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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아임더 Oct 07. 2020

9. 울릉도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

울릉도 4일차, 동행 여행

* 이 글은 지난 4월 말, 한국에선 코로나가 종식되는 줄로만 알았던 그 시기의 여행입니다.

* 사회적 거리두기, 개인 방역을 매우 철저히 준수합니다




그래서 누나 어디갈래요? 라는 말에 음, 그렇게 유명하다는 나리분지? 라고 말하자 나리분지로 차는 출발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나리분지라는 지명을 울릉도에 와서 처음 들어봤다. 변명 하자면 수능 사회탐구 영역에서 다들 한다는 한국지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 그리고 여행을 많이 다녀서 길을 잘 찾는 줄 아는데 실제로는 길치인데다 지도도 못보는 나에게는 지형이나 지리엔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이 교과서에서 많이 보던 나리분지! 라고 하자 교…과서요? 라고 할 정도로 나는 지리에 관해서는 지식이 중학생 수준의 그것에서 멈춰있었다. 그렇지만 하도 나리분지의 산채 비빔밥이 맛있다더라, 나리분지에 가면 울릉도에서 보기 드문 평야가 있다더라 하는 얘기를 듣다보니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게스트하우스 사람을 샌딩(?) 해준 항구가 울릉도 동쪽의 끄트머리에 있던 저동항이라서 어디로 가나 정 반대방향에 있어서 차를 조금 가야한다는 설명에 그렇구나 하면서 울릉도에 와서 가본 관광지와 가볼 관광지를 생각 해 보는데 왠만한 것은 다 가는구나 싶었다. 사람들과 일출을 보며 갔던 행남 해안산책로, 그리고 들렀던 예림원, 독도, 나리분지, 그리고 내일 아침엔 관음도까지 간다면 왠만한 굵직한 관광지는 다 가보는 것 같은데. 아무 계획 없이 왔음에도 볼만한 것은 보고가는거 아닌가 해서 무계획 여행임에도 알차게 즐겼다 싶어 뿌듯해졌다.


2년 전 쿠바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목적지만 정해둔 채 여행지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알아가는 여행을 해 봤었는데 그때 상당히 불안해 하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던것과 달리 울릉도에서는 그냥 자유롭게 그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쿠바와 국내여행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 길 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새 나리분지의 시작점인 천부에 도착하여 나리분지로의 산행을 하는 길을 보며 창문을 슬그머니 열고 차가 운전하며 만들어내는 바람이 살랑거리며 머리속까지 시원하게 흔들며 산바람을 실어오는 것을 폐 가득히 담고 있는데 우리 앞에 가는 차가 엄청 버벅거리는게 보였다.


당시 수원에서 온 동생이 빌린 차는 SUV차량이었는데, 앞에 가는 차는 모닝이었다. 나리분지 언덕길을 사진으로 찍어 둔 것은 없지만 나리분지는 절대로 걸어올라갈 생각 하지말라고 갔다온 사람들이 내게 말 했을 만큼 경사가 자비없는 길이었다. 내가 걸어올라갈 수 있을까요? 라고 별 생각 없이 말했기 때문이다. 모닝이 힘들게 올라가는걸 안쓰럽게 보고있는데 결국 앞서가던 모닝은 먼저 가라고 길을 내 주었고, 그를 제치고 나리분지에 한참을 더 올라간 후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도대체 차가 몇번의 커브를 돈건지. 확실한 것은 커브 길 옆에 펼쳐진 바다는 여전히 예뻤다는 것이었다.



나리분지는 성인봉의 화산활동으로 인해 화구가 함몰되어 생긴 지형이라 울릉도에서 보기 드문 평지가 위치한다더니, 확실히 차에서 내리자 여기가 울릉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속에 둘러쌓여서 고요하게 어디선가 들리는 새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기에. 그리고 울릉도에서는 어딜 가나 바다가 내 옆에 함께 했다. 그런대 바다도 안보이는데다가 이렇게 산으로 둘러쌓인 지형을 보고 있자니 울릉도에 온지 3일 정도 뿐 이지만 바다가 안보이는 이 상황이 약간 어색하기까지 했다. 울릉도에서 내내 바다와 함께했어서 그런가.


나리분지는 이게 끝이죠 뭐. 저기 산채비빔밥집 가서 밥 먹을래요? 근데 우리 밥 먹은지 얼마 안돼서.


차를 주차하고 난 동생이 말을 걸었다. 확실히 배가 고프진 않았고, 나리분지의 고요함을 보고 나서 더 갈곳이 없을까 머리를 굴리다가 생각났다.


이 근처에 신령수 있지 않아?

아, 그거 성인봉 등산하는 길에 있다던데.

엇….


나리분지에서 성인봉으로 바로 입산 할 수 있는데 그 길목에 있다는 신령수나무와 약수터가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한 말인데 그대로 성인봉으로의 등산이 시작됐다. 평소 운동과 거리가 먼 직업을 가졌고, 그 직업 덕분에 운동보다는 야근을 밥먹듯 하는 나에게 등산이라는 과도한 미션이 내려진거 아냐고 은근히 회유를 시도하는 내 말은 한 귀로 흘리는게 뻔히 보이는 동생을 등짝을 보면서 차마 며칠전에 만난 사이라 이렇게밖에 회유(?) 할 수 없다는게 너무 아쉬웠다. 좀 더 친한 사이라면 나 못가! 라며 바닥에 드러누웠을텐데.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신령수까지의 길은 완만한 경사여서 힘들게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피톤치드 향도 맡아보고, 올라가는 길에 곳곳에 명이나물 밭이 보였다. 저게 뭐야? 라는 내 질문에 본인도 여기에 처음 오면서 명이나물 밭이래요. 라고 답해주는 동생이 신기해서 나리분지에 있구나? 라며 좀 더 자세히 물어봤는데 신기하게도 다 답해주는게 아닌가. 분명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기소개 할 때 듣기로는 너도 나처럼 독도만 보고 울릉도 들어왔다더니 너는 왜이렇게 잘 알아 배신감 느껴지게.


내가 배신감을 진하게 느끼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산행을 하며 신령수를 향해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갈래길이 나타났다.



표지판도 없이 덜렁 세갈래길이 나오니 이게 뭔가 싶었다. 아이유의 분홍신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질 것 같은 풍경이었다. 길을 잃었다, 어딜가야할까. 세갈래로 갈린 조각난 등산로 어딜 가야 신령수를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신령수에 가자고 말 해놓고 헐 갈래길이다 어떡해? 라고 똑같이 이 길을 처음 오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 이쪽도 답이 없는건 마찬가지인지 핸드폰을 꺼내서 열심히 뭔가를 검색 하더니 아, 여기서부터는 가면서 리본이 있는 쪽을 찾아야한대요. 라고 말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열예님의 티스토리


성인봉으로 향하는 길이 여기저기에서 시작되는 만큼 길을 잘못찾으면 갑자기 다른 목적지로 나타날 수 있으니 성인봉으로 향하는 길은 길 곳곳에 보이는 리본을 통해서 찾아야한다고. 그렇게 갑자기 보물찾기 같은 리본찾기를 하며 이런 산행은 또 처음이다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길을 헤매고 있는데도 전혀 불안해 하지 않는건 역시 혼자가 아니라서 가능하겠다 싶었다. 나 혼자서 나리분지에 왔었고, 혹시라도 신령수나무가 궁금하여 가겠다고 했으면, 아마 이런 갈림길이 나왔을 때부터 어딜 가야하는거지. 라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아 어떡하지 하며 고민하다가 다시 돌아갔을 것 같다는 스스로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결론이 그려졌다.


담아온 아로니아 원액에 담아 원샷


다행히 길을 찾고 난 후 올라가다 보니 약수터가 보였다. 여기서 물을 마시면 아들 낳는다고 하던데. 결혼은 먼 미래의 일이라 생각하고 출산은 당연히 내 인생에 없을 이벤트로 여기는 나로써는 별 상관없는 미신이었다. 가져왔던 물통에 물을 담은 후 숨을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동생이 위험한 (?) 제안을 했다.


누나, 여기가 성인봉 초입이래요. 여기서 얼마 안간다는데? 올라가볼래요?

얼마나 간다는데?

음 뭐 한시간 정도?


시계를 흘끗 보니 세시가 다된 시간, 올라갔다 와도 다섯시면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이날의 울릉도 하늘이 흐렸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데 쐐기를 박았다.


여기 올라오는 길도 원래는 한참이라는데 금방올라왔으니 성인봉도 금방 올라가지 않을까요? 제가 성인봉을 안가봐서 궁금하거든요.


그 말에 이 동생이 가는 일정에 끼워달라고 우겼으니 얘가 가고싶은거만 졸졸 따라다녀야지 하고 생각했던게 떠올라서 알겠다고 앞장서라고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했는데.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이 어렵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여길 갔다온 게스트하우스 사람들 중 어떤 언니는 여길 청바지였나 원피스를 입고도 올라갔다왔는데 난 편한 바지를 입었으니 괜찮겠지 하고 별 생각없이 출발했는데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보고 점점 나는 말을 잃어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등산 하며 체험한 개인적인 등산로에 대한 선호도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길 >>>>계단 이었다. 계단은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계단에 내 보폭을 맞춰야하다보니 오히려 더 올라가다 지치기 쉬웠다. 그래서 계단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누나 왜 점점 말이 없어져요. 라고 묻는 동생이 얄미웠지만, 원래 운동이 취미라고 했던게 거짓말이 아닌듯 땀도 흘리지 않는 동생을 보고 운동의 중요성을 가슴깊이 느꼈다. 서울 돌아가면 꼭 운동 조금씩이라도 해야지.









얼마나 올라갔을까. 중간중간 야 나 너무 힘들어 여기서 포기할래. 라고 하면 아 누나 이제 300m남았다는데. 올라온게 200m인데 올라온만큼만 더 가면 되는데? 라며 프로 채찍러의 멘트에 한숨을 깊게 쉬고는 나를 끌어올리는 동생이 정말 얄밉고 알고 지낸지 얼마 안됐다는걸 다행으로 여겨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한 사이였으면 나 못가 나 밟고가! 라고 했을텐데.


성인봉의 등산로는 정말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그래서 주변 경치를 둘러볼 생각도 들지 않고, 이 끝없는 계단이 언제 끝나는가. 시시포스가 바위를 끌어올렸던 경사를 보는 것 같았다. 하루종일 올라가도 끝날 것 같지 않은 계단길. 한시간이면 간다는데 한시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나. 갑자기 인터넷에서 봤던 유머 글이 생각났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싶으면 플랭크를 하라던 말. 회의가 너무 길어질 때는 단체로 플랭크를 하면서 회의를 하면 매우 빠르게 회의가 종료되고, 인생이 느리게 간다는 걸 느낄 수 있다던 유머글. 인생이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 싶은 사람은 울릉도 성인봉을 올라보아요. 1시간이면 간다는데 1시간이 천년같아요.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와서 와! 끝인가? 해치웠나? 따위의 농담을 억지로 짜내었는데 길이 또 있었다. 이 길은 뭐야? 하는 우리를 내려오던 울릉도 주민분이 발견하고는 좀 늦은 시간에 올라왔네? 라며 말을 거셨다. 얼마나 더 가야하는거냐고 길을 여쭙자 정말 금방이긴 한데, 여기서부터 길이 험해진다고 조심하고, 오늘은 날이 흐려 해가 일찍 지니 빨리 내려오라는 말을 남기셨다. 그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지만 좀만 더 가봐요 누나, 여기까지 온거 아깝잖아요. 라는 말에 그래! 라며 다시 발을 옮겼다.



다행히 계단이 없어서 이제 내 보폭에 맞춰 편하게 움직일 수 없어서 길이 험하다 하셨던 주민분의 말에 걱정했던 것 보다는 훨씬 편한 등산로를 올라가는데 길이 확실히 험하긴 했다.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그런지 비를 가장 먼저 맞아서인지 등산로가 무너진게 많이 보였다. 그리고 곳곳에 벼락맞은 나무가 보여, 벼락맞은 나무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인지라 너무 신기했다.


벼락이 찢은 나무 (?)


높은 곳에 있어서 가장 먼저 비와 벼락을 맞았기에 만들어진걸까. 아무래도 울릉도 주변에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벼락이 꽂힌다면 여기가 가장 제격이겠지. 그럼 토르가 내려오기엔 가장 편한 위치이려나. 벼락이 땅에 꽂힌다는건 제우스가 화나서 내려꽂은걸까. 따위의 문과생 다운 상상을 하며 앞서가는 동생의 등짝을 보고있자니 어 다왔어요! 라는 말에 조금 더 힘을 내서 올라갔다.

정상이었다.



서울에서도 서울에 위치한 산은 여기저기 많이 올라가봤으나, 우리나라의 특징상 산 하나만 우뚝 서 있지 않고 산맥이 너르게 펼쳐져 있어 정상에 올라가도 아무것도 없다. 라는 생각이 들긴 조금 어렵다. 내가 정상에 올라가있어도 옆에 다른 산맥이 보이기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울릉도의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울릉도의 정 중앙에 있는 산이라 그런지 당연히 다른 봉우리도 존재했으나, 정 중앙에 있어 다른 봉우리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울릉도의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 그 감상만 생각났다.


아무것도 없는 꼭대기에서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아도 주변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구름, 저 멀리 보이는 바다,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고요함, 그리고 나. 그게 전부였다.




비슷한 상황(?)일지도 모르는 한라산에 올라가본 적이 없어 이런 아무것도 더 이상 나와 높이를 견줄 수 없는 위치의 경치는 처음 봐서 그런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마구 튀어나왔다. 아까 벼락맞은 나무를 보고 그리스 신화를 생각해서 그랬던건지 올림푸스 산의 꼭대기엔 산이 산다는데 실제로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본다면 이런 감상일까. 울릉도의 꼭대기에 산이 산다는 신화는 없지만 그 허무함이 있다면 이런걸까 하는 따위의 생각이 마구 튀어나왔다.


키가 조금 더 컸으면 나무 뒤 바다를 봤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정신차리라는 듯 바람이 매우 매섭게 불었다. 아까 만났던 주민분이 날이 흐리다고 하시더니 진짜 비가 오려는듯 먹구름이 오는게 눈으로 보였다. 그걸 보고 빨리 안내려가면 위험할 수 있겠단 생각을 동생도 했나보다. 내려갈까? 라는 말에 그래요! 라며 다시 하행길이 시작됐다. 다행히 한번 힘들게 올랐던 길이라 그런지 하행길은 가뿐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높이를 더 견줄게 없던 그 경치를 본 경험은 가뿐하게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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