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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Jul 24. 2024

6755호실 (4)

국일의 시(詩)

토요일은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작년부터는 수요일 모임도 공식적이었는데 가장 막내인 율이 소위 명예퇴직을 하는 바람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와 싱을 제외하곤 다 명예퇴직을 했지만 그들은 ‘명예롭지 않은 퇴직’의 준말이라고 하곤 웃었다. 그중 율은 명예퇴직이라기보다는 조기퇴직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른 나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수요일은 물론 토요일 모임에도 두세 명에 그칠 때가 많았다. 퇴직을 하면 그림에 올인하겠다던 결심은 장마철 소금 녹듯 희미해졌다.

      

오늘도 국일은 일찌감치 작업실로 나왔다. 출입구를 열고 들어가려는 그녀의 발에 잡초인 것이 분명한 풀이 스쳤다.


‘봄이라고 시멘트 사이에서도 풀이 나네.’


문이 여닫힐 때마다 내 눈에는 꼭 보이던 연둣빛 작은 풀은 어느 사이에 녹색으로 제법 자라 있었다. 국일의 마음은 내게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나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국일이 믹스 커피를 타서 마시고 나니 율이 막 들어섰다. 율의 손에는 찐 고구마가 들려 있었다. 찐 고구마는 율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율의 고구마만큼 맛있게 찌기가 어렵다고 싱과 젠과 국일까지 감탄했었다. 내 생각에 고구마 찌는 게 무슨 비법일까 싶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율, 나 좀 봐.”


율이 고구마를 풀어놓기 무섭게 하나를 집어 든 국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점심 안 드셨구나. 물부터 드세요. 잘못하면 체해요.”


아니나 다를까 율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국일은 벌써 캑캑거렸다. 국일 답지 않게 서두는 모습이 낯설었다. 겨우 진정을 하고 나자 국일이 정색을 하고 율에게 물었다. 


“율, 몰라서 하는 얘긴데. 혹시 내 시집 본 적 있어?”


국일의 질문이 느닷없어 율은 잠시 뜸을 들이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확실하지 않게 말했다. 


“시집요? 아, 그 파란색? 이사할 때 제가 보긴 했는데 글쎄...... ”


율이 눈으로 책꽂이를 훑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국일의 질문에 율은 또다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든 듯 대답했다.


“저는 시 안 읽는데요? 국일 시뿐만 아니라 모든 시를 안 읽어요. 학교 다닐 때 국어책에 있던 시를 외우라고 해서 학을 뗐거든요. 아니, 왜 시를 외우래?”


율의 대답에 국일은 먹던 고구마를 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지난주에 젠을 만났는데 내 시집 얘길 하더라고. 시집 낸 게 언젠데 무슨 기억이 있겠어? 시집 제목도 잊어버릴 판인데. 그런데 젠이 ‘딸에게’라는 시를 읽었다는 거야. 그리고 뭐라는 지 알아? 아이가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대. 벚꽃동산에서 아이가 노는 그런 그림.”


국일의 열띤 설명에도 율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죠. 아이가 없다고 못 그리는 건 아니잖아요? 나도 그리는 걸.”


“그런 얘기가 아니고, 왜 내 시 얘기를 하느냐는 거지. 신경 쓰이게.”


국일은 또다시 물을 마셨다.


“아니, 시 내용이 뭔데요? 이상해요?”


율의 질문을 듣자 국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들어도 율의 질문은 지나쳤다. 시가 이상하다니. 그러나 국일은 곧 표정을 회복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도 궁금해서 오죽하면 읽어봤다니까. 그냥 평범해. 딸에게 보내는 사랑, 애정 그런 거더라고. 그런데 관계의 상실과 회복을 바라는 구조이긴 해서 물어보는 거야. 혹시 젠에게 아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니까.”


작업실 안에서 자녀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더욱이 최근에 손자를 본 싱의 경우는 손자 이야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도 그들의 가족 상황과 살림살이를 눈에 보는 것처럼 환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 속에서 젠의 특이점을 발견하진 못했다. 젠은 주로 남편의 흉을 보거나 친정엄마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우리가 모를 수가 있어요? 미주알고주알 다 떠든 세월이 얼만데?”


율은 괘념치 말라고 하곤 자신의 캔버스 앞에 가서 앉았다. 율은 보통 작업실에 와서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이 맡은 회비 관련 장부를 정리하거나 했다. 그런데 요즘 아크릴의 매력에 빠져서 주로 아크릴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크릴의 빨리 마르는 특성 때문에 일단 그림을 시작하면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율의 모습이 생경스러워 국일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생에 원수였던 사람이 부모 자식으로 만난다더니, 자식이란 게 그래.”


한참을 침묵 속에 있던 국일의 중얼거림에 율이 붓을 멈추더니 물통에 넣었다. 


“왜, 무슨 일 있어요?” 


“아들이 제 아빠를 자주 만나더라고. 벌써 오래전부터. 같이 사는 여자도 좋아하는 눈치고.”  


   

국일의 이야기를 듣자 그녀의 이혼이 떠올랐다. 그림을 시작한 지 불과 2년 만엔가 그녀는 이혼을 해서 이 모임의 1호 이혼자가 되었다. 꽤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이후에 다른 이혼자는 나오지 않았기에 기억에 남았다. 


국일은 CC로 만나 일찍 결혼해서 아들을 둘 두었다. 대학의 대표 미녀로 뽑힐 만큼 예뻤던 그녀의 연애는 이야기를 몰고 다녔다. 그중 한 에피소드는 남자 집안이 엄청난 부자라서 키도 국일보다 작을까 말까 한 남자를 그녀가 선택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온갖 소문과 부러움 속에 졸업하자마자 한 결혼이 10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으니 국일의 이혼은 결혼만큼이나 커다란 이슈였다. 국일의 남편이 이혼을 요구했는데 남편은 집과 아들과 부동산을 다 포기하고 10년 어린 여자를 선택했다는 것이 가장 큰 화젯거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혼에 동의했어요? 얄미워서라도 안 해 준다던데”


당시 발령받은 지 3년 남짓한 새파랗게 젊었던 율이 한 질문이었다. 


방학 중인 텅 빈 미술실에서 국일과 율이 우연히 만나 나눈 얘기를 나는 기억한다. 30년 전의 그날은 비가 얼마나 쏟아지던지 귀를 잘 기울여야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떠났는데 서류로 옭아맬 필요는 없잖아? 그래야 나도 자유롭고. 나라고 좋은 사람 만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세상에 널린 게 남자야.”


그러나 그렇게 호기롭게 얘기하던 아름다운 국일은 여전히 혼자였고 지금은 늙어가고 있었다. 

     

“큰 아이는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고, 작은 애가 그래. 사실 이젠 성인이니 아빠의 삶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행동을 섭섭해하는 나한테 화가 나는 거야.”


율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국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혼하고 꽤 지난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빠를 만나겠다고 하더라고. 그전엔 아빠가 만나자고 해도 거절했던 애가 말이야. 그런데 그날 왜 그런지 난 우리 엄마 생각이 났어. 난 딸이 없잖아? 우리 엄마 생각을 하고 쓴 시가 '딸에게'였어.  내가 엄마를 많이 힘들게 했거든. 그때 우리 엄마도 나에게 이렇지 않았을까 싶어서. 엄마에게 나는 이런 존재였을 거라는 상상 속에서.”


차분하게 이어지는 국일의 말을 들으며 율은 화를 낼까 말까를 고민했다.

 

‘바람난 아빠를 이해한다고? 아들이 나이 들면?’


율의 작고 긴 눈이 눈동자를 휙 돌려 국일을 향했다. 눈으로 사람을 공격한다면 아마도 저런 눈빛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니라고 봐요. 아빠가 자기 잘못을 인정한 것도 아니고 무슨 바람이 장한 일도 아니고...... 그래도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나 봐요. 그럴 때 엄마 생각이 났다니.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싸우느라 딸들이 공부를 하는지 집을 나가는지 죽었는지 관심도 없었어요. 우리는 그냥 방치되었는데. 그런 집 떨치곤 잘 자랐죠?”


율의 말에 국일은 힘없이 웃었다. 아마도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우리 엄마도 평생 아팠어. 그래서 자식들에게 어떤 사랑도 돌봄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거든.”


“그런데 무슨 엄마의 마음으로 시를 썼다는 건가요? 아픈 몸으로 내 딸을 어떡하나 하는 그런 걱정? 그 시, 정말 궁금하네요.” 


이해할 수 없다는 율의 시선에 국일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한 부분만 읽어줄게. 내가 쓴 시를 내가 외우지도 못해.”


국일은 수줍은 듯 배시시 웃더니 핸드폰을 열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너와 내가 엄마와 딸이었던 

  특별한 이야기들.

  가슴 설레던 순간과

  드러내지 못한 기쁨과

  한숨 같았던 슬픔은

  알지 못했던 사랑이었음을>

  

시가 더 이어지리라 생각하며 감상모드로 들어간 율은 금방 중단된 낭독에 눈을 샐쭉거렸다.


“벌써 끝? 무슨 뜻이에요? 결국 사랑의 관계였다는 거네요.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거죠? 국일도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는.”


국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도 아들에게 그 시를 들려주고 싶어요?”


어이없어하는 율의 질문에 국일은 멈칫거리다가 웃었다.


“아니지, 모든 예술은 사기라는 말에 완전 동의해. 만일 지금 아들에게 이 시를 들려준다면 마지막 ‘한숨 같았던 슬픔’의 시기겠지?”


국일의 웃음에 율은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소리쳤다.


“맞아. 젠도 딸은 없지만 자기 엄마에게는 딸이잖아요? 국일이 그런 것처럼. 저는 시 전체를 안 봐서 모르겠고, 아니 봐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국일의 시가 젠에게 감동을 준 거라는 데 한 표. 젠이 아이 그림을 그리고 싶을 정도의 감정을 일으킨 거죠. 더 이상 고민하지 마세요. 언제고 젠이 얘기하겠죠.”


“그럴까?”


국일의 소리가 훨씬 밝아져서 율은 즐거워했다.


“그래, 우리가 인생의 여러 지점을 지나지만 그럴 때마다 이곳에서 마음을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축복이야. 특히 나 같은 이혼녀에게는.”


“무슨 말을 그렇게 밉게 해요?” 


율이 국일의 등짝을 도닥이는데 두들겨 패는 수준이었다. 국일과 율의 웃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벽을 진동시킬 지경이어서 나는 못에 꼭 붙어 있어야 했다.

 

“율이나 나나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저녁 먹고 가지?”


즐겁게 웃으며 떠나가는 나이 든 두 여자의 뒷모습이 내게 노을 같은 부드러움과 서글픔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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