 사랑합니다. 거기에는 내가 지나온 길이 있고, 내가 가야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