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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Oct 09. 2024

6755호실 (15)

목수가 오다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형광등의 빛에 잠시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지만 6755호실에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아직 벽에 걸리기 전이어서 테이블에 뉘어 있었다. 매 전시회장에서 그랬듯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율이었고 싱도 함께 있었다. 목수는 나를 테이블에 풀어놓았고 율의 헝겊 가방은 주인에게 돌아갔다. 


“시계가 더 정교해진 것 같지? 아, 이마에 새만 있었는데 꽃이 더해졌네. 훨씬 아기자기하다.”

나를 본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같으면서 다른지 신기하다며 목수의 솜씨를 칭찬했다. 그러자 나도 공연히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어디선가 장미꽃 냄새가 스며들어 혹시 밍이 왔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 때마다 밍에게서는 마치 옷 어딘가에 장미꽃을 감춘 듯 은은한 장미향이 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업실에 혹시 밍이 왔었다 해도 장미향을 품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전시회장이 아니니까. 


“어머, 싱도 왔네. 난 율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동네가 재개발이니 뭐니 후줄근하긴 해도 골목골목 덩굴장미를 심어 기르는 로맨틱한 동네야. 오면서 행복했다니까.”

국일이었다. 여전히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는 그녀는 목수를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상냥하게 인사를 차렸다.

 

“아, 강목수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커피 한 잔 드리겠습니다.”

국일이 커피 준비를 하려고 하자 목수는 사양했다. 저는 커피 안 마십니다. 아, 그러시구나. 국일이 율을 보고 눈짓했다. 


“허브차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캐모마일이요”

율이 국일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물었다. 율은 목수를 싫어했는데 그동안 변심이라도 한 것일까?

어쨌든 목수 덕분에 작업실은 국화향으로 가득 찼다. 개성이 강해서 각자의 취향대로 커피나 녹차, 홍차나 우엉차등을 마시던 이들이 오늘은 캐모마일로 통일을 한 것이 놀라웠다. 달콤 쌉싸름하면서 민트의 미묘한 맛을 생각나게 하는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았더라. 나는 기억을 되돌려 봤지만 찾지 못했다. 

테이블에 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그들은 한참 나를 칭찬했다. 사실은 내가 아니라 목수의 솜씨를 칭찬했다. 율이 비용을 물었지만 목수는 손사래를 쳤다. 


“언제나 무상입니다.”


“그건 부담인데요. 수고하신 대가를 제대로 지불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계좌 알려주시죠.”

율의 다소 사무적인 어투에도 목수는 괘념치 않고 받을 수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 시계뿐만 아니라 제 작품 전체에 대해서 무상 수리입니다. 그 대신 비싸잖아요?”   

목수의 말에 사람들은 살짝 웃었다. 비싸긴 했지.


“그런데 목수님. 아니, 목수씨, 아니 강목수님. 참 한결같으세요. 저희 전시회에 한 번도 안 빠지신 것 같아요. 전시회가 거듭되면 가족들도 나중엔 오지 않는데요.”

싱이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거의 회복된 것 같아서 깜짝 놀라면서도 기뻤다. 


“그러게요. 일부러 가는 것은 아니었는데 인사동에 가면 꼭 선생님들 전시회를 만나더라고요.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는 아예 전시회가 멈춘 것 같네요. 이젠 하실 때도 된 것 같은데.”

목수가 차를 마시며 마치 밍처럼 얘기했다. 밍과 목수는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길게 묶은 머리와 반듯한 이마는 비슷했다. 물론 머릿결은 밍이 훨씬 좋았고 목수는 약간 곱슬 거려서 덩치 큰 개 레트리버 꼬리 같았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만. 목수님이나 우리나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으니 아시겠지만 사는 게 만만치 않죠? 어느 세상이나 별 일없는 세상이 있겠어요? 또 어떻게 보면 별일이 아니기도 하고. 하여간, 목수님 계시는 강원도는 좀 다른 세상일까요?” 

싱이 작은 소리로 차를 조금씩 마셔가며 속삭이듯 얘기했다. 목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동의한다는 의미의 웃음으로 보였다.

 

“역사 이래로 전쟁을 겪지 않은 최초의 세대라고 하는데, 물론 고마운 일이죠. 그러나 개인의 삶은 전쟁 같은 삶들을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당연히 어떤 어려움도 전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 여자의 시선을 편안하게 받아내면서 목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선생님 그림이 저는 좋았습니다.”

율을 바라보며 목수는 진심으로 얘기했다. 내가 느끼기에 목수는 율에 대해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 진심이 남녀 간에 생길 수 있는 감정인지는 아리송했다. 

 

“그림이 좋다는 거예요, 아니면 율이 좋다는 거예요?”

싱이 무심한 척 끼어들었고 국일은 흥미롭게 목수를 바라봤다.

 

“둘 다라고 얘기하면 좀 이상할까요? 그동안 저는 그림과 작가가 똑같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봐 왔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림과 사람이 일치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제 마음에서는 그렇다고 얘기하네요.”

목수의 말에 싱은 박수를 쳤고 율은 얼굴이 상기되었다. 얼굴 윤곽이 동그랗고 눈이 가느다란 율의 동안은 붉은 기운 때문에 더욱 어려 보였다. 그러나 화가 나서 상기된 것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좀 명확하게 이야기를 해 주시면 율이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국일이 학습 분위기로 몰아가며 약간의 상기된 기류를 누그러뜨렸다. 

목수는 다시 한번 소리 없이 웃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생님 그림을 보면, 어떠한 여과장치 없이 마음을 그대로 쏟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에요. 물론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캔버스에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 사람 자체를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 그림이 생각보다 드물어요. 그런데 선생님 그림이 그래요. 아무런 장치 없이, 비유나 뒤틀림도 없이, 멋 내지 않고 허세 부리지 않고 날 것 그대로 그린 그런 그림이요. 당연히 제 개인적인 취향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목수가 저렇게 얘기를 잘하는 줄 몰랐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밍과 닮았다고 생각한 내 직감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밍도 과거에 목수와 비슷한 이야기를 율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밍과 목수의 취향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목수는 율의 그림이 좋다고 얘기했지만 밍이 율의 그림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수의 호평에도 그러나 분위기는 썩 명랑하지 않았다. 모두들 향기로운 서양국화차를 그냥 향기가 없는 듯 마셨다.

 

“뭐. 애들 그림 같단 얘기네요. 그런 얘기는 전에도 들었어요. 창피하네요.”

율은 분명히 기분이 상했다는 표현이었는데 표정이나 태도에는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 저런 어법은 어떻게 구사하는지 나는 궁금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건 율, 네가 알잖아. 누군들 자기 그림에 대해서 만족할까? 그런데 내 그림이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정말 좋아하는 거라는 걸 알게 돼. 그래서 그림을 사기도 하잖아. 그 사람들이 뭐 돈 아깝지 않겠어?”

싱이 더욱 작아진 소리로 분위기를 회복시키려 애썼다. 


“내 엑스 시어머니는 그림이 좋다기보다는 엑스 며느리에게 재정적 우월감을 자랑하려고 사시던데? 그래도 엑스 시댁에 가보면 그림을 거셨더라고. 그럼 싫어하는 건 아닌 거지?”

국일의 얘기에 모두들 가볍게 웃었다. 이제 국일은 자신의 전남편이나 전 시어머니에 대해서 아무런 나쁜 감정 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행이었다. 국일의 이야기를 대충 이해한 목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잠깐 국일을 바라봤지만 곧 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선생님을 불편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이 좋고 그 그림을 그린 작가가 좋다는 것이 팩트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이성적으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도 아무런 부담 갖지 마세요. 사실 작가라면 이런 팬 몇은 생기는 법이고 그에 대해서 저절로 책임감을 갖게 되잖아요. 저도 그런 팬이 몇 분 계셔서 늘 제 작품에 신경을 씁니다. 선생님들도 제 팬 아니십니까? 삼십 년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예요.”

목수의 이야기는 꽤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재밌었다. 그리고 나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나 때문에 오랜 시간 팬을 갖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팬 아닌데요?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특별한 시계가 필요해서 수소문해 목수님을 찾았고 시계를 부탁했고, 그게 삼십 년 만에 고장이 나서 수리를 부탁했을 뿐인데요?”

율의 약간 심통이 난 것 같은 말투에 목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목수만이 아니라 싱과 국일도 아이처럼 까르륵 웃었다. 


“뭐야, 율. 실망한 거야? 목수님이 고백하지 않아서? 아유 재밌다.”

싱의 놀림에 율이 벌떡 일어나 싱의 어깨 근육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율의 악력은 대단해서 보기엔 안마 같으나 사실은 욱신거리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 싱은 아프다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한바탕의 소란이 끝나고 목수는 일어섰다. 그런데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 미련이 그의 눈가에 남아 있었다. 


“뭐 하실 얘기라도?”

눈치 빠른 국일이 목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남자 선생님이 언제 작업실에 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막 그리시던.”

목수는 눈으로 작업실의 그림들을 훑다가 국일에게 물었다. 작업실에는 수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요즘 그린 것으로 암석으로 덮인 사막인지 벌판인지 아주 단단하고 황량한 그림이었다. 


“글쎄요. 혹시 수 오빠가 언제 작업실에 오는지 알아?"

목수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국일이었으나 이사한 이후로는 국일도 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내가 알기론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오는 것 같아. 혼자서 연도 만들고 그림도 그린다던데. 젠이 몇 번 만났대. 그런데 꼭 어떤 날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수요일과 토요일을 정기적인 날로 정했지만 언제 오든 자유니까. 수 오빠를 만나려면 약속을 미리 주시는 게 좋으실 것 같네요. 목수님이.”

싱의 설명에 목수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연을 만드신다고요? 날리는 연이요?”


“네, 가오리연만 만든대요. 방패연은 어려운가? 하여간 연 만드는 건 확실해요. 저도 봤어요. 수 오빠 연.”

오랜만에 율이 나서서 수의 연 만드는 범위를 알려줬다. 물론 수가 방패연이 어려워서 안 만드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가오리연만 만드는 것은 맞는 얘기였다.


“그러시구나. 아니, 그분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제가 그분 번호는 없어서 율 선생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수는 공손한 인사와 함께 작업실을 떠났다. 뒤에 남은 싱과 국일, 율의 호기심이 작업실의 공기를 채웠다. 누굴까? 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그 사람은? 아마도 그런 의문일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이름 ‘은혜’를 그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알려줄 방법도, 왜 그런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은혜가 왜 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 만남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아니 만날 수나 있을지 모든 게 그저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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