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가을은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바꾼다. 아침엔 창가를 두드리는 잔비가 내리고, 잠시 뒤엔 햇살이 구름을 헤치고 들어와 젖은 돌담 위에 포근한 햇살을 흩뿌린다.
하늘은 짙은 회색과 옅은 청색 사이를 오가며, 바람은 흙 냄새를 품고 있다. 거리엔 색이 바랜 나뭇잎이 흩어지고, 축축한 낙엽이 바람에 밀려 구른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침묵 같은 색이 오히려 영국의 가을답다.
요 며칠 이유 없이 마음이 어수선했다. 문득, 조용하고 낯선 곳으로 떠나야 숨이 트일 것 같았다. 익숙한 공기 대신 낯선 하늘 아래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비가 그친 아스팔트를 달리던 중, 모모(남편)가 말했다. “여기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늘 그렇듯, 그의 말은 한 박자 늦었다. 몇 번을 놓치고 되돌아가길 반복한 끝에, 지도상 40분 거리였던 길은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창밖으로 안개 낀 구릉, 초록빛 언덕 위 양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길의 끝, 웨일스의 작은 산골 마을 머서티드빌(Merthyr Tydfil)이 우리를 맞았다.
마을은 조용했다. 언덕 위에는 허물어진 굴뚝과 체철소 잔해들이 남아 있었고, 회색 하늘 아래 벽돌 건물들이 눅눅한 숨을 쉬고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사이퍼스파 성(Cyfarthfa Castle)이 나타났다.
한때 ‘철강왕’이라 불리던 로버트 크로쇼(Robert Crawshay)가 19세기 초 세운 저택으로, 이곳은 영국 철강 산업의 심장이었던 머서티드빌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
두꺼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안내 프런트와 작은 기념품 가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편으로 이어진 좁은 계단은 지하 전시실로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다. 금속과 돌, 습기가 뒤섞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벽에는 녹슨 도구와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 전시실엔 붉은 깃발을 든 노동자들의 시위를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설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831년, 머서티드빌의 철강·광산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과 가혹한 환경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엔 분노보다 피로, 절망보다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 중 젊은 지도자 리처드 루이스(Richard Lewis)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지금도 그의 이름은 마을의 낡은 기념비 위에 남아 있다. 불빛이 꺼진 제철소의 굴뚝은 이제 침묵하고 있지만, 그 속엔,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뜨거운 숨결이 아직도 스며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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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나와 언덕을 내려가면 하이스트릿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돌로 지은 집들이 나란히 서 있고, 오래된 가게들은 긴 세월을 견뎌온 사람처럼 부드러운 햇살을 맞고 있었다. 간판의 글씨는 희미했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가을 햇살이 낮게 비추며 유리창 안으로 스며들어 빛을 흩뿌리고, 그 부드러운 빛이 천천히 보도 위로 번져갔다.
어떤 골목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지만, 그 고요함 속엔 이상하리만큼 포근한 온기가 머물러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낯선 이곳이 아니라 오래전 우리 시골 읍내의 오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 한가운데에는 세인트 티드필 교회(St. Tydfil’s Church)가 있다. 고요한 거리 한복판에서 회갈색 사암으로 지어진 외벽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그 빛이 마치 멈춰버린 시간 위에 얇게 내려앉은 듯했다. 교회 입구 앞에는 웨일스 왕자가 기증했다는 낡은 수돗물대가 서 있었다. 지금은 녹이 슬고 물도 나오지 않지만, 한때는 노동자들과 아이들이 그 물로 손을 씻고 목을 축였다고 한다. 차가운 쇠의 표면엔 수십 년의 손자국이 묻어 있었고, 그 위로 낙엽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19세기 말에 세워진 제과점 건물이 있었다. 창문 위에는 희미하게 ‘Since 1894’라는 글씨가 남아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안쪽 어둠 속에서 막 구운 빵 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 바로 옆 벽에는 낡은 공회당의 표지판이 매달려 있었고, 시간에 바래 글자가 절반쯤 지워져 있었다. 쇠락한 도시의 거리인데도, 이상하게 쓸쓸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이곳에서도, 벽돌 사이엔 여전히 온기가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 햇살이 거리 전체를 덮자,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쇳소리가 아닌, 시간의 소리였다. 한때 굉음으로 가득했던 도시가 이렇게 조용해질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로 다가왔다.
다시 언덕 위로 올라 마을을 내려다봤다. 잎이 지거나 갈색으로 물든 나무들, 천천히 흐르는 강, 멀리서 울려오는 교회의 종소리, 한때 쇳불이 타오르던 골짜기엔 이제 새소리만이 남아 있다. 도시의 흥망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불꽃처럼 오르고, 때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 불타던 제철소의 잿빛은 여전히 돌벽 속에 남아 있고, 그 위로 새로운 시간이 천천히 쌓이고 있었다. 머서티드빌의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지고, 웨일스의 바람이 내게 속삭였다. “모든 사라짐은, 다음 시작을 위한 쉼표일 뿐이라고…”