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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 Feb 05. 2017

마쓰야마

松山



 도쿄에 살면서 여행다운 여행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일본에 살고 있으니까 여기저기 마음껏 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쿄를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일본의 살인적인 교통비가 한몫했을 수도 있고, 여행을 가기 위한 사전 준비가 귀찮아서 일 수 도 있다. 어찌 되었건 나는 도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언제나 일상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 혼자서는 평생 마쓰야마라는 곳을 가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 의지로 여행을 가는 것은 참 드문 일로 아마도 난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일상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마쓰야마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 길. 일에 치여 살다가 휴가를 내고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난다는 건 역시나 설레는 일이다. 직장 상사의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고, 눈이 빠져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저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 알 수 없는 미지의 탐험을 강행하면 되는 것이다. 친구들과의 일정이 어긋나서 나는 하루 먼저 마쓰야마로 가게 되었다. 예정에 없었던 1박 2일간의 솔로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함께 묵을 호텔도 친구들이 다 예약을 해 놓은 터라 하룻밤 잠 잘 곳은 내가 예약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닥쳐서 하는 버릇, 아니 닥쳐서도 준비하지 않는 버릇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숙소는 물론이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나는 마쓰야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무엇을 했던 걸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가 항공이라 기내식이 나온 것도 아니고,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책을 읽고 있었겠지. 그것이 무슨 책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분명 책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국내 항공을 이용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색다른 경험이었다. 비행기를 타면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그 당시까지는 여전히 나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던 탓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본 외국이라고는 일본밖에 없고 그것도 여행이 아닌 1년간 살러 간 것이기 때문에 내 평생 해외여행이라고 할 만한 일은 여태껏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도 그 흔한 제주도조차 가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지금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채로. 나는 그저 묵묵히 비행기 좌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쓰야마 공항에 도착하여 놀란 것은 공항의 규모 때문이었다. 마치 시외버스 터미널을 연상시키는 그 아담한 규모에 한 번 놀랐고, 공항 치고는 사람이 너무 없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공항 로비는 텅 빈 대학 강당 마냥 썰렁한 모습이었다. 시내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그 외향부터 내가 익히 봐오던 버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 도쿄가 아닌 다른 지방에 와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표식과도 같았다. 버스에 오르니 그 내부 모습 또한 내 예상을 깨는 신선한 모습이었다. 버스의 바닥은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릴 적 국민학교 교실의 나무 바닥. 거기서 번들거리는 윤기만을 말끔히 제거한 모습이었다. 버스 안에는 선풍기라도 달려 있어야 할 듯했지만 다행히도 선풍기는 달려 있지 않았다. 겨울이라 선풍기를 떼어 내 창고에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차창 밖 낯선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마쓰야마 시내로 들어와 있었다. 도쿄와는 다른 생경한 주택가 사이로 안전운전이라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버스는 20여분을 달려서 마쓰야마 역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하여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식당을 찾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던 탓에 배가 몹시도 고팠다. 다행히도 역 바로 근처에 라멘집이 있어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허름한 실내에 카운터 석과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다. 평일 오후 시간을 감안한더라도 식당 안는 한산 했다. 몇몇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조용히 라멘을 먹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석에 앉아 미소라멘과 볶음밥을 주문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뜨거운 라멘 국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좋았다. 볶음밥도 불맛이 제대로 배어 있어서 꽤 만족스러웠다. 도쿄에서 자주 먹던 음식들인데 낯선 곳에서 먹으니까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은 유달리 맛이 있다. 점심을 먹으면서 어디를 갈지 생각해보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마쓰야마 성이 유명하다고 나와있었다. 역에서 꽤 거리가 있었지만 동네 구경도 할 겸 마쓰야마 성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마쓰야마에는 이미 겨울이 상주해 있었다. 도쿄와 기온차는 그리 크게 나지 않았지만, 체감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졌다.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마쓰야마 성까지 가는 길에 노면전차를 만났다. 살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노면전차. 도로 한가운데로 곧게 뻗어있는 선로를 따라 미끄러지듯 달려온 노면전차는 버스와 나란히 멈추어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쓰야마 성은 공원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공원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가득 들어차 따스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 햇살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공원 안에 있는 작은 산 위에 마쓰야마 성의 모습이 보였다. 성은 저 멀리 아주 조그맣게 시야에 들어왔다. 걸어서 간다면 꽤 시간이 걸릴 듯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마쓰야마성 니노마루시세키정원.  연인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 아쉽게도 개관시간이 지나 들어가 볼 수 없어 정원의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저 멀리에는 연인들의 놀이기구라 할 수 있는 대 관람차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모를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난생처음 홀로 떠난 여행. 누군가 옆에 함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옆에 있어줄 누군가를 생각하며 언덕길을 따라 성으로 올라갔다.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가파른 산길이 계속 이어졌고 나는 아무도 없는 그 길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길을 걷는다는 것보다는 등산을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럴 때 옆에 말동무라도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등산로를 조용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에 대해서. 앞으로의 나에 대해서.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이 여행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어느새 눈 앞에 성곽의 모습이 보였다. 가지런히 쌓아 올린 높은 돌담 위로 옛 시대를 짐작케 하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 뒤로는 하얀 벽면과 뾰족한 지붕의 모습을 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의 정상, 아니 성의 정상에 당도했을 때는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서쪽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어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구름 사이로 붉은 띠가 극명하게 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전망이 좋은 곳을 향해 걸었다. 누가 보더라도 전망을 바라보기 위해 마련된 곳에는 돌로 만들어진 벤치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한 노인 분이 서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사람이겠지. 추운 날씨임에도 가벼운 트레이닝 복 차림에 잠깐 산책을 하러 집을 나온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저 멀리 해가 지려 하는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서서 붉은 기운이 감도는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대신에 마쓰야마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쿄를 떠나 다른 지방에 온 것은 처음 있는 일로 1년 정도를 도쿄에서만 줄곧 지냈다. 그 넓은 일본 열도에서 나는 정말 한정된 공간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왔던 것이다. 그곳을 떠나니 일본의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이제 외국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도쿄는 나에게 익숙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어느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그 도시의 모습을 내려다본다는 것이 이렇게 근사한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저 멀리에는 해가 지는 멋진 하늘의 모습까지 배경으로 깔려 있지 않은가. 일본에서의 첫 여행, 첫 방문지로 이보다 더 좋은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상념에 빠져있는 나에게 옆에 있던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 갑작스러운 한마디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노인은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마치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덩치 큰 맹인 안내견에게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혼슈까지 볼 수 있다네.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는데 잘 보니 바다 위에는 여러 섬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은 탓에 가까운 곳의 섬만이 보였다. 노인은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 산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그리고 이 마을이 어떠한 마을인지를. 난생처음 듣는 이 곳 특유의 사투리가 섞여 있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말들도 많았다. 노인은 한동안 말을 이어나갔고 나는 가만히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이 말을 마치고 나서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노인은 내가 외지 사람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해가 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성 안에는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성 안을 홀로 걸었다. 본관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사무라이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 해주었다. 사무라이는 전국시대의 갑옷을 입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라이에게서 근엄한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어린이 만화 영화에서 당장이라도 빠져나온 것처럼 그 모습은 이 성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실사영화에 삽입된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강렬한 원색의 색채를 띄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채색의 성과 대조를 이루며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비쳤다. 가까이 다가가자 당장이라도 새된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줄 것만 같았다. 그러고 친절히 이 성을 안내 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잠시 했지만 사무라이는 미소만 지을 뿐 역시나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본관 입장시간은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사실 본관까지 들어갈 마음도 없었지만 사무라이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을 걸어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서 본관 건물의 외벽을 따라 걸었다. 건물 위 가장 높은 곳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가느다란 발 하나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조형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살아있는 까마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던 까마귀는 어느 순간 날개를 펼치고 어디론가 휙 날아가 버렸다. 조금 더 걸어가니 까마귀가 한 마리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마리의 까마귀가 하늘 위를 배회하고 있있고 그 아래로 셀 수 없이 많은 까마귀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그림자처럼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 성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사무라이 보다 까마귀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어떠한 신호가 있었던 건지 나무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늘은 온통 까마귀들로 뒤덮였다. 그렇게 많은 수의 까마귀를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 모습은 가히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까악까악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고 있는 까마귀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공격을 해오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겁에 질려 있는 나의 모습을 저 멀리서 고양이 한 마리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성 안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사무라이에게 인사를 하고 산을 내려왔다. 내려올 때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해도 졌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룻밤 묵을 곳을 찾는 일뿐이었다. 공원 근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비즈니스호텔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쓸데없이 넓었다. 로비를 한참이나 걸은 후에 카운터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빈 방이 있는 지를 물어보았으나 호텔 직원으로부터 모두 만석이라는 말을 들었다. 특별히 연휴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도 아니라는 생각에 어렵지 않게 방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원으로부터 다른 호텔도 아마 모두 방이 모두 차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로비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근처에 있는 다른 비즈니스호텔을 검색했다. 몇 군데 전화를 걸어 방이 있는지를 물어봤다. 내게 돌아온 답변은 오늘은 방이 다 찼다는 대답뿐이었다. 로비는 정장 차림의 나이가 지긋히 들어 보이는 사람들로 점점 붐비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카운터에 가지 않고 바로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앞에는 송년회 안내판이 놓여 있었다. 나는 다음 호텔에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어느 한 노인 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방은 찾았느냐고. 나는 지금 있는 이 호텔의 방이 모두 차서 하룻밤 묵을 다른 호텔을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노인은 자신이 예전에 이 호텔에서 일을 했었다고. 자신이 방을 찾는 것을 도와주겠노라고 말했다. 노인은 카운터로 걸어가 직원에게 다른 호텔 방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말했다. 그건 마치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지시를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직원은 수화기를 들어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그곳에 빈 방이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대화 내용을 짐작컨대 전화를 거는 곳마다 만실이라는 대답이 돌아온 듯했다. 직원이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 나는 노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갔다. 곧이어 카운터 쪽에서 빈 방을 찾았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하룻밤 숙박비가 얼마인데 괜찮겠냐고 나에게 의사를 물었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노인은 직원에게 택시를 호텔 앞으로 불러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갑에서 천 엔을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이렇게 호텔까지 찾아 준 것도 감사한데 돈까지 받을 수는 없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노인은 기어코 내 손에 천 엔을 쥐어 주고 말았다. 처음 만난 사람을 그것도 외국인인 나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다니.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아 들고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감사해서 나온 말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전화번호를 알 수 있냐고 물어봤다. 어떤 식으로든 꼭 도쿄에 돌아가서 사례를 하고 싶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리고서 얼마 있지 않아 카운터의 직원이 택시가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노인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은 건네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올랐다.





 택시 안에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그렇게 친절한 대우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차창 밖을 가만히 바라봤다. 택시가 5분 정도를 달렸을까. 벌써 내가 묵을 호텔에 와 있었다. 나는 조금 전 호텔의 노인에게서 받은 천 엔을 운전수에게 주어 택시 비를 지불했다. 호텔에 들어서자 나의 이름을 부르며 직원이 나를 맞아주었다. 카운터에서 호텔비를 지불하고 건네받은 종이에 이런저런 정보를 적어 다시 직원에게 건넸다.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호텔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핸드폰이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방 구석구석까지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1층 카운터로 내려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봤다. 지금 맡아두고 있는 분실물은 없다고 직원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호텔을 나와 조금 전 택시를 타고 왔던 호텔로 걸어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 호텔에서도 내가 잃어버린 핸드폰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택시에서 핸드폰을 흘렸을 것이 분명했다. 때마침 택시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는 곳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의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분실물을 찾을 수 있느냐고. 그곳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 남자가 분실물은 이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고 마쓰야마 시내의 분실물을 관리하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전화를 해보라고 말했다. 모든 택시 회사의 분실물은 그곳에서 관리한다고. 지금은 영업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분실 신청을 할 수 없다고. 내일 아침 9시부터가 영업시간이니 그 후에 전화를 걸어보라고. 그 남자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노트 한 귀퉁이에 전화번 번호를 적은 후 그곳을 찢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고 그곳을 나왔다.  거리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내일 오전까지는 핸드폰 없이 지내야만 한다. 마쓰야마라는 이 도시에서 나는 그야말로 혼자가 되었다. 그 어느 곳에도 이어지지 않고 말 그대로 홀로 덩그러니 놓이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저녁을 먹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해 낸 일이었다. 점심때 마쓰야마 역에서 라멘을 먹고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정신없이 걷고 신경을 쓰다 보니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일단락 짓고 나니 허기가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마쓰야마 역에서 챙겨 온 관광 안내 팸플릿을 펼치고 가장 번화한 곳으로 갔다. 평소 같았으면 인터넷으로 맛집을 검색하고 구글맵이 알려 주는 경로를 따라 쉽게 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 나에게 있는 거라고는 달랑 팸플릿 한 장뿐이었다. 핸드폰 덕분에 지금까지 얼마나 편하게 지내 왔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때로는 누구와도 연결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수시로 울려대는 문자 메시지 알람음이 짜증을 몰고 올 때도 많았다. 하지만 핸드폰이 없어지고 나니 이렇게 답답하고 불안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여행지에서 홀로 남겨졌을 때 잃어버릴게 뭐람. 이런 것이 여행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카메라는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행의 기록을 남길 카메라 조차 없었더라면 나는 정말로 깊은 절망에 빠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쓰야마 시내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조용한 소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일루미네이션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인적 없는 거리임에도 그리 쓸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올 만도 싶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간간히 도로를 달리는 노면전차 소리뿐이었다. 팸플릿을 보고서 가장 번화가라고 쓰여있는 마쓰야마시 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팸플릿을 보며 식당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 또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 그리고 아저씨. 모양새로 보니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듯했다. 마쓰야마 사람들은 모두 다 이렇게 친절한 것인가. 아니면 나이 든 남자들만 친절한 것인가. 지금까지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저씨는 이제 곧 환갑을 눈 앞에 둔 듯 보였다. 아저씨는 사람 좋은 얼굴로 이곳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이 근처에 추천할 만한 맛집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묻고 식당까지 안내해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오코노미야키가 먹고 싶다고 말했고, 아저씨는 자신이 자주 가는 식당이 있으니 함께 가서 먹자고 말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것.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외국인이 아닌가. 하지만 아저씨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 가게에 들어갔다. 오코노미야키를 전문으로 파는 곳이었지만 야키토리나 카라아게 같은 이런저런 안주도 주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우선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곧이어 주문한 오코노미야키가 나왔다. 오코노미야키를 구우며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저씨는 원래 이곳 마쓰야마 출신으로 집도 이곳에 있는데 회사 사정으로 지금은 오사카에 따로 집을 얻어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곳 집은 그대로 남아 있어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자녀는 아들 한 명 딸 한 명이 있는데 모두 외국에 나가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저씨는 태블릿을 꺼내 자신의 아들과 딸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취기도 기분 좋게 올라왔다. 아저씨는 자신의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지금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서 대접할 것은 없지만 맛있는 니혼슈가 있다고. 나에게 함께 가기를 권했다. 나도 일본 가정집을 가보지 않아 예전부터 한 번쯤 방문해보고 싶었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리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아저씨의 집은 일본 드라마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방이 있었고, 디귿자 모양의 건물 안에는 하늘이 뚫린 마당이 있었다. 방 한쪽에는 돌아가신 분을 모셔두는 공간도 있었다. 아저씨는 냉장고에서 안주가 될 만한 것을 꺼내 놓으려 하셨지만 냉장고 안의 음식들은 모두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아저씨는 안주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커다란 니혼슈 병과 잔을 두 개 가지고 오셨다. 니혼슈를 마셔본 적이 없어서 술맛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저씨는 이 집을 마쓰야마를 찾는 관광객을 위한 홈스테이로 꾸며 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의 감상을 들어보고 싶다고. 나는 느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한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호텔로 가는 노면전차의 막차 시간이 다되어 갔다. 이 곳에서 묵을 수는 없고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차고에 있는 자신의 오토바이를 보여 주었다. 아저씨의 취미는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떠도는 것이라고. 누군가 이렇게 열심히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저씨는 노면전차 타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막차 시간이 끊기지 않게 우리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막차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전차에 오르고 아저씨는 마지막까지 전차 문 앞에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아저씨는 내가 자리에 앉자 큰 소리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호텔 이름을 말하며 내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다. 막차 시간이 되어 전차는 출발하고 그렇게 아저씨와 헤어지게 되었다. 전차 안에서 아저씨에게 부탁을 받은 아주머니는 친근감 어린 말투로 나에게 또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느냐고. 몇 마디를 나누고서는 한 동안 가만히 전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아주머니와 같은 역에 내렸다. 아주머니는 내가 묵을 호텔이 보이는 곳까지 나를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잘 자라는 말을 하고서는 어두운 골목 속으로 걸어갔다.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두 캔과 가볍게 곁들일 과자를 샀다. 그리고 호텔 방에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일본 연예인이 나와 한바탕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며 한동안 텔레비전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면 저 편에서는 모두가 신나고 즐거워서 왁자지껄 웃고 있었지만 그것이 왜 즐거운 일인지, 왜 웃어야만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왠지 나 홀로 어느 외딴 혹성에 뚝 떨어져 그 혹성의 방송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으로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오늘의 일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참 정신없는 하루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은 평소 내가 경험할 수 없던 일들이었다. 그 일들이 모두 하루 동안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오늘 하루는 지나갔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이 오겠지. 아마 택시에 두고 내린  핸드폰은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일 대리점에 가서 새로운 휴대폰을 하나 장만해야겠다. 핸드폰이 없으면 만나기로 한 친구들과 연락할 방법이 없다. 나는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오전에 마쯔야마 시내를 좀 돌아다니고 오후에는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서는 평범한 여행이 시작되겠지. 쇼핑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낯선 여행지의 밤거리를 방황하며 저 텔레비전 속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있을. 그런 지극히 평범한 여행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 여행도 끝나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문득 오늘 하루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 짓고 있을 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 인생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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