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건강이 최고라고 이야기 하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새해 인사는 물론 지인과의 만남에 '건강'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말을 우리는 머리에만 담아 놓는다. 특히 호되게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아픔은 늘 서러움을 동반하는데, 대학교 시절 홀로 자취방에서 아파 누워 있을 때 나는 외롭고 서러웠다. 이유는 아파도 약 챙겨줄 사람도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가끔 병원 광고에 '새싹'이 등장한다. 암 환자인데 암을 극복해서 새 인생을 얻었다는 느낌과 함께 아파보니 이런 작은 새싹마저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 같다. 이 느낌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한 때 무지 아픈 환자였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7년전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나의 고3 시절에 겪은 병마는 한창 공부해야 할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요즘도 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고등학교 때 시험치는 장면이다. 아직 문제를 다 풀지도 않았는데, 종료종이 울리는 긴장되는 순간을 나의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고3은 죽도록 공부해야 했다. 특히 내가 다니던 순천고등학교는 지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모여드는 학교였기에 경쟁이 치열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줄곧 휴일을 반납한 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물론 노력한 만큼 성적이 늘 따라주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주말은 물론 평일 야간까지 정신없이 공부하던 어느 야자(야간자율학습) 끝날 무렵이었다. 평소처럼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책을 정리한다고 책이 가득 든 박스를 들어 올리는 순간, 심한 기침과 함께 큰 덩어리의 피가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너무 당황했고, 나를 지켜보던 친구들도 놀래서 급히 휴지를 가져다 주었다. 가래도 아닌 피덩어리가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큰 병이 의심되어 부모님과 선생님께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다음 날 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로 폐를 찍으니 검정색으로 보여야 할 폐의 절반 이상이 하얗게 보였다. 폐결핵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그래도 안심하라고 이야기했다. 몇 십년 전에는 이것 때문에 사람이 죽고 그랬는데, 요즘은 약이 좋아져서 약만 잘 먹으면 낫는다고...
아들이 큰 병에 걸린 것을 안 부모님의 걱정은 과연 어느 정도 였을까? 요즘 내가 나의 아들이 아플 때 걱정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폐결핵 치료를 잘한다는 병원을 찾아 순천에서 광주까지 나의 기나긴 투병이 시작 되었다. 폐결핵 치료약은 우선 알약 수에서 사람을 압도한다. 게다가 그 약을 먹으면 오줌이 붉게 나온다. 마치 피오줌을 누는 것 같아서 늘 화장실 귀퉁이에서 소변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행여나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까봐 가족은 물론 친구들과 떨어져서 외로운 식사를 계속해야 했다.
꾸준하게 약을 복용한 결과, 내 몸이 많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엑스레이 사진이 말해 주었다. 의사는 아니지만 사진에 나타난 하얀색 영역이 점점 검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약의 부작용 때문에 눈이 어지러웠다. 사물이 두 개로 보였고 모든 사물이 잔상과 함께 겹쳐 보였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정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또 다시 나는 순천과 광주 전남대 병원을 오가는 투병길에 올랐다. 안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했던 기억이 난다. 안과적으로 이상은 없었지만, 나의 눈에 사물은 여전히 두 개로 보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3 스트레스가 약물 부작용처럼 나타난 것 같다. 어찌 되었던 몸이 정상이 아니었기에 다른 친구들처럼 야간 자율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저녁에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걸어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 무거웠다. 왜냐하면 그 때는 건강 관리보다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목표하던 대학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학교에 못가면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 너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 시야는 정상으로 돌아 왔고, 학교 앞 안과에서 정상 판정을 받았을 때 암환자가 느꼈을 '새싹' 같은 기쁨이 솟아났다. 병원 문을 나설 때, 병원 앞에서 장사하는 분의 물건을 흔쾌히 샀던 기억만 나는데 그만큼 나는 지난 날의 굴레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홀가분함에 취해 있었다.
날씨는 추워졌고, 수능날이 다가왔다. 몸이 아파서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지만 평소의 실력만 발휘한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그런데 신은 나를 외면해 버렸다. 수학시험을 보는 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수능 점수는 바닥을 찍었고,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등수인 반에서 36등/45명 이라는 최악의 성적이 나를 기다렸다. 그것도 모의고사도 아닌 진짜 수능에서 말이다. 지난 3년이 너무 억울했다. 그 날밤 이불 속에 들어가서 펑펑 울었다. 집안 형편상 재수를 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내 인생이 그 곳에서 펼쳐질 것이라고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땅에 원서를 들고 찾아갔다. 그 곳이 바로 '대전'이다. 내가 16년째 살고 있는 이 곳....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나의 홀로된 삶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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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동생을 데리고 24살 누나가 학교 면접에 따라왔다. 아직 어린 나에게 24살의 누나는 이미 다 큰 어른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36살이라는 나이를 먹고 그 당시의 누나 나이를 가늠해 보니 애송이가 분명했다. 내가 20대의 어린 후배들을 바라보는 느낌과 비슷하게...
면접을 보고 나는 충남대학교에 합격했다. 의도하지 않게 수능을 망하고 재기의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받아든 합격장이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중학교 3학년때 비평준화였던 순천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합격했던 때가 더욱 기뻤던 것 같다. 1999년 3월 1일, 나는 이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대전 땅에 홀로 올라 왔다. 대전에는 그 어떤 친척도 지인도 없었다. 모든 것이 혼자였다. 4인 1실 기숙사에 짐을 풀고 홀로 밖을 나왔다. 외로웠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모를 대전 생활에 적응해야 했기에 식당을 찾아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지금은 정문앞(유성)이 많이 발전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유일하게 짜장면집 하나가 전부였고 우측으로는 밭떼기만 가득 보일 뿐이었다. 우선 굶주린 배를 짜장면으로 채웠는데, 앞으로 보나 뒤를 보나 모든 것이 낯선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암담할 뿐이었다.
원래 나는 수능 전국 순위 3%를 유지하다가 수능 당일에 13%로 급락한 점수를 받았다. 13%는 반에서 36등/45명 이었고, 수능 3% 이내인 사람만 지원할 수 있었던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 지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굳이 아주대를 처음부터 지목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 조건으로 합격하면 등록금이 전액 무료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우그룹이 든든하게 지원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새옹지마라...IMF 여파로 대우그룹은 부도가 났고 그와 동시에 아주대의 명성은 땅으로 떨어졌다. 그 후 이야기는 자세히 모르지만 등록금 지원도 아마 없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15년이 넘게 지난 시간에 돌아보면, 내가 대전에 있는 학교로 온 것은 잘 한 일이다. 수도권에 비해 물가가 비싸지 않기에 비슷한 전공의 다른 친구들에 비해 기반을 빠르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봐야 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많은 친구들이 대학의 낭만을 즐기며 학고(학사경고) 잔치를 벌이는 동안, 나는 평소처럼 공부했고 저녁에는 근처 삼겹살 가게에 가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뚜렷하게 성공을 염두한 것이 아니다. 단지, 수능 점수가 안 좋아 등록금 한 푼 할인 받지 못한 채 입학한 것을 만회하기 위함이었고, 빠른 시일 내에 바로 옆에 있는 카이스트로 편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가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놀긴 했지만, 늘 그래 왔듯이 과제와 시험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첫 학기 성적은 4.417/4.5만점 이었고, 그 후로 졸업할 때까지 약 4.2 정도의 학점은 유지했던 것 같다. 내 스스로를 평가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솔직히 노력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나의 머리는 그렇게 똑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점철된 대학 생활이었기에 3학년 2학기에 있었던 친구들의 집단 부정행위 사건은 피 맺힌 한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정정당당함이라는 가치를 넘어 내 노력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해서 문제가 없었는데, 용돈을 조금이라도 벌어야 부모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삼겹살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 시급은 2,000원. 저녁 4시간을 근무하고 손에 쥔 돈은 8,000원이 고작이었다. 삼겹살 냄새로 범벅이 된 옷을 입고 친구와 학교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한 잔 하며 얘기했다. "진짜 8,000원 벌기 어렵구만~...쓰기는 쉬운데..." 그리고 하늘의 별을 바라 보았다. 1999년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후, 대학 시절 동안 삼겹살 서빙외에 다양한 직군에 종사해 보았다. 전화 단말기 판매, 일수 대출 전단 배포, 정력 팬티 판매, 주유소, 나무 모종 심기를 거쳐 과외까지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던 것 같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르바이트라면 단연코 '나무 모종 심기'였다. 섭씨 35도에 육박한 무더운 날씨가 계속 되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시급을 2배 이상 주는 일거리를 발견했다. 행여나 누가 채어갈까바 바로 전화를 하고 지금 당장 가겠다고 이야기 했다. 지금은 대전 서남부권(도안신도시)라는 이름 아래 아파트가 즐비한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곳은 벌판이었다.그 벌판 위의 비닐하우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죽을 것 같은 더위에 비닐하우스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하지만 시급이 높았기에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2겹의 비닐 사이에 솜털이 들어 있는 특수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홍콩 야자수'라는 모종을 심는 것이 일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더웠고, 숨이 컥컥 막혔다. 다음 날도 일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들어 와서 일 잘하는 후배를 소개시켜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 작업장에 다녀온 후배가 통영 사투리로 이야기 한다. "형~ 나 죽일라꼬 환장했슴까?~"
이 당시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사회 생활 10년에 접어드는 터라 아직 나의 업적을 스스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성패를 떠나 늘 열심히 살려는 자세는 지녔던 것으로 기억 된다. 내가 개인적인 일을 기획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따지는 요소가 딱 2가지 있는데,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가?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가?" 이다. 이 전제 조건에 문제가 없다면 나는 무엇이든 강하게 몰아 부친다. 특히 어떤 공모전이나 배움의 기회에 있어서 만큼은 더욱 그러하다. 이런 나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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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에 살았다. 옥탑방은 정말 추위와 더위에 민감하다. 여름에는 집안 벽돌이 뜨끈뜨근 하고, 겨울에는 집에 들어와도 입김이 나왔다. 그런 옥탑방에서 2년을 거주했다. 거주지는 그런 곳이었지만 늘 아침을 챙겨먹고 다녔다. 시험이 있는 날이건 급한 일이 있는 날이건 가리지 않고 아침밥은 거르지 않았다. 반찬은 주로 부모님이 싸주신 마른 반찬이 주류를 이뤘고, 국은 매일 내가 끓여 먹었다. 된장찌개에서 만두국까지 재료를 가리지 않고 국으로 만들어 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주인집 아주머니는 늘 나를 대단한 학생이라고 칭찬했다.
하루는 옥탑방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 갔는데, '인도 교환 학생' 선발이라는 공고가 보였다. 여태껏 세상을 살면서 한국 이외에 그 어느 곳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지라 그런 공고는 매우 낯선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자꾸 그 공고에 관심이 갔다. 지원비가 드는 것도 아니고 지원했다고 처벌을 받는 것도아니니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한 시간 동안 지원서와 함께 자기 소개서를 생각나는데로 작성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9시도 되기전에 대학 본부로 가서 지원서를 접수했다.
일반적으로 9시가 대학 교직원의 출근 시간이었기에 9시 되기전부터 접수를 하려고 기다린 내가 놀라운 것은 사실이었다. 굉장히 당황하는 교직원에게 지원서를 내밀고 수업을 받으러 갔다. 훗날 알게 된 이야기는 이렇다. 사실 나의 자기 소개서는 형편 없었다. 10 명 정도 선발하여 인도를 보내려고 했는데, 담당자 입장에서 자꾸 나의 존재가 눈에 밟혔다.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인터넷 공고를 낸 다음 날 아침 일찍 와서 접수를 한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40위권에 머무른 내 지원서를 뽑아서 최종 선발자에 포함시켰다. 그렇게 나는 운이 너무 좋게도 인도라는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잡았다.
2004년 12월 24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라는 것을 타 보았다. 당연히 기내식도 처음 먹어 보았다.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고, 내가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간다는 것 자체가 꿈만 같았다. 비행기는 방콕 공항을 거쳐서 인도 델리에 나를 내려 주었다. 델리는 인도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수도다운 풍채를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공사중인지 전쟁으로 파괴된 것인지 알기 알기 어려웠고, 여기저기 소(Cow)가 도로를 점령하고 교통을 방해했다. 사람들은 손으로 식사를 집어 먹었고, 화장실 한 켠에 있는 수도꼭지가 화장지를 대신했다. 내가 지나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이국인의 신기함을 즐겼고, 건물 경비원은 경비를 선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인도에서 약 한 달을 머물렀다. 델리대학교 한국어학과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놀며 문화를 교류했다. '철수야 영희야' 가 쓰여진 지문을 들고 나타나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인도 친구들에게 한국어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도의 이 곳 저 곳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친해졌고, 약 4주가 흘렀을 때 모두 함께 인도 서부의 '자이살메르'라는 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다. 침대칸이 포함된 기차를 탔는데, 안락함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개념없이 떠들어 댔고 코를 찌르는듯한 악취가 잠을 방해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대로 기차는 예고도 없이 2시간 연착 되었고, 창밖으로 본 인도 사람들은 기차길에 앉아 대변을 보고 있었다.
12시간을 달려 인도 서부 사막에 다달았다. 태어나서 사막이란 곳은 처음 와 보았다. 모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사막위에 홀로 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황량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너무 작게 느껴지는 인간이 초라해 보였다. 사막에서 낙타 여행을 한 후, 작은 도시의 성에 올랐다. 모든 것이 작아 보였다. 눈 아래 밟히는 집들은 모든 것이 성냥갑처럼 작게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저 성냥갑 속에서 욕심을 부리며 아옹다옹하는 것 자체가 우스워 보였다.
'아그라'라는 도시로 향했다. '타지마할'이라는 유적이 있는 이 곳은 인도 관광객의 필수 코스였다. 성의 사면 어디에서 보나 동일한 모양이다. 역사에 따르면, 왕은 이 성을 설계한 사람의 손을 잘랐다고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은 건축물을 설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발길을 갠지스강으로 돌렸다. 갠지스강은 신성함을 상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곳에서 목욕을 하면 자신의 모든 번뇌와 죄악을 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 때문이었을까? 내가 마주한 갠지스강은 일반적인 강에서 느낀 감정과 다른 것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과 함께 응어리진 한(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에 강에 뛰어든 사람이 넘쳐났다. 강둑에는 수행하는 수도승에서 부터 코브라를 목에 걸고 관광객을 유인하는 사람들까지 너무 다채로운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내가 인도를 방문하게 된 것은 천운에 가까웠다. 지원서를 일찍 접수한 나를 알아봐 준 직원이 있었기에 나는 교환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도는 나에게 단순한 여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시각이 한국 내에 머물러 있던 나에게 세상이 무척 크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계기가 있었기에 나는 그 후로도 자연스럽게 눈을 해외로 돌릴 수 있었다.
인도에 있는 동안 2005년이 밝아 버렸다. 2004년 12월의 어느 새벽에 등산 가방 가득히 짐을 싸고 나섰던 여행길이 끝났다. 이제 내 눈앞에 남은 것은 취업이었다. 게다가 나는 7학기만에 조기졸업하기로 에정되어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급했다.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서 떨어지고 그에 준하는 국내 전자 대기업도 서류에서 탈락했다. 모든 것이 암담했고, 조기 졸업을 취소하고 정상 졸업을 해야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은 답답했지만 억지로라도 도서관에 앉아 토익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토익 공부를 한창 하고 있던 어느 순간 나에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들처럼 똑같이 취업을 준비해서는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당장 도서관을 나와 내가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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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나를 내 스스로 정의하라면 '정통 엔지니어'와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생각 뿐이다. 전자회로보다는 경제현상에 흥미가 가고, 로봇보다는 역사가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 10년의 시간만 돌이키면 나는 차세대 엔지니어겸 괴짜 발명가가 분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전자 제품을 뜯어서 개조하고, 상상 이상의 괴짜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 했다. 잘 사는 친구들은 '과학 상자'와 '레고'를 가지고 놀았을 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런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치였다. 주위에 버려진 전자제품이 나의 과학 상자인 동시에 레고였다. 무엇이든 뜯어서 새롭게 만들어 보았고, 기존 제품의 불편함을 개선한 제품 아이디어를 생각하며 어린시절 그리고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다.
20살의 나이로 처음 대전에 올라온 후, 주로 학교 주변을 배회하는 것 이외에는 대전을 딱히 알지 못했다. 둔산동에 대전 정부 청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곳에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정부 기관이 있었는 지 꿈에도 몰랐다. 군대에서 우연히 책을 보다가 그 정부 기관이 대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너무 놀랬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바로 '특허청'이었다. 이 사실에 고무되어 나도 특허라는 것을 내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 생각했던 많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특허 및 실용신안 출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에 내무실에 앉아 '도면'을 그리고 출원서를 작성했다. 다른 사람들은 TV를 보거나 뽀글이(군대식 봉지라면)를 해 먹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나는 모양자를 이리 저리 돌려 가면서 도면을 손으로 그렸다.
그렇게 완성된 출원서를 들고 휴가를 나오면 가장 먼저 대전 정부 청사로 향했다. 군복을 입은 채, 출원서를 접수하는 장면이 어딘지 어색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따질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특허에 푹 빠져 있었다. 간혹 내가 특허/실용신안을 6개 정도 냈다고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면 굉장히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을 알고 보면 대단할 것도 없다. 특허/실용신안은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 떼는 것만큼 쉽기 때문이다. 학생이라는 것을 증빙하면 출원료는 무료이지만, 매년 독점 권리를 행사 할 수 있는 유지료를 납부해야 하고, 그 액수도 해가 지남에 따라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어설픈 발명으로 장기간 특허를 지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게다가 특허 등록 후 등록증을 받으면 국가는 '자기만족의 권리'만 보장할 뿐, 타인이 내 기술을 침해 했을 때 소송을 걸기 위해서는 '기술평가청구'라는 또 다른 절차를 거쳐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 실체를 알고 보면 정말 어이 없는 것이 특허인데, 간혹 주위에서 '특허 받은 음식 조리법', '특허 받은 기술'이라고 특허 등록 번호와 등록증을 제시하며 과장 광고를 하는데, 웃음만 나올 뿐이다.
학창시절/군대시절에 등록한 특허/실용 신안이 약 6건 있었고, 학교에서 만들었던 로봇이 4대 있었다. 실로폰을 치는 로봇, 청소기 로봇, 붓글씨 로봇, 라인트레이서까지 나를 PR할 수 있는 많은 자산이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엮기 시작했다. 학점과 토익은 모두가 가진 자산이기에 취업 시장에서 무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대생들이 그들의 작품집을 만들 때 '포트폴리오'라고 이야기 하던데, 나도 이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행정병이었으니, 한글97은 도사를 넘어 신(神) 단계였다. 마우스 없이 오직 키보드만으로 타이핑과 편집을 초고속으로 해내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료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자 '컬러 프린터'를 장만했고, 잉크가 아까웠지만 아낌없이 컬러 출력물을 뽑아 냈다. 모든 것이 투자라고 생각했고, 지금 이 순간 이렇게라도 승부수를 던지지 않으면 뾰족한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한 외국계 자동차 부품 기업이 눈에 꽂혔다. 그 당시 소문에 의하면, 고액 연봉과 칼퇴근, 정년보장이라고 했다. (훗날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여 8년간 근무해 보니 반은 진실이고 반은 풍문일 뿐이었지만...). 원서를 쓰고 나의 소중한 포트폴리오와 함께 면접에 임했다. 실제로 포트폴리오가 효과를 발휘했는지 모르나, 결국 나는 합격을 했다. 그 곳이 내가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8년간 근무했던 'SIEMENS VDO(훗날 콘티넨탈)' 이었다. 너무 기뻤다. 그 당시 4학년1학기의 4월이었고, 5월부터 출근하라고 하기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예정대로 8월에 조기졸업을 하긴 했지만, 4학년 1학기 수업을 반도 출석하지 못해서 내 대학 성적표에 평생 오점이 될 만한 D 학점을 2개 받았다. 그래도 전체 평점은 4.19/4.5만점였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고 대학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참 세상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이 회사에 합격한 사실에 너무 웃긴 에피소드가 있다는 것이다. 원서를 쓸 당시에 학점은 4.2, 토익은 745점이었다. 지원하는 회사가 외국계 회사라보니 토익 800점 이하는 대부분 서류에서 떨어졌다. 그럼 나는 어떻게 서류를 통과 했을까? 나는 분명히 전산으로 원서를 접수할 때, 토익점수란에 토익 점수를 넣었는데 이것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인사팀에서 실무부서로 지원자 이력서를 출력해 줬는데, 나만 토익 점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다. "얘는 뭐지?"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굉장히 영어를 잘해서 토익 따위는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천운(天運)이 있을까? 이것 때문에 나는 면접에 올라갈 수 있었고, 면접장에서 드러난 나의 토익 점수를 보고 면접관들이 그렇게 경악을 금치 못했는지도 모른다. 전산상에서 토익 점수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나의 포트폴리오는 가치를 발하지 못하고 휴지통으로 직행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에게 착각은 자유인 것이다. 나는 내가 면접에 올라 갔기에 나를 잠시 동안 대단한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합격 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라면을 3개 끓여 먹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라면이 송송 들어 갔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직장 생활이 펼쳐질 지 몰랐다. 그냥 좋았다. 26살의 나이에 천문학적인 연봉이라니...그런데 라면 3개로 나의 자축 행사를 끝낼 수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제주도이다. 홀가분한 기분에 자전거를 빌려 첫날과 마지막날을 빼고 실질적으로 2박 3일동안 253 KM를 달렸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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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의 기쁨에 제주도로 날아갔다. 동생이 여행을 간다고 하니 누나와 형이 약간의 용돈을 주었다. 이런저런 지원금 덕택에 제주도에 도착하자 마자 '세단'을 하나 뽑았다. 사실 세단은 아니었고, 아저씨가 가장 싸다고 해서 빌렸던 자전거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사람이 여행을 떠날 때...그것도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그렇게 멋있는 일이 아니다.
기쁨에 심취하여 별 다른 계획 없이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는 순간 앞이 캄캄했다. 어디서 자전거를 빌리는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가야 제주도를 돌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은 유일하게 제주도 지도 한 장 뿐이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잘 되어 있어서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지만, 2005년 당시만 하더라도 지도 한 장과 이정표가 전부였다. 얼마나 지도를 많이 꺼내 보았는지 너덜너덜 한 것이 아직도 그 때의 고통을 추억하게 한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시작은 멋있었다. 여유롭게 삼각대를 세워 놓고 사진을 찍고, 이호 해수욕장의 검은 모래를 밟으며 '뽀도독 뽀도독' 소리를 느껴 보았다. "아~ 이게 바로 자유지~" 홀로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 때까지는 내가 영화 배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4월말이라 날씨는 굉장히 뜨거웠다. 처음에는 감상을 하면서 여유롭게 자전거를 탔지만,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점점 걱정으로 다가왔다. 다시 돌아갈 비행기는 언제이니깐, 내가 하루에 얼마를 가야 일정을 맞출 수 있는지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주도 해안도로 253 Km를 3등분하여 하루에 약 85킬로를 가야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은 여유롭게 일주일을 잡고 온다는 자전거 여행을 생각도 없이 3일에 주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부터 마음이 급해졌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자전거를 오래 타면 다리가 가장 아플 것 같은데, 다리보다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안장에 엉덩이를 붙일 수도 없어서 괴상한 포즈로 자전거를 몰았다. 점심은 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대충 때우고, 중간에 쓰러질 지 모르니 초코파이와 맥콜을 챙겼다. 정말 오기로 달렸다. 무식하게 초코파이를 뜯어 먹으며...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려왔다 생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방파제 위에 올라 사진을 찍으려 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파도가 멋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영화배우인 줄 알았나 보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할머니 한 분이 이야기 한다. "동무를 데려 왔어야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더욱 외로웠다. 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제주 날씨가 나를 더 무섭게 했다. 점점 날이 어두워진다는 느낌이 들수록 쉴 수 없었다. 페달을 죽기 살기로 밟았다. 당일 아침에 제주시내에서 출발하여 해안도로로 따라 제주 조각공원(추사유적지)까지 와 버렸다. 겨우 하루 묵을 숙소를 빌려 방에 들어 갔는데, 다리가 펴지질 않았다. 게다가 내 무릎에는 대형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제주도에 오기 전에 헬스장 런닝머신에서 넘어져 까였는데, 이 이야기는 정말 '개그콘서트' 멤버가 모두 울고 갈 정도로 배꼽 빠질 대목인데 나중을 위해 아껴 둔다.
아침이 밝아 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아침이 안 오길 바랬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멀기에 서둘렀다. 순식간에 나는 서귀포에 도착했고, 유명하다는 폭포를 둘러 보러 갔다. 얼마나 일찍 도착했는지, 표 받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 공짜로 둘러 볼 수 있었다. 아침이 지나고 다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굴은 점점 익어 갔고, 날씨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맑았다가 비왔다가 흐려지는 패턴이 영락 없는 제주도 고유의 날씨였다. 날씨가 계속 변하니 걱정이 되었다. 사실 혼자라서 무서웠다. 날씨탓을 하며 이번 제주도 자전거 여행은 이 쯤에서 끝내자고 생각했다. 제주시에서 서귀포까지 왔으니 이것으로 만족하자는 당위성을 부여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제주시로 돌아가서 여유롭게 제주 밤바다를 즐기다 비행기 일정에 맞춰서 대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버스 기사님이 자전거를 가지고 있다고 버스를 태워주지 않았다. 자전거를 빌린 곳은 제주시내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결론은 나머지 반바퀴마저 자전거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서귀포 이후로는 길이 그렇게 좋지 않다. 온 몸이 아픈 것은 둘째치고, 이제는 자전거 바로 옆을 지나는 대형트럭이 무서웠다. 성산일출봉에서 다시 하루를 묵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동안 자취를 하면서 길러온 '생활력'때문이다. 온 몸은 아팠지만 밥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펜션의 유일한 손님이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지만 그 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전속력으로 제주시를 향해 달렸다. 비행기가 내일이기에 반드시 오늘 내로 도착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달렸더니 제주시에 점심 쯤 도착했다. 반팔로 가려진 부분을 제외하고 팔은 심하게 그을려서 차마 보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해도 어쩔 수 없었다. 배는 고팠다. 냉면을 한 그릇 가득 비우고 자전거를 반납했다. 자전거는 나를 이 곳까지 안내한 은인이면서 왠수다. 왜냐하면 이 놈 때문에 버스 승차를 거부 당했으니 말이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나니 한 시라도 빨리 제주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에 보이는 여행사를 찾아가서 비행기표를 바꾸고 오후에 바로 그렇게 그리워하던 육지로 살아서 돌아갔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것이 2005년 5월 1일. 하루 쉬고 5월 3일에 출근했다. 과연 내 몰골이 어땠을까? 훗날 같이 근무하던 같은 팀 누나의 증언에 의하면 내 모습은 이랬다고 한다. "나는 너가 강원도에서 감자 캐다 온 사람인 줄 알았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 후 한 달동안 나의 온몸에서 탈피가 시작 되었고, 나는 비로소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환상으로 시작한 여행이 고생길이었던 것처럼 직장 생활도 돌아보면 그것과 비슷한 패턴을 그렸다. 입사 후 2일만에 회사 행사라는 이유로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을 주고 교통까지 제공했다. 그리고 매일 맛있는 음식으로 회식을 했다. 자취생이었던 나의 눈이 동그래지지 않으면 비정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 달이 지나니 천문학적인 액수의 월급까지 준다.(학생기준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그 때까지도 내가 상상하던 회사 생활은 드라마에서 보던 이런 장면과 같았다. "김 대리! 결제서류 다 됐어?" "네..팀장님!" 이런 웃음과 평화가 흐르는 모습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직장 생활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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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다. 하루 일과 중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회사 생활을 막상 글로 쓰려니 쉽지 않다. 아직 내가 직장이라는 현직에 몸을 담고 있어서 적나라하게 이야기를 쓸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이유일테고, 많은 일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서 기인된 것들이라 손가락 짚어가며 나무랄 사항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생산기술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물건이 생산되어 고객에게 전달되는 최접점에 위치한 업무이기에 많은 일들이 이벤트성으로 발생되고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일들이 늘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대체로 미리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강하게 밀고 나가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계획 없이 동시 다발로 터지는 일들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퇴근 여부를 불문하고 불이 날만큼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가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일도 적응이 되어 무난하게 일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늘 마음 한 편으로는 계획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인생을 꿈꿨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퇴직이나 이직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기업 시험을 볼 요량으로 자격증 시험 책도 구입했고, 공무원 시험도 여러 번 기웃거렸던 것 같다. 그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일탈을 뽑으라면 단연코 '편입'이었을 것이다. 늘 꿈꿔왔던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회사 리더쉽 캠프에 가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적고 발표하라고 했을 때 개념 없이 '수학 선생님'이 된다고 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에 '회사 CEO'가 되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모두 퇴사를 했다. 인생에 있어서 과연 어디까지 연극을 해야 하는 것일까? 여하튼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낄 때쯤, 정말 수학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하고 '공주 사범대 수학교육과' 편입 원서를 넣었다. 75명이 지원했고, 3명 모집에 나는 5등이었다. 결국 떨어졌고, 계속 회사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 때 편입을 했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선가 '교편'을 잡고 있을 지 모르겠다.
회사 생활을 계속 하긴 했지만, 늘 미래의 나를 위해 투자하려고 노력했다. 2008년 말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고 세계 금융위기가 몰려 왔다. 그 여파로 인해 2009년 생산 물량이 줄어 들었고,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 시간을 이용해 '경영대학원 MBA 석사'에 입학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이 있는 날엔 저녁 7시에 시작하는 수업을 들으려고 온갖 눈치를 보며 퇴근을 하고, 미리 싸온 주먹밥을 먹으며 운전을 해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수업 도중에 회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려고 늘 문을 들락날락 했다. 나름의 방책으로 평일 수업을 최대한 줄이고 주말로 수업을 몰았다. 그 결과 따뜻한 봄이 되어도 나들이 한 번 못간 채, 수업을 들어야 했다. 때로는 토요일 전일 수업, 일요일 출근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이라는 고행의 시간이 지나고 2011년 2월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를 취득했다는 기쁨보다 숨막히는 생활의 끝을 고했다는 홀가분함이 나를 더 기쁘게 했다.
대학원을 다녔다고 경영에 관한 큰 통찰력이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제 이슈에 대해 예전보다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예전 같았으면 흘려 보낼 경제 뉴스도 자세히 읽어보고 이유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경제를 이해하려들면 정치가 필요했고, 정치를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 했다. 내 학부 전공이 공학인지라 그런 이론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관심은 나를 변화 시켰다. 순전한 엔지니어에서 인문학이 섞인 잡동사니 엔지니어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변화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공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전혀 엉뚱하게 역사나 생활 속 관찰 경험에 의해 풀리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개인적인 성과는 '글쓰기 연습'이었다. 본래 나는 글쓰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국어를 너무 못했기에 수능 점수는 어느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가정해 보건데, 지금처럼 책을 보고 글쓰기를 어렸을 때부터 했다면 큰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기에 나는 지금 평범하게 살아간다. '신디'라는 필명을 앞세워 매일 아침 글 연습을 했다. 아직도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연습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는데, 과거에 써 놓은 글을 볼 때면 약간의 실력 향상에 미소한 만족감이 찾아오곤 한다.
'나는 아팠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내 인생 역사를 돌아본 느낌이다. 처음에는 고3 때 투병일기만 쓰고 끝내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펜을 내려 놓을 수 없을만큼의 절절함이 글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나는 70세 정도까지만 살아도 별 불만이 없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생각한다. 반환점을 도는 시기에 지난 날을 떠올려 보면서 아픈 것을 치유하고 미래의 전략을 얻어가고 싶다. 이제 시간을 다시 10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거기에도 나의 가슴 아픈 과거가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